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메디닷컴에 백우진(『나는 달린다, 맨발로』저자) 님이 쓴 글을 그대로 올린다


걸음걸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 사람의 보법은 그의 지문이나 홍채처럼 고유한 특징을 보인다. 보법을 다양하게 하는 여러 변수 중 하나만 꼽으면, 발을 디디는 각도가 있다. 그에 따라 팔자걸음과 안짱걸음, 두 발이 평행을 이루는 걸음이 구분된다. 팔자걸음과 안짱걸음도 사람마다 각도가 차이가 난다.
이에 착안해 사람의 걸음걸이로 그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인공지능(AI)이 개발되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AI가 아닌 일반인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상당 시간 그의 보법을 유심히 관찰해 둔다면, 멀리서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가 오는지 맞힐 수 있다.
만인만색인 보법이지만, 현대인이 공유하는 걸음걸이의 특성이 있다. 뒤꿈치부터 착지하는 것이다. 이 걸음걸이는 대다수에게 기본이 됐다. 정형외과 전문의조차 유튜브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걸으라고 조언할 정도다.
“발은 뒤꿈치부터 착지하고 발끝으로 지면을 차내는 것 같이 걷는다. 즉 발 뒤꿈치부터 착지→ 발바닥 전체를 지탱→ 발끝으로 차내는 것처럼 걷되 발바닥에 걸리는 힘의 중심을 이용해 나간다.”
뒤꿈치 착지는 자연스러운 걸음과 반대 방식이다. 인류는 수백만 년간 발 앞부분부터 디뎠다. 발 앞 착지를 연구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사무실에서 신발이나 슬리퍼를 벗고 몇 발 떼어보라. “나는 맨발(실은 양말을 신은 상태)로도 뒤꿈치부터 닿는데?” 이렇게 답할 분은 아마 없으리라.
샌들과 모카신 같은 가죽신을 신고 걷고 뛴 이후 수십만 년 동안에도 걸음걸이는 맨발 보법과 다르지 않았다. 다리를 뻗어 발 앞부터 착지한 뒤 발을 굴러 앞으로 이동했다. 모카신은 가죽 한 장으로 갑피와 신창이 만들어져 뒤축이 없다.
발걸음을 뒤꿈치 착지로 왜곡한 요인은 신발 뒤축이다. 신발을 신은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 뒤축부터 땅에 닿기 쉽다. 발앞부터 착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뒤꿈치 착지가 습관이 된다. 그렇게 우리 대부분은 뒤꿈치 착지자가 됐고, 전문가들도 뒤꿈치 착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제 신발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자. 적어도 가볍게 산책하거나 작심하고 운동할 때는 뒷굽이 낮거나 없는 신발을 택하자. 워킹화나 러닝화 중에서도 그런 종류가 있다. 이름하여 제로드롭(zero drop) 신발이다. 일반적으로 신발 뒷굽이 앞보다 두꺼워 차이가 있는데, 제로드롭 신발은 그 차이가 없다. 밑창이 얇고 제로드롭인 스니커즈도 괜찮다. 발레 토슈즈처럼 디자인된 플랫슈즈도 좋다. 필자가 추천하는 맨발 대용 신발은 밑창이 얇아 바닥의 굴곡을 느낄 수 있는 발가락신발이나 아쿠아수즈다.
‘많이 걸으면 그만이지, 걸음걸이까지 바꿀 필요가 있어?’ 이런 의문을 품은 분들이 계시리라. 발 앞 착지에는 자연스럽다는 점 외에 실질적인 이득이 있다. 제2의 심장인 종아리를 자극해 혈액순환이 뒤꿈치 착지보다 훨씬 좋아진다. 뒤꿈치부터 디디며 터벅터벅 걸으면 종아리 근육은 전혀 가동되지 않는다. 발 앞부터 착지하면 종아리 근육이 수축하면서 정맥을 압박하고, 이에 따라 종아리 속 혈액이 심장 쪽으로 쭉쭉 올라간다. (종아리 펌프를 강하게 박동하게 하는 운동을 강도 순으로 꼽으면 맨발 달리기와 줄넘기, 까치발 들기 등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걷기에 집중하기로 한다.)
종아리는 제2의 심장이고, 이 펌프를 움직이는 레버가 발이다. 뒤꿈치가 아니라 발 앞으로 바닥을 디뎌야 이 레버를 통해 제2의 심장이 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뒤축이 없더라도 신발 안에 ‘아치(발바닥활) 서포트’가 있다면 그런 신발은 산책하거나 운동할 때는 신지 말라는 것이다. 아치 서포트는 발이라는 레버를 붙잡아두고, 그렇게 되면 종아리 펌프가 덜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치 서포트란 우리 발의 아치(발바닥활)을 받쳐주는 구조를 가리킨다. 아치 서포트 깔창 상품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제로드롭에 밑창이 얇은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 걸음마 이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스럽고 제대로 된 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게다가 종아리를 자극해 피돌기를 활발하게 하는 첫걸음을 떼게 된다. 요철이 있거나 올록볼록한 구간, 또는 보도블록을 벗어나 바닥이 고르지 않은 곳이 보인다면 일부러 그런 지면을 걸어보라. 발을 통한 종아리 자극이 무엇인지 근육으로 느낄 수 있다.
자연적인 신발을 신으면 걸음걸이가 달라진다. 자연주의 보법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다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발을 구르는 동작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그 구분 동작을 할 때면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다. 내가 지구를 굴린다고. (골프를 하면서 뒤땅을 자주 친다는 신도의 말에 법정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작은 공을 치랬더니, 큰 공을 쳤군요.”) 지구를 굴리면서 걷다 보면 자연스러울 뿐더러 당당하고 멋진 나만의 걸음걸이를 만들 수 있다. 그런 걸음걸이가 몸에 배면 뒷굽이 잇는 신발을 신고 다닐 때에도 신발의 왜곡으로 인한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
요즘 걷기는 일거양득 운동이다. 서울시와 민간 앱을 통해 하루 걸음 수에 따라 포인트를 챙길 수 있어서다. 이왕이면 같은 시간에 더 큰 운동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발 앞 착지를 취하자. 걷기라고 해서 다 같은 걷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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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딸 아닌 딸 마흔일곱 살 여자 사람 하나 있다. 오늘은 광장으로 나가는 대신 그를 만나러 간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초겨울 냉기가 은근하고 얄밉게 파고든다. 보자마자 그는 추운데 옷이 그게 뭐야?” 한다. 본성대로다. 나는 나름대로 기상 정보 따라 알맞다고 여겼는데 제 눈엔 아닌 모양이다. “험험, 안 춥거든?” 해보지만 김 나는 국물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그 잔소리가 옳거니 옳다.

 

미리 알아둔 음식점으로 들어가 만두전골을 주문한다. 차끈한 술 다습게 그득 부어 잔 부딪어 마시니 겨울비야 오든 말든 우린 봄날이다. 술잔 내려놓고 나는 바짝 다가가 ” ‘아이얼굴을 들여다본다. “심하게 휘지진 않았구나.” 안도하자 그가 경쾌하게 받는다. “누구 딸인데!” 오늘따라 그 말이 찌르르 심장을 파고든다. 이겨냈다는 말인지 견뎌냈다는 말인지 아리송하지만, 생각보단 걱정이 쉽게 내려져서 좋다.

 

그와 나를 이어준 끈이 격심 우울증이었기에 내게 그는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다 각다분해 그 가슴엔 욕설이 따글따글하다. 나는 그가 쏟아내는 욕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응원해 왔다. 아픈 사람 욕설은 비명이며 신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대놓고 역성들었더니 참 자랑스러운 딸 두셨습니다~”라며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구태여 욕설 의학을 설파하진 않았다.

 

사실 욕설만큼 단도직입 진솔하며 엄밀한 언어는 없다. 이 뱉어내는 욕설은 비루하고, 이 부르짖는 욕설은 존엄한 까닭이다. 특히 깊은 병을 앓는 사람이 피 토하듯 퍼 올리는 욕설은 목숨 냄새 낭자한 생화학이다. 비린내 물씬 풍기며 들이치는 욕설로 그가 자기 영성을 드러낼 때 나는 그에게서 신을 본다. 거친 외마디로 달려오는 그 지극한 부드러움에 나는 녹는다. 나는 참 자랑스러운 딸을 두었다. 고맙다.


 

집으로 돌아가다 겪은 일을 그가 페이스북에 올렸다. “내 인생 아버지 같은 분과 서울서 만나 오랜만에 회포 풀고 집에 가는데 지하철역 앞에 웬 할머니 한 분이 우산도 없이 걸어가시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냐 했더니, 새벽인 줄 알고 주일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밤중이라며, 그냥 교회 가서 자려고 한다셔. 나도 교회 다녀봐서 알지만, 요즘 교회는 잃을 게 많아 절대 문 안 열어놓거든. 걸으며 얘기 듣다 보니 울 엄마랑 동년배시다. 교회까지 모시고 찾아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이 잠겨있네. 겨우 당직 집사 찾아 들어가 자모실에서 주무시게 이부자리 깔아드리고, 잠드시는 것까지 본 뒤 돌아섰어. 막상 집에 오려니 택시는 안 잡히고, 춥고, 무턱대고 따라가느라 어딘지도 모르겠고, 간신히 집 앞에 와서 깬 술 채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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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호(작가/콘설턴트)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가난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린다. 나는 내 책<춤추는 인간>에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10층에서 태어나 20층까지 올라간 사람이 있고, 지하 1층에서 태어나 지상 1층까지 올라간 사람 중에 누가 더 능력자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부의 속성은 가속이 붙고 가난의 속성은 역가속이 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기회비용을 얻는다. 기회비용의 크기는 부모가 가진 부에 비례한다.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매몰비용을 얻는다. 부모가 가진 가난에 비례한다. 전자의 삶은 가만히 있어도 플러스가 되는 삶이라면 후자의 삶은 열심히 노력해도 마이너스가 되는 삶이다. 가난의 역가속이 노력의 에너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즉 10층에서 태어난 아이는 가진 10층의 자원으로 단번에 엘리베이터 공사를 해 20층까지 갈 수 있지만, 0층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리 달려간다 해도 가난의 역가속으로 지하로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보겠다. 가난한 집에서 능력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치자. 그런데 가족이 진 빚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는 극적인 변수가 없다면 그가 가진 능력으로 평생 가족의 빚을 갚을 확률이 90% 이상이다. 단순히 노력의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이럴 경우 아무리 능력 있어도 평생 단 한 번의 기회비용을 얻을 확률은 5% 미만이다. 이걸 누군가 뚫고 나온다면 그는 초인에 가깝다. 무덤에서 기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더 능력자인가? 능력은 그에게 주어진 상황의 상대성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기회비용을 타고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트랙을 달린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기는 그저 100미터 트랙을 달리고 있을 뿐이지만, 옆 가난한 집 아이는 허들 트랙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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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에 들렀을 때 점심 식사하러 가곤 하는 음식점이 있다. 그리 탐탁지는 않으나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서다. 일요일은 등산객이나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다. 그런 음식점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그렇다. 오늘은 특별해서 특별하지 않은 두 사람이 내 옆에 앉아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대화를 나눈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고주파 음성에 실려 전해지는 내용들이 여간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가까운 데에 있는 대형 개신교인 모 교회 성가대원이다. 교회가 워낙 커서 주일 낮에는 5부 예배까지 있다. 필경 그 큰 성가대 중 하나에 속한 중견 인물들일 테다. 어디든 그러하듯 교회 역시 정치가 무성하게 판치는 곳이다. 신앙과 봉사로 포장하지만 실로 잔혹한 파쟁들이 신을 내세워 일어난다. 다른 어떤 집단보다 고결해서 야비한 싸움꾼들이 득실거린다. 이 두 사람 또한 그 복마전 한가운데에 있다.

 

30분가량 대화하는 동안 열 마디 중 아홉 마디는 다른 교인 정죄. 나머지 한 마디는 자기 정당성 주장이다. 두 사람 중 하나에게 주도권이 있음은 물론이다. 시종 그가 대화 주제와 흐름을 관장한다. 와중에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며 어떻게 감사한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 둘 얼굴에 은혜받은빛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저들에게 과연 신앙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일까.

 

개신교 신앙과 구원 개념은 본원 오류를 지닌다. 신앙과 구원은 영성에 근거하고, 영성은 사유(私有)할 수 없는 네트워킹-우리말로는 팡이실이- 사건임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온 치명 실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교회 더구나 성가대 구성원을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신앙으로 도달한 구원 확신은 확실히 망상이다. 망상이 치루는 대가는 의외로 싸다; 결과를 모를 뿐이다. 그 맛에 숱한 사람들이 망상에 올라탄다.

 

식사를 마치고 사직단으로 향한다. 6번 국도 큰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구간 길 이름이 유래한 거대한 교회 건물이 나타난다. 아까 그 두 사람이 소속된 곳이다. 건물 외형은 그 교회가 표방하는 신학과 비전을 상징하겠지만 외부자인 내 눈에는 위압으로 다가온다. 이 차이에서 한국 보수 개신교 오늘날 위상이 정해진 듯하다. 내란 사건에 다양한 형태로 깊숙이 연루되었으나 괴괴하기만 한 풍경이 야속하게 기이하다.

 

사직단에 예를 올리고 인왕산 숲으로 들어간다. 자락길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마을로 나와 청와대와 경복궁 사잇길을 걷는다. 북촌을 거쳐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까지 걸으니 오후 네 시 반이다. 가을은 잔향으로 남고 맹동(孟冬) 본향이 깔린 역사-자연에 깃들었던 긴 시간이 마침내 회두리에 이른다. 자연에 예를 다한 문명, 그 장엄한 겸허에 허리 접고 돌아선다. 부디 종묘사직길이 지켜낼 수 있기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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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간 식당에서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자리를 잡는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난간을 두르고 높인 좌석이 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를 내려다보며 밥을 먹는 구조다. 이상하다 싶어 둘러보니 공간 전체가 둘로 나뉘고 내 쪽 좌석은 모두 저쪽보다 낮았다. 하필 내가 그 마주 가장자리에 앉은 거다. 아직은 내 옆자리에 손님이 없지만 언제라도 나는 아랫것처럼 밥을 먹어야 할 판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세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오고 직원은 바로 그 자리로 그들을 안내한다. 별생각 없이 편의에 따라 한 행동일 테지만 식당이 거의 빈 상태인지라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세 사람이 좌정한다. 바로 다음 순간 그중 한 사람이 말한다. “저쪽 자리로 옮기겠습니다. 옆자리 앉으신 분이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자리 많은데 구태여···.” 쉽지만 쉽지 않은 배려다. 귀가 쩍 열린다.

 

아주 특이한 목소리를 지닌 남자 사람이다. 명노민 배우 톤에 파스텔 음색이 깊게 깔린 매혹을 지녔다. 듣자마자 심사가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일부러 목소리를 작게 하지는 않아서 일행 이외 사람들에게도 그 말이 들리는데 여낙낙히 열리는 미닫이문처럼 지나간다. 어머니와 옆지기로 보이는 다른 두 여자 사람 음성은 상대적으로 쟁쟁한데, 그 둘을 다독이듯 대화 소리를 알맞게 수렴시키고 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거의 쉴 틈 없이 조곤조곤 이어간다. 남자 사람 목소리보다 더 경이로운 사건에 내가 빠져들고 있음을 어느 순간 알아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대화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개는 한 사람이 음성·어투, 발언 시간·분량, 제스처 따위로 꼭대기 올라앉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에 민감한 나는 그 여하를 누구보다 정확히 감지한다. 대단히 드문 경우다. 아름답고 귀하다. 감사하다.

 

저 가족 구성상으로 흔히 그려낼 수 있는 풍경이 전혀 아니다. 나는 소주 한 잔 가득히 따라 마시며 생각에 젖는다. 아무리 크고 잘난 담론으로 떠들어도 결국 민주정치는 이 소담한 풍경을 밑절미 삼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가 살풍경이면 정치는 민주를 떠난다. 떠난 민주를 되돌리려 광장은 여태 함성중이다. 함성은 이 세 사람 목소리를 품어 번지게 한다. 나는 광장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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