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 팔은 팔꿈치마저 없고, 왼 팔은 팔꿈치 아래 부분이 살짝 남아 있어 손 구실을 한다. 눈도 오른 쪽이 없어 안대 비슷한 물건으로 가리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어떻게 식사를 하고 옷을 입으며 신발을 신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장애인 한 사람이 매일 같은 역에서 승차한다. 그는 매번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앉아 있다.

 

오늘은 어쩌다 그가 걸어 들어와 자리에 앉는 모습 전 과정을 보게 되었다. 그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앉아 있던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사람이 그가 앉자마자 아래위로 그를 훑어본다. 잠시 뒤 그 남자사람은 냉큼 자리를 뜬다. 대각선 맞은편으로 이동한다. 옮겨가서도 여전히 힐끔거리며 그를 본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그 장애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고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장애인은 평소 소매 속에 팔을 감추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남자사람의 행동 직후부터 그 장애인은 반복해서 왼쪽 팔을 드러내 모자를 추스르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보란 듯 그 팔을 들어 옆 철제 구조물 가로대에 걸치기까지 한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실체를 단박에 알 것만 같은 어떤 역동이 내 심신을 두드린다. 구별해내기 어려운 몇 가지 감정들이 어우러져 춤을 춘다. 육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서 자신을 격리하고도 힐끔거리는 저 남자사람의 정신적 장애가 꼭 타자의 것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통렬하다. 종일토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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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내 인생은 열린 책 + 청소부 매뉴얼 - 전2권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유머란 무엇인가이후 한 달 보름 동안 리뷰를 쓰지 않았다. 4천 쪽 분량의 책들을 천천히 읽기만 했다. 특히 지난 2주 동안은 루시아 벌린과 밀착해 있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내 생각은 복잡했다. 비대칭의 대칭 사유구조가 팽팽히 형성되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백지 상태 속에 놓이곤 했다. 와중에 나는 구체적인 변화의 단서를 낚아챘다. 그 변화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불현듯 루시아 벌린 이야기의 틈이 열렸다.

 

먼저 발견한 것은 내 인생은 열린 책인데 먼저 읽은 것은 청소부 매뉴얼이다. 온갖 찬사를 물리치고 맨얼굴로 루시아 벌린을 만났다.

 

외국 작가와 만날 때 언제나 그렇듯 루시아 벌린과도 한참을 버성겼다. 번역 문제도 분명히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외국어 자체의 문제다. 다른 언어가 자아내는 사회역사의 생경함은 독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이해와 감흥의 즉시성을 앗아가기 일쑤다. 대체 이런 글을 왜 쓰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쓰는 걸까, 하는 의문이 수시로 덮친다. 가장 가려운 것은 서구의 자랑인 유머가 도처에 깔려 있는데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번역자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각주를 다는 것도 좋지만 원문을 병기하는 것이 더 나은 친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훼방꾼을 제치고 루시아 벌린의 체취가 맡아지는 거리까지 왔을 때, 내게 가장 뚜렷하게 일어난 변화는 단편소설 쓰고 싶다였다. 열네 살 때 단편소설 하나를 쓴 뒤 처음 든 생각이었다. 며칠 뒤, 나는 출판을 거절당해 묶여 있는 내 의학 저술의 구조와 내용 전반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단편소설집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대단히 황당한 짓임에 틀림없지만, 내게는 이 변화를 말하는 것이 루시아 벌린을 달리 표현한 어떤 말보다 결곡 곡진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저 황당한 짓거리를 계속하는 내내 루시아 벌린의 삶, 그 모호함과 내 자신의 삶, 그 명료함을 대면시켜볼 작정이다. 이미 그 한계의 어떠함을 알고 있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아니다. 큰 함정이다. 큰 함정에 빠질 것이므로 계속 대면시킨다. 그것이 루시아 벌린에 대한 나만의 예의다.

  

루시아 벌린이 평생 남긴 단편은 모두 77개다. 내가 써 놓았다는 그 의학 책도 숙의치료 임상 기록을 77편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내 변화를 이 이야기에서 시작하기로 한 까닭이 바로 이 숫자의 우연적 비본질적 일치 때문이다. 이런 유치함을 마다않고 품은 것은 루시아 벌린의 삶을 관류하는 어떤 천치미학의 울림 탓이다.

 

천치미학이란 표현은 자기 삶을 이끄는 어떤 주술적 에너지와 파동을 따라 계산하거나 흥정하지 않은 채 무심히 번져가는 루시아 벌린의 영혼에 가닿았을 때 문득 떠오른 말이다. 내가 처음 품었던 의문, “대체 이런 글을 왜 쓰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쓰는 걸까는 루시아 벌린의 영혼에 다가갈수록 대체 이런 삶을 왜 사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사는 걸까로 깊이 가라앉았다. 아직도 그의 영혼에 온전히 감응할 수 없어 변죽만 울리면 루시아 벌린은 자기 안의 천재에 무심히 저항한 천치로서 살았다. 이 도저한 비대칭의 대칭이 77개의 단편소설을 낳은 것 아닐까.

 

루시아 벌린의 글을 두고두고 곰씹을 생각은 내게 없다. 내게는 루시아 벌린의 삶을 두고두고 곰삭힐 생각이 있다. 내 삶과 어떻게 포개지고 어떻게 쪼개지는 지 톺아가며 단편소설 쓰고 싶다란 변화 욕구를 삼가 발효시키기로 한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여태도 내가 알코올중독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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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 한의원이 세들어 있는 곳은 비가 줄줄 새는 오래된 건물이다. 오래된 시간 벽을 뚫고 창에 올해의 담쟁이 덩굴이 저마다 끌림으로 생명을 펼쳐간다. 그 풍경 앞에서 내 손은 무심히 옷깃을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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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0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31 0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팥 세 알이 거실 구석에 떨어져 있어서 봉숭아 떠난 화분에 심고 물을 주었다. 얼마 뒤 어김없이 팥 싹 세 줄기가 솟아나왔다. 서남향집이라 햇빛이 많이 부족해 예상대로 가느다란 대궁에 키만 쑥쑥 자랐다. 그 나름 이치를 따르는 생명이라 귀하게 여겨 기댈 것을 세우고 붙잡아주었다. 엄청나게 빨리 하늘 향해 오르던 팥은 마침내 넝쿨식물로 스스로를 바꾸었다. 이 작은 변화에 내 영혼은 크게 흔들렸다. 살수록 모를 일이 더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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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아침 관악 큰 산이 동작동 국립묘지 쪽을 향해 기운 내려 생긴 작은 까치산을 넘어 출근한다. 워낙 나지막한 산이라 골도 야트막하다.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다. 많은 비가 내려야 잠깐 개울을 이루었다 이내 땅 밑으로 스며들고 만다. 이 마른 개울 꼭대기에 마른 샘이 있다. 마를 때는 누군가가 그릇을 가져다 놓고 물을 부어주곤 한다. 처음에는 그 연유를 몰랐다. 나중에 보니 그 물그릇 속에 도롱뇽 알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 제법 큰 봄비가 내린 직후, 어느 틈에선지 샘물이 흘러나와 조그만 웅덩이가 형성되었다. 그 웅덩이에 도롱뇽 알이 품어져 있다. 도롱뇽이 그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다시 알을 낳은 것인지 참으로 경이롭다. 도롱뇽의 생태를 모르는 내게는 경이를 넘어 기이하기까지 하다. 작은 생명이 발하는 큰 빛에 소름이 돋는다. 거대도시 서울 한복판에 숨듯 자리한 이 지성소 앞에서 한 갑자 훌쩍 넘긴 내 인생을 아연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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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5-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이거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어릴때 참 많이 봤었는데! 추억에 젖네요!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