3월혁명이 일어난 100년 전, 그해 양력 정월 초하룻날도 이리 저물었을까.

친일매판집단 빼놓고는 적막했을까.


100년 지난 오늘에도 친일매판집단만 소요하다.

세월이 무색하다.


제발 이 적막 뒤에 그때처럼 3월 민중이 다시 봉기했으면.

제발 저 야차종자들이 올해마저 더럽히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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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홀로 나와 진료실 문을 열고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아흔을 썩 넘겼을 법한 노인이 버튼 터치로 여는 자동문 앞에서 쩔쩔매고 계셨다. 얼른 달려가 열어드린 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들어오시도록 안내했다. 노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나이 많으면 등신이 돼요.”

몸 떨림과 관절 경직을 호소하면서 노인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얼른 죽지도 않고 맨 아프기만 해서.”

시침하는 동안 노인은 띄엄띄엄 자신의 고통 핵심을 전하신다. 예순다섯 먹은 아들이 풍 맞아 팔 년째 누워 있어 그 수발을 드신단다. 이제 곧 백세가 되는데 그 삶의 신산함이 오죽하랴. 주머니 속을 뒤지는 노인께 성탄절 선물이라며 그냥 가시라 했다. 노인은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다만 얼마라도 받으시지.”

아, 어쩌나, 저 백년 미안을. 내 알량한 선물이 저 노인에게 또 한 짐 미안을 지웠구나. 왜 깨달음은 늘 나중에야 오는 걸까. 느릿느릿 돌아서는 노인 어깨에 아들이 매달려 있는 환영을 보는 찰나 내 눈물은 그대로 범람하고야 말았다. 

2018년 성탄절은 아기 예수가 이렇게 미안에 허리 접힌 노인의 모습으로 내게 오셨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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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에서 염증과 그 치료약이 정신장애 위험을 높인다는 대규모 연구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염증 치료약, 특히 항생제가 정신장애 위험을 한층 높인다는 사실이다. 항생제에 무제약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우리나라 아이들한테 이는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염증 치료약이 이렇게 위험한 것은 두 가지 능력(?) 때문이다. ①그들 대부분은 혈뇌장벽BBB을 그대로 통과한다. 혈뇌장벽은 뇌를 보호하기 위한 검문소 같은 것이다. 이 검문을 그대로 통과하는 대표적 물질이 니코틴이라는 사실 정도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②염증 치료약은 장내세균의 균형을 깨뜨린다. 장내세균의 균형 여부는 직접적으로 뇌에 영향을 준다. 인간의 정신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뇌는 외부에서 오는 정신의 수신기일 뿐이다. 외부세력(!) 중 소리 없이 강력한 이 작디작은 장내세균에게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 관련성에 민감한 정신 질환은 강박장애, 성격장애, 품행장애, 적대적 반항장애, 자폐스펙트럼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그리고 ‘조현병’으로 이름이 바뀐 정신분열증이다. 아이들 경우, 우울장애가 그런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세심하게 살필 일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런 메아리를 일으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자꾸 떠드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고 반응하게 하는 이야기다. 토건 식 질병과 약으로 미증유의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는 자들이 노리는 바다. 감사하며 죽어주니 꿩 먹고 알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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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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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삼 년째 이 푸른 별에서 살고 있다. 그 구곡양장의 시간은 각별한 질병 경험을 기준 삼을 때 크게 넷으로 나누어진다.


1. la Naïveté première: 일심一心 시대(0~22세)

2. la CritiqueⅠ: 입쟁立諍 시대(22~42세)

3. la CritiqueⅡ: 파쟁破諍 시대(42~62세)

4. la Naïveté seconde: 무애無碍 시대(62~84세)


흠, 그러면 여든넷에 내 생이 끝나나, 그건 모른다. 그 순간은 더 일찌감치 올 수도 있고 더 느지막이 올 수도 있다. 일단, 그때까지 이 ‘알아차린’ 삶의 도식에 넣어둔다.


22세에 찾아든 급성 충수염은 그 자체 통증도 그렇지만 마취 없는 절단 수술이 벼락같은 통증을 몰고 왔다(마이 리뷰『아픈 몸을 살다』<앓기에서 살기로>(2017.12.2.)). 그렇게 통증을 중심에 놓고 따지면, 그 수술이야말로 일생일대 질병이었다. 이 병들을 거치면서 나는 내 삶의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렇게 법학의 시대, 저 일차적 소박성la Naïveté première의 삶은 저물어갔다. 제1채널을 통해 아무 생각 없이 이식했던 통속한 삶의 목표와 수단이 붕괴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내 삶의 목표와 수단을 스스로 성찰하는 반란의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감지됐다. 그렇게 신학의 시대, 저 비판적 삶 제1부la CritiqueⅠ가 동터왔다. 나는 내 삶의 주체가 누군지, 더 큰 존재와 의미가 있는지 질문했다. 신의 길을 물으며 내가 도달한 곳은 인간의 길이었다. 이 반전은 서구신학이 지니는 일극집중구조 탓에 일어났다. 진리의 물질적 본질을 거세한 신학을 거절하고 몸의 진실을 찾아 나설 무렵 내게는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질병의 정점에서 나는 내 인생의 길을 다시 바꾸었다.


그렇게 한의학의 시대, 저 비판적 삶 제2부la CritiqueⅡ가 동터왔다. 반란의 시대 마무리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유했다(마이 페이퍼『아픈 몸을 살다』15-10<녹색비학>(10)①(2017.9.14.)). 이 경험과 맞물리면서 한의학으로 마음병을 치유하는 패러다임을 만들고 책을 쓰고 강의를 했다. 내 사유와 삶은 비대칭의 대칭구조 그 전체성을 향해 묵직하게 나아갔다. 생의 마지막 장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을 때, 홀연히 찾아든 질병이 바로 유착성점액낭염이었다.


유착성점액낭염은 그윽한 깨달음의 과정으로 나를 이끌었다(마이 페이퍼 <백일통오>(2018.4.10.)). 통증이 꼬박 십삼 개월 째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단계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이차적 소박성la Naïveté seconde의 시대로 이미 들어선 것이다. 모든 학문과 사상의 네트워킹으로 삶의 총체적 네트워킹을 이룰 때가 왔다. 변화는 진행되고 있다. 언제 어떻게 여울지고 휘돌며 번져갈지 나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나아간다. 낙관과 비관을 가로지르는 특이점에 뜬 신뢰의 별 하나 보고.


그러니까 여기가 모든 것의 가장자리다. 마지막 벼랑 끝이다.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걸고, 맡기고 뛴다. ‘에라’ 아니고 ‘그냥’


그리고 말들의 소리 사이에서

나는 당신의 고요하고도 낭랑한 영혼의 울림을 듣는다

거기에 그분께서 고독 속에 거하시며

말들이 오갈 때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준다 _파커 파머


초가을 내게 늦가을로 다가온 파커 J. 파머 어르신께 크낙한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캐리 뉴커머, 딱 내 스타일 음악에도. _()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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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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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인생의 늦가을을 견디면서 나는 자연이 믿을 만한 안내자임을 깨닫는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라지는 모든 것을 응시하기란 쉬운 일이다. 관계의 해체, 잘한 일들의 소멸, 목적의식과 의미의 쇠퇴·······하지만 가을이 대지에 그렇게 하듯, 삶이 우리에게 ‘거름을 주며’ ‘씨를 뿌리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가장 힘든 시기에도 우리 안에 가능성이 심어지는지 알게 되었다.(227쪽)


  인생과 결별하는 일이 즐겁기야 하겠는가. 내 성장을 도와주는 도전,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 또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 작별을 고하는 일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작은 몫이라도 보탤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하리라. 그런 전망으로 말미암아 삶은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이 된다.(247쪽)


죽음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 오자 나는 오랫동안 서성이며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엄밀히 따지면 죽음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숨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시점, 삶이 더 이상 번져가지 않는 경계선이 있을 뿐이다. 점도 선도 관념이다. 죽음을 말할 수 있는 산 자는 없다.


산 자는 죽음이 남기는 결과를 말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것은 “전망”만 할 수 있다. 죽음이 남기는 결과를 말하는 것은 삶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산 자가 남기는 최후의 이야기다.


최후의 이야기는 더 이상 목숨을 이어가지 않아도, 더 이상 삶이 번져가지 않아도 ‘거름을 주며’ ‘씨를 뿌리는’ 보탬으로 남을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는지, 살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이 성찰이 뒷날 후렴refrain-Carrie Newcommer의 <Leaves don't drop they just let go> 노랫말에서 취함-으로 소생할 때 비로소 그것을 죽음이라 부를 만하지 않겠나.


내 인생도 가을로 접어들었다. 내 삶이 다른 삶의 거름이 되겠는지 묻는다. 내 삶이 다른 삶의 씨가 되겠는지 묻는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잎을 돌아본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꽃 진 자리를 돌아본다. ‘추락’을 예감하면서 남은 날을 약속으로 가득 채울 수 있으려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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