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보다 더 한의원이 괴괴하다. 큰일이다. 큰일이지만 당최 대책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광화문으로 간다. 복잡하기는 하지만 광화문역 무정차는 아니다. 역무원 안내를 따라 돌아 나온다. 지랄발광 집회에서는 윤상현이가 되지도 않는 소릴 지껄이며 턱도 없이 용을 써댄다. 악악대는 전광훈 종자들, 그래 봐야 한 줌이다. 동십자각 집회와는 규모, 활력, 내용, 모든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SNS를 통해 소식을 전하면서 율곡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안국동 네거리에서 우정국로로 방향을 튼다. 인사동9길 입구 음식점에서 530분 습관을 따라 저녁을 먹는다. 행진이 시작된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행진에 합류한다. 종각역을 거쳐 남대문로를 따라 명동으로 향한다. 명동 입구를 조금 지날 무렵인가. 누가 나를 톡톡 건드린다. 돌아보니 앳된 소녀가 해맑게 웃으면서 뭔가를 쏙 내민다. 단백질 바다!


 

, 이런! 아이가 또 이렇게 어른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내 깊은 부끄러움을 알고 짐짓 모르는 체하기라도 하듯 소녀는 내게서 눈길을 거둬들이며 정면을 향해 구호를 외친다. “윤석열 파면!” 나도 얼른 부끄러움을 수습하고 살짝 비틀어 외친다. “김명신 파멸!” 어느새 소녀는 눈길에서 저만치 멀어져간다; 내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희망이 저만치 전진해 간다. 나는 이 단백질 바를 결코 내 입속에 넣지 못할 듯하다.

 

우리 행진이 전 차도를 다 점거하진 않아서 통제된 상태에서 차량 통행은 가능하다. 어느 순간 눈길이 멈춘 곳은 광역버스 안. 행진하는 우리를 향해 스마트폰 문자로 고마움을 표하는 한 젊은 여성 모습이다. 내가 크게 손을 흔들어 주자 그도 알아차리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우리는 이렇게도 소통한다. 단백질 바 아이도 스마트폰 문자 젊은이도 나도 서로를 잊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잊지 못하리라. 아무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혼란 무인지경이다. 미치광이 한 놈을 대통령으로 뽑은 후과가 경천동지 지경이다. 경제 손실이 천조에 이른다는 사실보다 나는 정적에 깃든 한의원 보며 나라가 망해간다는 사실을 살갗으로 느낀다. 그러나 세계 모든 사태는 비대칭 대칭 사건이다. 이런 혼란 덕에 대한민국 지배층 치부가 남김없이 드러나서 그들을 어찌 처단해야 하는지 삼척동자도 알게 된 일은 가히 단군 이래 최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저들이 왜놈과 양키 제국에 적극 능동 부역한 특권층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되어 속이 다 시원하다. 이참에 제국과 식민지 현실 담론을 본격 전개했으면 좋겠다.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 똬리 튼 제국주의 이념과 식민주의 양식을 섬세하고도 광범위하게 파헤치기를 기원한다. 이른바 과학 방법론도 동원해야 하지만 나는 범주 인류학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내란 정권이 사이비 무속에 휘말린 저급 권력이라는 사실은 이미 놀랄 일조차 아니다. 일일이 거론할 가치도 없지만 김명신 배후에 최아영-한덕수 처- 무속이 있다는 뒷말은 참으로 어처구니도 없고 으스스하기도 하다. 이런 인류학적 풍경은 비단 이 정권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똥물 세례를 받은 모든 국가 지배층이 다 이런 미혹에 올라타 통치를 구가하고 있다. 제국과 식민국이 지닌 본성이다.

 

무속 그 자체로, 통째로 비난받을 대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무속은 왕이었다. 공동체 안녕을 위해 공포·불안과 탐욕과 무지를 해소 또는 해결하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며, 당대 과학이었다. 오늘날 서구 과학이 패권을 차지하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오로지 여기에 기대어 생존해 왔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서구 과학을 발명한 주체도 엄밀하게는 여기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사이비다. 사이비는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공동체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본성을 저버리고 사악한 지배자 개인 앞에 무릎 꿇는다는 뜻이다. 저들이 구사하는 주술이 설혹 하다 해도 악하기 때문에 신벌을 받는다. 저들을 벌하는 신은 누군가. 팡이실이, 공생 네트워킹을 일으키는 피지배자다. 피지배자 공생체는 물리 권력으로 저들을 벌하지 않는다; 선하고 재미있는 주술로써 즐겁게 엄벌한다.

 

윤석열 손바닥에 써넣은 자 사이비 주술을 소녀 손에 손에 든 응원봉 찐 주술이 질탕하고도 성스럽게 처단한다. 서구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마르크스 사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범주 인류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공포·불안과 탐욕과 무지가 있는 한 인간에게 무속과 주술은 없어지지 않는다. 과학과 이성으로 사이비 무속과 주술을 이기지 못한다. 팡이실이, 저 참 주술만이 사이비 주술을 이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양준호(경제학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A. 네그리의 담론을 따르는 정치철학자들을 보면, 사회운동/사회변혁의 주체로서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주침을 통해 공통성(예컨대 '윤석열을 처단하라'라는 공통적인 구호)을 만들어 가는, 매우 능동적이고 또 자율적인 주체라 할 수 있는 다중(multitude), 즉 '응원봉'을 든 시민들의 유연한 배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이들 자율주의적 정치철학자(네그리언)들이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에 주목하고 또 이를 강조하는 것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다중' 개념을 절대화(?)하는 지적 경향에 의해, 노동자와 농민을 축으로 하는 각성된 ‘계급’ 주체성과 그 앙가주망들이 사회운동/사회변혁의 주체를 논의하는 데 있어 너무 뒤로 밀려나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우려를 갖는다.

네그리 및 하트가 강조해온, 후기산업사회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다중'을 핵심 저항 주체로 인식하는 근거로 볼 수 있는, 이른바 '네트워크적 생산(특정 사업장/공장 차원이 아니라, 그 너머의 전 사회적 차원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고, 결국 자본은 이를 기생적으로만 추출, 채굴하는 새로운 축적방식)'은 매우 중요한 경향이며, 나아가 그래서 이 경향들은 법칙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자본주의의 '실상'을 보면 개별 사업장이나 또는 공장 차원에서, 또 그 차원에서의 자본이 벌여대는 노동에 대한 통제와 착취의 수준, 바꿔 말해 네그리가 말한 '네트워크적 생산'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자본축적의 수준은 여전하므로, 사회운동/사회변혁 주체로서의 각성된 노동자들, 즉 '계급'이란 것은 여전히 중요하며 또 해방운동 중심에 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른바 '남태령'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응원봉'을 든 다중과 '트랙터'를 몰고 온 계급은 맞물려가야 된다. 이는, 양자 간의 유기적인 결합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저항운동의 한 가운데에 누가 서 있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양자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태령'에서처럼 주체성으로서의 '계급'이 '다중'의 특이성을 끌어안고, 그들과 수평적으로 마주치며, 또 그들과 함께 해방적 기획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계급'이 보여왔던 우리 사회 내 중심성과 그 특유의 결정성(determinacy)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