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문동 616번지. 이제는 영구히 없어진 지번이다. 내가 1010년을 산 곳인데 봉천동, 삼양동과 함께 서울에서 손꼽히던 산동네였다. 대학 졸업 직후 잠시 다시 들어가 재개발에 밀려 부서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폐허로 변할 때까지 버티다 하릴없이 떠나온 애증 어린 빈민가다. 오늘은 어찌어찌 흘러 여기를 걷는다.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전혀 없고 돈암초등학교와 북악산로를 기준 삼아 기억을 떠올리면 살던 곳이 대강 그려질 뿐이다. 거기서도 여섯 번이나 이사를 하였으나 고만고만한 데를 뱅뱅 돌았을 뿐이어서 그 동선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기억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뚫지 못하고 나비물처럼 민틋이 흩어진다.

 

언틀먼틀한 산골짝 골목길 비탈과 계단 풍경이 맘에 새겨져 있지만 몸은 아스팔트 길 위에 있으니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홀연 무참해진다. 갑자기 눈물방울이 열 지어 뛰어내린다. 얼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진짜 숲으로 간다. 이 숲은 고향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수시로 들고 났던 나지막한 산기슭이다.


산동네 올라가는 입구로, 막걸리집과 문구점 있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


어린 날 소도였던 너럭바위


공동수도가 있고 장이 서던 너른마당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백악, 삼각산 마루가 우뚝 보이는 등성이가 나타난다. 백악산 줄기 가운데 하나로 서울 시내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너럭바위 위에서 백일몽도 꾸고 설움도 달래고는 했다. 강원도 깊은 산과 달라 머루 다래 한 알 따 먹을 수조차 없었지만 쏠쏠한 위로였다.

 

어렸을 때 무서워 더는 들어가지 못한 건너편 숲으로 들어간다. 성북동 쪽으로 산책로를 다듬어 놓아 세월까지 쉬이 밟힌다. 끄트머리께를 돌아 나오던 어느 순간 입에서 느닷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언제나 다시 올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임을 알아차리자 아까 뛰어내렸던 그 눈물 후발대가 쏟아져 내려온다.

 

, 내가 늙는구나. 한 모라기 회한이 소슬하게 불어온다. 눈물을 훔치며 정색하고 숲을 응시한다; 늙어가는 소리를 강구어 들으며, 지난 5년 소롯이 바쳐 숲과 물, 그리고 제국을 공부한 나날에 이드거니 마음 둔다. 그러고 보니 그 공부가, 실은 여기서 출발했구나. 숱한 산모퉁이와 물굽이 돌아왔지만, 예가 바로 60년 소도구나.

 

언제나 다시 올지···.” 하지 않는다. “언제고 다시 오지.” 한다. 이름 하나 지니지 못한 나지막한 등성이 비탈이어서 이 숲은 내 장엄 지성소다. 내 인생을 똑 닮은 가장자리 골막한 숲으로 나는 언제고 다시 올 테다. 반제 전사 60년 동지와 건성드뭇한 머리숱 서로 쓰다듬으며 여생을 암차게 살아가련다. 지는 노을이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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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산문 문학 작품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 특별한 의도는 없다. 어쩌면 운문에 더 매혹되기 때문이란 말이 그런대로 적합하다. 시집은 수백 권 샀어도 소설책은 몇 권밖에 사지 않았다. 심지어 노벨상에 빛나는 한강 책도 사지 않았다. 하물며 수필집이랴. 그런 내가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라는 수필집을 사서 한 호흡에 읽었다. 이 무슨 일인가?

 

지난 10년간 내 공부는 작고 적은 또는 작고 적다고 여기는 존재와 사건에 잠겨 흘러왔다. “사소해서 위대하다.”에서 출발해, “소미심심(少微沁心)”, “소소심심(小少沁心)”, “섬밀(纖密)”, “곱촘하게”, “미미섬섬(微微纖纖)”, “미섬장엄(微纖莊嚴)”처럼 대부분 내가 새로이 만든 용어를 고갱이 삼아 깊어지고 번져갔다; 작고 적다 못해 없다고 몰아버린 것들에게까지 다다랐다.

 

이 공부 길과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를 쓴 백윤경 작가가 한 말은 본성상 겹친다. “나는 거대한 우주의 근원인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주목했다.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먼지들조차 아주 잠시, 빛나는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의 시간을 통과한 모든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며리가 바로 거기 있었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백윤경은 일상에서 맺고 빚는 인연과 사건을 곱고 촘촘하게 톺아서 맑고 따스한 서사를 구성한다. 모퉁이 돌아갈 때마다 빛나는 문장 미학이 있어 잠시 숨을 고르고 소리 내어 읽어보고 간다. 내가 학문 차원에서 접근하고 숲이나 물 경험으로 나아간 풍경과 퍽 다르다. 내 글은 비문학이고 백윤경 글은 문학이다. 이 비대칭 대칭에서 낯섦은 눈부시다.

 

다 읽고 나면 거기 담겨 있지 않은 이야기가 꽹하니 떠오른다. 그 부재와 상실, 그리고 결핍이 그를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주목으로 이끌었다. 그 글에 담긴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벗들만이라면 이야기는 따스함과 그리움, 그리고 아픔을 넘어서지 못했으리라. 거기에 없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이 건네는 말 없는 말을 들었기에 그는 이문일심경(二門一心境)에 들었다.

 

나는 그에게 없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에 속한다. 김선우 운문 읽을 때는 내 영혼과 포개 겹쳐 앉아 썼구나!’하고 느끼는데, 백윤경 산문 읽을 때는 내 영혼과 쪼개 겹쳐 앉아 썼구나!’하고 느낀다. 같아서 다른 도반과 달라서 같은 도반은 현실 문성에서 같지 않으나 내게는 같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에 푹 잠기려 나는 다시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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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글을 그대로 싣는다


아동 성매매 협의로 실형을 받아 감옥에 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제프리 엡스타인과 관련된 엄청난 양의 문건이 공개되면서 세계 특히 서방 국가의 사회 지도층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스웨덴,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등에서 엡스타인과 연루된 인사들의 행각이 드러나면서 서방 엘리트의 도덕적 타락의 정도가 밝혀지고 있다. 엡스타인이 어떻게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세계 유수 국가의 지도층과 끈끈한 교분을 쌓을 수 있었는지 앞으로 규명해야 할 의문점이 한두 가지는 아녀 보인다. 그 가운데 꾸준히 나오는 의혹 하나가 그와 이스라엘의 연관성이다. 그는 모사드 요원이라는 말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 엡스타인의 마당발을 피하지 못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세계의 양심”이요 세계 비판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알려진 놈 촘스키다. 촘스키와 엡스타인의 교분이 알려진 것은 물론 상당히 오래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엡스타인 문건이 또 대량으로 공개되자 촘스키-엡스타인의 친분도 재조명되고 있다. 아래는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피오렐라 이사벨이 촘스키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다. 이사벨은 바네사 빌리와 함께 내가 아는 국제 분석가들 가운데 서방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적인 축에 속한다. 촘스키로 향한 그녀의 독설이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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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촘스키는 기껏해야 시온주의자이자 리버럴 앞잡이(Liberal Creep)에 불과하다.
아니, 사실 그는 오만하게 지성화된 리버럴 좌파(liberal left)가 낳은 역겨운 산물이다. 그가 혁명가이기는커녕 그의 일관된 본모습이 기회주의적이고 통제된 반대파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진즉에 폭로되어야 했다. 그의 역할은 혁명적 저항 운동이나 투쟁을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즉, 진정한 반제국주의 저항의 물길을 자유주의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돌려놓는 역할 말이다.
그는 매 순간 소련에서 쿠바 혁명에 이르기까지 실제 혁명 운동들을 공격했다. 시온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극도로 우유부단했으며, 최악의 시온주의자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이 전략은 먹혀들었다. 특히 시리아나 이란처럼 (우연이 아니게도) 시온주의의 표적이 된 곳에서 벌어지는 ‘정권 교체’ 서사에 쉽게 낚이는, 서구 이데올로기에 물든 채 사회주의 흉내 내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말이다.
정치를 넘어, 그의 이력은 악명 높은 모사드 요원이자 소아성애자, 성 매매범인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돈독한 우정으로 더욱 더럽혀졌다. 그는 2019년까지도 이 관계를 옹호해 왔다. 이 모든 역사를 종합해 볼 때, 그는 단순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실체가 폭로되었고, 오염되었으며, 실추된 인물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레드라인’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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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쌈보다.” 이렇게 말하면 이구동성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쌈보 아닌가요?” 심하게 쌈 좋아하는 정도 사람을 쌈보라고 하지 않는다. 쌈보는 쌈을 짓는 사람이다. 아무리 심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돌미나리, 쑥갓, 무청, 부추, 대파, 쪽파, 양파로 쌈을 싸지는 않는다. 나는 심지어 양파 막-양파에 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으로도 쌈을 싼다.


내가 쌈보가 된 데는 긴 내력이 있다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형성된 습관과 기억이다. 1950년대 중반 강원도 평창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내 식습관 또는 취향은 그냥 초식동물에 가깝다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놀다가 끼니때가 되면 씀바귀야생 돌미나리 꺾고텃밭에 있는 상춧잎을 따서 집으로 들어온다뭐 씻을 필요조차 없으니 그대로 쌈 싸고 고추장막장 올리면 된다.


대파 쌈


양파 쌈


양파막 쌈-막 모습 살리기 위해 밥을 넣지 않음-


뇌리에 아주 깊이 박힌 다른 기억 하나가 있다. 열 살까지 나는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종조부와 함께 살았다. 1965년인가 우리나라 전역에 엄청난 홍수가 밀어닥친 적이 있었는데, 집을 둘러싼 오대천 지류 두 줄기 물 수위가 높아지자 걱정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살피러 나가셨다. 돌아오시는 할아버지 품에는 거의 작은 항아리만 한 배추 한 포기가 안겨 있었다. 눈으로 웬 거냐 여쭙자,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오냐, 오늘 점심 반찬은 배추 쌈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 커다란 배추 한 포기를 점심 한 끼 쌈 싸서 남김없이 뱃구레 속으로 모셨다. 꽹한 추억이다.

 

내 쌈보 내력에는 정신 또는 심리 측면이 존재한다. <목도리 찾기>에서 말한바, “어린 시절 거의 방치된 상태로 양육되면서 겪은 마음 스산함과 실제 추위에 대한 두려움에반응해 목도리로 목을 둘러싸는행동과 남들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 온갖 푸성귀로 밥을 둘러싸는행동은 본성이 같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목도리로 둘러싸면 실제로 따스하지만, 쌈 싸서 먹으면 더 맛있다는 헨둥한 근거는 없다는 사실. 그러니 그럼에도 진심 다 해 쌈 싸는 걸 보면 둘러싸는 또는 둘러싸이는 자체가 어떤 상징 에너지로 작용하는 듯하다. 오냐, 오늘 저녁엔 뭐로 쌈 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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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31 0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나 또한 쌈엔 늘 정성입니다. 사실 그 시절엔 먹거리가 별로 없어서 쌈은 여름이 제철이었어요.
 



* 희일이송(영화감독)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결국 억만장자 랠리 엘리슨이 틱톡을 인수했다. 그 직후, 미국 틱톡의 경우 '엡스타인' 단어를 치면 전송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반격한다. 틱톡 앱을 삭제하는 것이다.
틱톡 앱 삭제율이 150% 이상으로 치솟고 있단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업스크롤드(UpScrolled)라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팔레스타인계 호주인인 이삼 히자지가 만든 앱이다. 그는 이 앱에 '억만장자도 없고 검열도 없다'고 공언했는데, 지난 2년 동안 가자지구에서 친인척 60여 명을 잃었다고 밝혔다.
왜 사람들은 래리 엘리슨이 인수한 틱톡을 버리고 업스크롤드로 간 걸까? 시오니즘 때문이다. 오라클의 공동 창업자인 랠리 엘리슨은 유대인이자 유명한 시오니스트다. 그리고 네타냐후의 절친이다. 또 이스라엘 방위군 IDF에 1,660만 달러를 기부했는데, 이는 역대 최고 기부액이다.
말하자면 시오니스트 억만장자가 인수한 틱톡을 버리고 팔레스타인계가 만든 앱으로 떠난 것이다. 그 정도로 미국 젊은층이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래리 엘리슨은 트럼프의 절친이다. 틱톡 인수 과정에서 트럼프의 손길이 작용했고, 지금도 CNN을 인수해 트럼프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뉴스 알고리즘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뜯어 고치려고 시도한다. 가뜩이나 반트럼프 정서가 일고 있는데 래리 엘리슨의 틱톡 인수에 대해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래리 앨리슨은 데이터 과두주의자다. 실로콘벨리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고, CIA에 데이터 기술을 제공하면서 돈을 벌었다. 디지털 신분증, 데이터 중앙집중화, 감시 확대 등을 꾸준히 주창해 온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자신의 아들을 매개로 미디어 제국주의를 건설하는 중이다. CBS, 파라마운트를 비롯한 여러 영화 스튜디오, 니켈로디언, MTV, 코미디 센트럴, 쇼타임 같은 유료 TV 채널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파라마운트를 통해 워너 브라더스 인수 과정에 끊임없이 군침을 삼키고 촉수를 드리웠다. 워너 스튜디오, HBO Max, CNN 같은 황금 매물이 얼마나 탐이 났겠는가.
오늘날 빅테크 봉건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추출함으로써 무한하게 부를 축적하고 또 알고리즘을 통제함으로써 부의 축적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목소리를 제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AI에 대한 통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또 데이터 기술의 무분별한 확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경고음이 계속 전송되고 있다.
가령, 현재 한국의 공기업-사기업 할 것 없이 물고 빠는 팔란티어를 보자. 팔란티어가 처음에 덩치를 키운 건 국경 통제 시스템이었다. 이민자를 차단하고 검열하고 통제하는 기술들을 제공함으로써 돈을 벌어 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가자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기술적 장치들을 제공했고, 지금 현재 미국 내에서 이민자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ICE의 장치들도 팔란티어가 제공했다. 요컨대 팔란티어는 전쟁, 추방, 그리고 시민 감시-통제 시스템이다. 이러니 미국 시민들 사이에 팔란티어를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런 데도 못 먹어도 고를 외치며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그 어떤 민주적 통제에 대한 고민도 없이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와 팔란티어 같은 감시 기술을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다. 시민들도 부자와 자본가 찬양에 정신줄을 놓고 있다.
삶이 먼저이지 기술이 먼저가 아니다. 삶이 먼저이지 돈이 먼저가 아니다. 게다가 실제로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소수가 독점하는 세계에서는 소수만 돈을 벌 뿐이다.
지난 번 책에 래리 엘리슨이 소유한 하와이 섬에 대해 잠깐 소개한 바 있다. 래리 엘리슨이 2012년경에 3억 달러를 주고 하와이 라나이 섬을 통째로 사들였다.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임대료 상승 때문에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래리 엘리슨은 그 섬을 부자들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기후위기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완벽한 자급자족 생태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부자들의 파라다이스에 가려면 최소한 헬기가 있어야 한다. 누가 놀러가냐면 일론 머스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다. 억만장자들과 스타들이다. 이게 불공평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역겨운 풍경이고 부의 독점이다.
아무튼 래리 엘리슨이 인수한 만큼 미국 틱톡이 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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