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끝났는데 웬일인지 출근길 지하철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서너 정류장 지나 내가 자리에 앉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저쪽에서 크게 하품을 했다. 어쩌다 한 번이지 싶어서 그냥 지나쳤다. 아니다. 마치 자신의 방에 혼자 있으면서 내는 것처럼 크게 하품 소리를 연이어 냈다. 그리고 신문을 펴고 접으면서 부스럭대고 탁탁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곁들였다. 나는 궁금 무인지경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사람이었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겨 포마드 발라 붙인 모습이 실히 단정해 보였다. 노약자석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럿 비어 있는 주위 좌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임산부 보호석에 꼿꼿이 앉았다. 그의 손에는 물경 대한민국 최대 최고 가족신문이 들려 있었다. 잠시 뒤 그 남자사람은 상체를 뒤로 비스듬히 젖히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는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저 남자사람이 특이한 ‘진상’인가. 아니다. 70대라면 다수가 저런 행태를 보인다. 이게 대한민국 사회다. 아뜩하다는 생각이 들이닥친 바로 다음 순간에 풀쑥 질문 하나 솟아오른다. 60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는 그러면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얼른 주위를 살피고 자세를 고친다. 지하철역을 나서며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늙어가며 남기는 흔적에 부끄러움이 있을까, 행여 흘린 어른답지 못함을 어떤 젊은이가 치우고 있을까 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자아폭발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신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 책은 주로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특히 그것이 타락 이전의 선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방향으로 인류를 나아가게 했으며, 사실은 지금도 우리를 전진하게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타락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도약”이었다는 사실이다. 험한 환경에 대응하여 우리 선조들이 발전시킨 스스로 생각하는 새로운 능력은 선조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발명·창조성·합리성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선사했다.(177쪽)


스티브 테일러가 제시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다음 네 가지다.


① 기술 폭발과 체계화

② 새로운 종류의 문명

③ 새로운 종류의 창조성-구성력

④ 인과관계 인식-미신·금기 극복


그 동안 다양한 채널을 통해 우리가 익히 들어온 인류, 정확히는 인도유럽인 문명 예찬과 내용이 겹친다. 여기다 췌언 보탤 오지랖이 필요하겠나. 반대로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1) 저자는 말한다. “타락 이후, 예술품의 수준은 저하되는 듯하다.”(184쪽)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도 이와 같다. 즉흥성도 자유로움도 우아함도 기법도 쇠퇴했다. 자아폭발, 그러니까 왼쪽 뇌 기능의 오른쪽 뇌 기능 제압이 그 원인이다. 이 상태에서 톨스토이든 도스토예프스키든 베토벤이든 말러든 왼쪽 뇌 기능의 우위를 십분 활용하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겠나. 그 결과가 바로 구성적으로 뛰어난 그들의 소설이며 교향곡이다. 그들의 오른쪽 뇌 기능이 보통사람보다 월등하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타락문명이 요구하는 예술문법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위대하다 하는 것 또한 타락한 감성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예가 된 예술은 저자가 말하는 타락 초월 시대 제2차 물결의 흐름 가운데 있다. 타락 초월 정신이 빚어낸 새로운 창조물이다. 이들은 자아폭발의 긍정적 측면이 아니다. 자아폭발의 어둠이 끝내 삼키지 못한 빛의 발현이다. 육사 문학이 일제 식민통치의 긍정적 측면인가. 일제 식민통치의 어둠이 끝내 삼키지 못한 조선 자주정신의 발현 아닌가.


(2) 인과관계 인식은 불가결하다. 마법적 사고가 낳은 미신·금기로 죽임당한 사람, 망가진 사물, 부서진 사태가 그 얼마인가. 자아폭발이 일으킨 과학이 그 맹목을 걷어낸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 만큼, 아니 더욱 누락 불가한 진실이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힘으로 죽인 사람, 망가뜨린 사물, 부순 사태는 그러면 그 얼마인가. 인도유럽인이 모든 “신대륙”을 침략하면서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힘으로 죽인 원주민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예컨대 인도유럽인이 처음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원주민은 줄잡아 6000만 명이었다. 불과 200년 만에 그 숫자는 100만 미만으로 줄었다.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힘으로 죽인 것이다. 좀 더 가깝고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독일의 과학 발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 생체 실험에 힘입은 바 크고, 일본의 과학 발전은 731부대 조선인 생체실험에 힘입은 바 크다. 마법적 사고의 맹목과 과학의 맹목은 본질이 다른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둘 이상의 사람, 사물, 사태가 맺는 관계는 다양하다. 그중 인과관계는 얼마나 될까? 20세기 대표지성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20%가 못된다고 한다. 이 말이 진실이라 전제할 때, 인과관계를 통해 규명된 법칙에 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학은 세계의 관계, 아니 관계로서 세계의 20% 이하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결정론적 혼돈deterministic chaos으로 가득한 인과관계 너머의 더 큰 세계 앞에서 과학은 무엇인가? 당연히 어둠이다.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음에도 환유하여 그 진실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진실을 가로막는 데서 끝나지 않고 더 큰 마법적 사고 체계를 부양하기도 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정통’ 과학이 내놓는 답은 ‘없다’다. 이 답은 거대유일신교가 신봉하는 창조주 따위 개념에 대해서는 맞다. 타락 이전 선조들, 타락하지 않은 현존 인류들에게 이 답은 맞지 않다. 내가 말하는 소소 미미한 존재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네트워킹인 신 개념에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퍼뜨린 통속한 과학적 무신론이 인류 영혼을 파리하게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한심한 노릇은 그 엉터리 무신론이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미신인 사하라시아 기원 거대유일신교들을 한층 의기양양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의 주구 노릇을 대놓고 하는 이른바 창조과학의 미욱함에 이르면 도대체 과학이 미신과 어떻게 다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자아폭발 과학이 여태 드러낸 진실보다 가린 진실이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자아폭발 과학의 긍정적 측면이란 어쩌면 지주가 소작인에게 허락한 논두렁의 콩 같은 것이 아닐까. 자아폭발의 어둠이 끝내 삼키지 못한 빛의 발현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을 빚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사하라시아인들이 고향 땅의 사막(건조)화에 대응하기 위해 타락한 정신을 발달시켰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살기 어려운 건조한 지역이나, 다른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원주민의 경우는 어떠한가?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 사막 지역에 사는 애버리진, 티에라 델 푸에고(평균기온이 0도 이하며 식물도 거의 살지 않는다)의 야간족, 북아메리카의 에스키모인 또는 시베리아의 종족의 경우는 어떠한가? 왜 이 사람들은 그처럼 살기 어려운 곳에서 살면서도 사하라시아인처럼 변하지 않고, 타고난 평등주의와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식물이나 동물이 거의 살지 않는 건조한 환경이라고 해서 반드시 생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구에 달려 있다.(171쪽)


규모의 차이다.(172쪽)


2050년이면 세계 인구가 100억에 육박한다. 인구 증가는 인구압을 부른다. 인구압은 “자아폭발”을 증폭시킨다. 인구 증가폭이 큰 아프리카나 아시아 나라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질 것이다. 이런 추세만 본다면 “타락”한 인류는 더욱 참담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구절벽을 걱정하는 나라도 있지만, 국민국가체제가 보여주는 배타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큰 추세에 상쇄의 힘으로 작용하지는 못할 듯하다.


과연 진정한 “타락 초월 시대”를 인류가 열 수 있을까? 문제의 심각성에 반해 인구 증가가 양적으로 통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쟁이나 전염병도 어림없다. 이 문제를 깊이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절대는 것이 주제넘기는 한데 나는 질의 변화가 양의 위험을 덜어내고 타락 초월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의 변화란 타락 불가의 “규모”를 지닌 공동체 수평 네트워크로 인류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100억 명 전부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아니 그럴 필요가 당최 없다. 전인구의 3.5%만 불러내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대략 150인 내외의 공동체 200-250만 개 정도면 된다.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지레 체념할 일 아니다. 지구전체를 떠올리니까 거대한 과제처럼 보일 뿐이다. 이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인연을 따라 참여하면 된다.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일정 조건이 갖추어질 때, 순식간에 지구 전체로 번지는 현상이 일어나리라 본다. 기적도 아니고 신비도 아닌 것은 새에게도 일어나고 물고기에게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새에게나 물고기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인간에게도 일어나려면, 그러나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기적이나 신비를 일으킬 신적 존재를 전제하는, 허황해서 쉬운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공동체 네트워크를 꾸릴 3.5%는 수탈당하는 변방인이어야 한다. 아픔과 슬픔이 그들을 “인식론적 축복” 상태로 이끌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축복은 그들의 뇌에 전복을 일으킨다. 사하라시아인 자아폭발이 왼쪽 뇌 “나”의 반란이었으므로 수탈당하는 3.5% 변방인 공동체 네트워킹은 오른쪽 뇌 “나-나” 또는 “나들”-단순한 “우리”가 아니다(김선우 시인에게서 가져옴)-의 평정이다. 오른 쪽 뇌는 생각에 사로잡혀 수다를 떨지 않기 때문에 한 찰나에 나들의 일치된 행동을 이루어낸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최초이자 최후로 창조해야 할 “규모의 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운 새 환경이·······마음과 몸의·······분리를 촉진했다. 그리고 자성과 합리성의 더 큰 능력이 필요해졌으므로, 이것이 “분리되고 예리하며 공간적 영역을 지닌”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였다.


사하라시아인들은 더 많이 생각하고, 자성 능력을 발전시키·······게 되었다.·······자성이란 내 머릿속의 “나”가 자기 자신에게 수다를 떠는 것이다.


가뭄과 사막 열과 먼지로 인해 사람들이 이제 겪기 시작했을 순수한 육체적 고통과 불편함도·······정신과 육체 간의 분리를 재촉했을 것이다. 이는 정신이 육체에서 떠나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다른 무엇으로 보는 경향을 초래했을 것이다.(167-168쪽) (인용자가 본문 순서를 바꿈)


최근 공황발작panic attack을 겪고 나서 치료 받아야겠다 싶어 서둘러 찾아온 어떤 분이 말했다.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여태까지 안정되고 여유로운 정신으로 살아왔거든요.” 내가 말했다. “그 안정과 여유는 삶의 악조건에 적응하려고 구성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갑옷 입은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갑옷을 입으면 갑옷 바깥 세계에서 분리되어 독립과 안전을 보장받고 바깥 세계에 무감해진다. 갑옷 입은 정신은 무엇보다 먼저 육체에서 분리되고 육체에 무감해진다. 육체에 무감한 정신은 육체가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다. 감지해도 해석하지 못한다. 해석해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병이(나 악이) 노정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트라우마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정신적 병리 문제를 살펴 건강하게 감응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기억을 봉인하고 방어기제를 만들어 그 안에서 가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갑옷 입은 정신이 벌이는 일이다. 육체는 그 기억을 숨기지 못한다. 끊임없이 증거를 드러내고 신호를 발한다. 하다하다 안 되면 충격적인 방법을 쓴다. 공황발작도 그중 하나다.


공황발작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정신적 병리의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자율신경증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공황장애 진단이 나와도 화학합성약물로 증상 완화시키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명에 불안 스펙트럼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서 삶의 기조를 바꾸려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는 공황장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갑옷 입은 정신 전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갑옷 바깥으로 육체를 쫓아내면 전체 생명은 물론 정신 자체도 왜곡되고 위축된다. 정신은 육체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본질”에서 이탈한 정신은 그대로 포르노다. 정신 포르노로 고매한 명상을 한들 우주의 비밀을 밝힌들 아름다운 예술을 한들 그 파편성을 어찌 면하랴. 파편성의 요체는 망상이다. 망상에 떨어지지 않으려거든 육체에 예의를 다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보통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하는 것”과 그들과 “공감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손해를 끼질 가능성이 있어도 우리 욕망을 다른 사람-또는 피조물이나 환경-안녕보다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때때로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당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55-156쪽) 
   
세월호사건, 그 진실을 덮은 채 우리사회는 벌써 6년차 해를 맞아 한 달 가까이 흘려보냈다. 오늘 아침 새삼 250명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조관우의 추모 노래 <화애>를 가만가만 따라 부른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모든 기억이 슬프고 아프다. 

어느 날 우연히 한 음식점에서 유가족 몇몇의 식사 광경을 지켜보던 기억이 선연하다. 울면 운다고 웃으면 웃는다고 타박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상이 칼날 위에 서 있던 그분들이기에 나는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못했다. 없는 듯 있는 듯 앉아서 술 한 병 비우고 일어섰다. 아뜩한 질문 하나 솟아올랐다. 

“내가 대체 얼마만큼 저 분들의 심정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사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두 해 가량 나는 매일 울다시피 했다. 주말마다 광화문으로 향할 때는 인근에 다다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곤 했다. 내 육친을 여의었을 때보다 슬픔과 아픔을 더 실감했다. 그럼에도 나는 성호 엄마, 유민 아빠 슬픔과 아픔에 공감했다고 감히 말할 자신이 없다. 스티브 테일러를 읽고 난 시선으로 돌아본다. 

“내가 타락한 인류의 DNA를 물려받아서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인가?”

사냥감인 동물에게조차 “존경과 매혹” “공감과 숭배”(157쪽)의 감정을 가지는 타락 이전 인류의 마음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타락이 분명한데, 단식하는 유족 앞에서 치킨 뜯어먹고 자빠진 족속의 마음 또한 바이 상상할 길 없으니 이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여기서 공감이 본성이냐 능력이냐 하는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삶에서 우리가 직접 부딪치는 문제는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의 실재고, 그 행동을 인간만 저지른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비인간적 인간이 존재한다는 이 진실을 떠나서는 뭘 떠들어도 공허하다. 타락이든 모순이든 잔혹성과 비인간성을 게워대는 공감 부재의 생생한 현장에서 나와 너는 오늘 공감의 틈을 내고 내일 공감의 길을 열어야 한다. 

공감의 틈을 내고 길을 여는 역사는 공감의 틈을 막고 길을 닫은 바로 그 역사의 지평에서 행진한다. 2014년 4월 16일은 여전히 그날의 음성으로 나와 너의 행진을 부르고 있다. 아뜩한 질문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가뭇없는 공감의 땅을 찾아 나서라 당부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