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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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 불교와 내가 정신이나 마음이란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실히 말해두겠다. 우리는 물질과 마음을 대비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로 의미 짓는 바는 단지 마음이 취할 수 있는 특정한 형태로 마음 범주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322)

 

맨스필드는 왜 구태여 이렇게 에돌아 왔을까?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기 때문이었을까? “물질로 의미 짓는 바는 단지 마음이 취할 수 있는 특정한 형태로 마음 범주 안에 포함되기 때문물질과 마음을 대비시키지 않는다.는 말은 그대로 헤겔이 스스로 정의한 절대적 관념론아니던가. 물론 헤겔 또한 인도유럽어족이어서 사하라시안 전통을 충실히 따르므로 아리안-힌두 전승과 결론이 같을 수밖에 없다.

 

붓다와 상카라를 함께 묶어 끌어들이고, 아리안-힌두와 습합된 중관 불교사상에 의지하더니, 이제는 유심 불교를 동원한다. 중도 불교와 유심 불교 모두 번역자의 작은 안일에서 비롯한 번역 문제거니와, 유심 불교는 유식학파 또는 유식론을 가리킨다. 유식은 아뢰야식 이외에 어떤 실재도 아뢰야식이 만들어낸 바라는 주장이다. 물론 끝내는 그 식까지도 부정한다. 이 점에서 서구 유심론과 다른바, 마치 귀류 논증에서 보여주는 차이와 같다.

 

여기서도 맨스필드가 유식을 거론할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헤겔로 가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학문하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 어디로 향할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가 꾸민 음모^^는 이미 전모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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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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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관점에서 우리는 요가 수행을 통해 정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불가지론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융은 그런 초월을 단지 원형적 주제로만 생각했고, 엑스타시를 위한 욕망이라고 했다. 따라서 융에 따르면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붓다와 아디 상카라 등 위대한 철학자-현자들이 신과 연합함으로써 인간 한계를 초월하고 대극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일은 단지 원형적 충동 표현일 뿐이다.(298~299)

 

(융이 만나기를 단념했던-인용자 붙임-) 라마나 마하르시는 인도 베단타 대표였다. 그 전통은 정신이 지고한 경지에 든 자기보다 훨씬 낮은 수준 실재라고 이해한다. 베단타에서 절대자와 같은 본성을 지닌 초월적 자기와 합일하는 일은 영적 탐구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도달하는 결론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정신적 삶과 그 대극들에 감금된 상태로 정의한다면, 이런 합일은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이 사실이다. 참된 본성에 대한 자아 방해를 해체할 때, 완전한 자비 개화, 지고한 인간 사랑이 이루어진다. 융은 어떻게 그런 비범한 성취를 재미없다고 불평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을까?

 

심층심리학과 인도 사상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라면 융의 이 같은 태도에 깊이 실망할 수밖에 없다. 두 전통 학생들은 융의 오만함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다.(301~302)

 

 

바야흐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다. 맨스필드가 융이 오만해서 후학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고 질타하는 장면은 독자 관지를 분명히 하라 도발한다. 과연 누가 오만한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쓴 R. 뿔리간들라 인도철학주해리뷰(2010. 11.23.) 일부를 세부만 수정해 가져온다.

 

이 책은.......베다에 대한 자세를 중심으로 인도 사상 전체를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눕니다. 비정통파를 앞에 배치하고 정통파를 뒤에 배치하여 서술합니다. 그런데 비정통파에서는 불교를, 정통파에서는 베단타를 중심축으로 세웁니다. 두 부분에 대한 내용만으로 책 전체의 절반을 채웁니다. 그리고 뒤에 인도의 시간관과 역사관이란 장을 마련하여 불교사상과 베단타의 일치를 말합니다.......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를 정복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아리안의 사유 체계인 베다. 그 베다적 사유의 적 기조. 즉 불멸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실제로 인도 사회의 영적 지휘집단인 브라만의 상징이며 그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적 기조를 유지합니다. 無常, 그리고 無我, 그 결절점에 . 이 세 가지가 붓다의 진실입니다. 無常無我도 브라만의 진실은 아닙니다, 는 더더욱 아닙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그러므로 매우 사회정치적입니다. 매우 실천적입니다. 브라만의 카스트를 거부합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는 고대 공화주의의 패러곤입니다. 수드라와 언터처블의 고통을 현안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無常은 현실 삶의 불안입니다. 그들의 無我는 현실 생명의 위태입니다. 붓다에게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을 외면한 그 어떤 교설도 邪道이며, 그 어떤 질문도 無記의 대상일 뿐입니다.


붓다는 스승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땅에서의 삶을 말하지 구름 위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실천을 말하지,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살아 있는 말을 서둘러 죽은 언어로 봉인하여 경전을 만듭니다. 경전은 소수 엘리트, 특히 크샤트리아의 독점 재산이 됩니다. 아뿔싸, 어느덧 불경이 베다가 되고 크샤트리아가 브라만이 됩니다! 하여 경전은 구름 위로 올라갑니다. 수드라, 언터처블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흐름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리고, 소승과 대승이 갈립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가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의미 부여를 해야 합니다. 붓다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지켰는지 여부는 초기불교 정체성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운동을 수행할 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과 그 실천 구조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찌하면 바르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하는 내적 질문에 함몰되면 사회동원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회동원력 문제는 이미 불교가 대승, 소승으로 갈릴 때 물은 바 있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대승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상대방을 소승이라 한 게 100% 악의가 아닌 한, 소승으로 지목된 집단은 역사적으로든, 현안 의식으로든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회동원력을 지니는 철학적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맨스필드가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실패했음을 먼저 지적한다. 무엇보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붓다와 아디 상카라 등 위대한 철학자-현자들이라고 함으로써 네 사람, 그 중 특히 붓다와 상카라를 한꺼번에 싸잡아 말한 실패가 뼈아프다. 상카라는 베단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베단타가 불교 영향을 받았으므로 시간관과 역사관정도에서 일치를 보일 수는 있으나 근원에서 둘은 일치하지 않는다. 정통 비정통이 문제가 아니라, “불멸의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느냐가 문제다. 붓다는 인정하지 않고 상카라, 그러므로 라마나 마하르시는 인정한다.

 

맨스필드는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한계를 초월하고 대극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비범한 성취를 인정함으로써 베단타 편에 선다. 그러면서 어떻게 붓다를 거론하는 실패에 눈감을 수 있었나? 또 다른 실패가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가 거론한 이른바 중도불교는 귀류 논증을 토대 삼은 티베트 중관 불교를 의미한다. 다른 나라 불교도 마찬가지거니와 티베트 불교는 워낙 복잡해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밀교 수행을 밑바탕에 깔고 있음은 분명하다. 밀교 수행을 통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엄밀하게 말하면 철저하게 을 관철하는 중관 사상과 배치된다. 사실 다른 대승불교 현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으며, 이점을 날카롭게 인식하지 않는 한, 을 낳은 붓다 적 전통은 끊어진다. 적 전통이 끊어진 곳에 무슨 불교가 있나. 맨스필드 근본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실패가 있다. “신과 연합함으로써” “정신을 뛰어넘을” “지고한 경지에 든 자기에 이른다고 할 때, 신은 무엇인가? 정신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육체(물질)를 가로지른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반대라면 어떻게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가, 그 인간은 무엇인가?

 

마지막 논점 하나를 남기고 중간 결론을 내리면 맨스필드는 인도 사상에 대한 기본적 무지와 티베트 불교와 맺은 인연 때문에 중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극 합일을 아리안-힌두 전통 베단타가 주장하는 완전한 불이론nondualism’에 내주었다. 아니 자신이 속한 전통을 확인한 여정일 수도 있다. 양자물리학이 DNA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제는 정녕 그가 생물학을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오만이 오류를 부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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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 찍는 사진작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계 명산을 거의 모두 돌아다녔는데 결국은 도봉산이다. 산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운 산의 거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전체 균형은 물론 다양한 세부 갈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여러 번 도봉산 주위를 어정거렸지만, 북한산과 경계를 이루는 우이령길 걸은 일 말고는 겨우 발치에 잠깐씩 머물렀을 뿐이다. 도봉산 서울 권역만이라도 걷는다 싶게 걷자, 특히 그 길 끄트머리께에 있는 연산군 묘를 꼭 한 번 다시 가보자, 싶어 치과 치료 끝나고 지하철을 이용해 도봉산 쪽으로 이동했다.

 

도봉역에서 내려 천변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간 뒤 처음 20여 분은 익히 아는 길이라 빠르게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사하거나 베어 넘어진 등걸에 터 잡고 살아가는 버섯이 미세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때와 이때가 다르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내 의식이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미암아 깨어났다고 할까. 도봉산 오길 잘했다 연발하며 수시로 길을 벗어나 숲을 들락거렸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흰 수염 꽁지머리 노인이 하는 짓을 힐끗 한번 볼 뿐 바삐 지나갈 따름이다. 가끔 하늘도 올려다보지만, 눈은 덜 되바라진 낯빛으로 나를 기다리는 돌꽃이며 버섯을 보기 위해 후미진 구석구석을 물걸레질하듯 닦고 다닌다. 기우는 해, 원근이 다른 도시 소음, 수없이 오르내리는 길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는 느낌 따위로 어디쯤 왔는지 짐작하며 걷고 또 걷는다. 어느 순간 문득 연산군 묘를 알리는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거의 다 왔구나.......

 

나는 50여 년 전에 연산군 묘에 온 적이 있다. 미술 숙제인 탁본을 하기 위해서였다. 누구와 같이 왔었는데 그가 누군지, 어떻게 와서 어떻게 돌아갔는지, 무엇보다 거기 연산군 묘가 있는 줄 어찌 알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마치 버려진 폐허처럼 쓸쓸했던 묘역 풍경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는 필경 어두운 감정이 묶인 기억이어서 보존되었으리라.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쓸쓸했던 묘역 풍경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했다.

 

지금은 이 기억이 버려진 존재에 대한 내 감응 감수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여느 사람과 다른 연산군에 대한 감정이 그 중심에 있거니와 그래도 50년 넘은 기억을 되살려 역사 인물의 묘를 다시 찾기까지 하는 심사를 더 깊이는 모르겠다. 다행히 묘는 몰라보게 잘 정돈·관리되고 있었다. 뭔가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지는 심사도 더 깊이는 모르겠다.

 

스마트폰 가득 채운 돌꽃, 버섯 사진 끄트머리에 놓인 묘역 사진 석 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문득 박두진 시 <도봉>이 떠오른다.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정신이 적요해질 무렵 이 ㅅㅅㅅㅅㅅㅅ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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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5-30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ari_che님 글과 사진은 항상 못보고 지나치던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네요. 오늘도 90도록 꺽인 나무와 연산군의 묘를 보며 꺾인 삶 역시 또 그대로 삶이기도 하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

bari_che 2022-05-31 08:33   좋아요 1 | URL
저는 그저 제 본성에 맞춰 소미한 관지대로 살아가고 표현합니다. 알아차리시는 바람돌이님 시선에 감사할 따름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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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를 인식하고 철회하면 개성화를 가리키는 중요한 이정표로 작용한다.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바가 인간 감정으로 가득 찬 바깥 세계 이미지에 힘입어 인간 정신에 되비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사실을 분명히 직시할 때만 투사로 말미암은 강요와 왜곡은 깨진다.(289)

 

본디 투사는 자신이 지닌 욕망을 타자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은폐하는 방어기제다. 이 이치를 그대로 적용하면 바깥 세계, 그러니까 물질에 실체를 투사한 궁극 목적은 인간 정신을 실체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도달지점은 약간 다르지만 융도 맨스필드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거기를 향해 달려왔다. 자각하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인생 맥락상 역사적 사유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유럽인에게 실체 우주를 가리키기 전까지 실체는 신이었다. 더는 신을 실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섬밀한 저항이 고전물리학이고 그 기치가 물질 실체였다. 물질 실체가 주도하는 과학혁명 덕에 외부 세계가 화려하게 변하는 데 눈길이 쏠려 인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대중은 이 변화를 기적으로 받아들이며 열광했고, 통속 과학자와 기술 정치세력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바 괴물 지구촌을 구축하는 데 매진했다. 그 사이 극소수 천재들은 과학이 물질 실체를 전파하는 사도가 아니라, 물질 실체를 부정하는 관측정의 주체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중세 대중에게 라틴어같이 암호나 다름없는 수학적 과학용어로 그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중세 이전 신 실체 옥좌를 무혈혁명으로 차지했다. 생각해보라, 처음부터 신 대신 인간을 실체화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를. 이 얼마나 영악 무인지경 투사인가.

 

인간이 정작 철회해야 할 투사는 물질 실체 투사가 아니다; 영악하게 숨긴 자기 실체 투사다. 맨스필드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 이렇게 썼을까? 그가 보기에 정신주의에 갇힌 사람은 융이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은 융이 주저앉은 지점을 넘어서 대극 합일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식으로 대극 합일에 도달할까. 그게 인도유럽어 아리안-힌두 전통에서 가능한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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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실체를 어떤 식으로든 다른 원칙으로 대체하지 않고 부정한다. 현상에 대한 지고한 진리는 상호의존, 상호연관뿐이다. 이 외에 더 말해질 수 없고, 말해져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윤회에 더욱 확고하게 고정하는, 본래 존재하는 또 다른 우상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274)

 

 

중도불교 귀류 논증은 서구와 다르다. 상대 주장이 오류임을 부정으로 증명한 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안은 어떤 식으로든 부정될 테고, 그러면 부정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 결국은 긍정으로 되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매우 현명해 보이지만 반 똑똑이고, 그래서 오류다. 그들도 맨스필드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따끔하게 톺아주자.

 

우선 논리 문제.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가? 무슨. 아리안 전승 깨달음은 여기까지다.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 일은 형식논리 안에서만 일어난다. 형식논리를 넘어선 세계에서 부정을 부정하면 불확정-원효 어법으로 하면 무애-이 된다. 불확정은 물질 실체론을 부정하기만 했을 때 불가피하게 떨어지는 정신 실체론도 부정함으로써 물질과 정신 이원론, 실체 비실체 이원론을 관통한다. 실체 비실체 이원론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물질 실체 부정은 정신 실체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님에도 논리력 부족으로 그렇게 되었으므로 아리안 전승이 자초한 결과다. 부정을 부정하는 일은 딱 한 번 거듭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무한히 다음 부정을 열어 놓음으로써 이원론과 그 쌍생아인 일원론을 타파하고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여여 세계에 참여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이치를 모르므로 저들은 끝내 실패한다.

 

다음 실천 문제. 중도불교 승려라면 예외 없이 참선·명상 같은 집중 수련을 통해야만 대극 합일에 도달한다. 이 실천은 물론 정신 수련이다. 정신 수련으로 도달하는 대극 합일이 참 대극 합일일 수 있는가? 저들이 도달한 대극 합일이 뇌 현상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 깨달음이 하는 실천, 즉 자비행은 무엇인가? 생불이라 일컫는 중도불교 높은 승려가 행하는 자비행은 실제로 도탄에 빠진 인간, 인간 탐욕에 희생당하는 동물, 동물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아 무차별로 살육되는 낭·, 그리고 돌꽃, 팡이, , 버금바리, 으뜸바리를 어떻게 살리고 있는가? 대극 합일에 도달한 저들의 정신이 정신주의가 아니라는 증거를 나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맨스필드가 아는 중도불교 생불들은 모르니 우리나라 생불들을 떠올려본 결과, 그렇다. 참선해서 공 진리에 이르고 그 다음 자비행으로 가는 길은 사도다. 원효 길은 그 반대다.

 

원효는 흔히 일심화쟁무애 사상을 펼쳤다고 하지만 실행은 거꾸로다. 통속한 중도를 깨뜨린 원효 반야는 거듭 부정이 지닌 묘리를 현실 삶에서 깨친 덕에 체득되었다. 물질로 발현하지 않는 정신은 정신이 아니다. 정신 아닌 정신으로 공, 대극 합일을 말하는 일은 후원 근처에도 가지 않고 창덕궁 진경 봤다고 말하는 일보다 더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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