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위대하다는 말을 만나면 언제나 나는 칼을 뽑아 든다. 거대 유일신은 말할 것도 없고,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으나 ‘위대한 영혼’이라 불리는 무엇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흔히 이렇게 말한다. “거대/위대한 무언가가 보낸 메신저로서 그대를 느껴보라.” 나는 칼을 겨눈다.
“거대/위대한 무언가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가?”
각기 다른 영혼 사이 네트워킹 사건으로서 나를 메신저 삼는 그 “무언가”는 소소하고 미미하다. 소미(小微)하기에 빚어내는 무한한 결과 겹으로 말미암아 천지간 가득해서 크게 여겨진다. 크게 여겨지나 실체로 포착되지 않는다. 실체로 포착되지 않는 상호작용이어서 메시지를 지닌다. 그 메시지를 감지하고 전달하는 메신저를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군자라 한다. 『중용』은 말한다. 군자지도비이은(君子之道費而隱). 대우 명제로 바꾸면 명료해진다. 소소하고 미미해서 포착할 수 없는 상호작용인 메시지가 아니면 군자가 전할 수 있는 말(道)이 아니다. 아니, 거대/위대한 무언가는, 그것이 질량이든 에너지든 도무지 메시지를 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대/위대한 무언가가 보낸 메신저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났다면 그 메신저도 가짜고 그를 보낸 거대/위대한 무언가도 가짜다.
진실에서도 진리에서도 거대/위대한 실체란 없다. 소미 실재(實在) 동시성 군무가 그려내는 찰나 사건 덩어리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이 진실, 이 진리를 알아야 비로소 참 앎이다. 거짓 앎은 거대/위대함을 휘감은 질병이며 악이다. 나는 칼로 베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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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맘때 쓴 작은 글이다. 기억 저편 가뭇없이 사라졌는데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 서비스로 떡하니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와 오늘 문맥은 다르고도 같다. 사실 이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핍진한 내용을 지닌다. 구체적 에피소드만 다를 뿐이다.
명신이와 집사람 석열이가 일으킨 내란은 단군 이래 이 나라를 가장 지저분한 똥물로 내던진 사태지만 이 또한 비대칭 대칭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란 도당 정체가 무엇인지, 누구누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어 유구한 매국 부역 세력 전체를 한눈에 알아보고 맞짱 뜰 수 있게 된 일 또한 단군 이래 으뜸가는 사건임이 틀림없다.
나는 명신이 뒤꽁무니를 쫄쫄거리며 따라다닌 엘리트에 각별히 주의한다. 조국을 사냥함으로써 일으킨 제일차 내란 때 나는 이미 이른바 진보 엘리트 허울을 보았다: 대표 아이콘 강준만, 홍세화. 곧이어 석열이가 정치판 거물로 비약할 때 진면모를 확실히 드러낸 최장집. 이들만으로도 이 나라 진보 엘리트, 저 거대한 지성이 얼마나 알량하고 가소로운지 통렬하게 깨달았다: 거대한 지성과 명성이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맹렬하게 알아차렸다.
아닌 줄 알고서든 아닌 척하면서든, 저들은 진보를 전유해 민중을 속였다. 제국에서 배워 온 거대 지식에 매몰돼 스스로 부역자라는 자각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알고도 그랬다면 “대놓고” 부역한 자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므로 준엄하게 응징해야 마땅하다.
물론 적극 능동 부역을 위해 거대를 좇은 엘리트가 이른바 “악의 축”이라는 기본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 훨씬 이전부터 문제가 됐던 서울대, 육사, 외국 명문대 출신 거대 엘리트인 국회의원·판검사·국무위원·장군·언론인 따위들은 이번 내란에서 천박하고 비루한 부역자 “근성”을 더없이 다시없이 스스로 까밝혔다: 거대는 거짓이다.
빼놓을 수 없는 거대 인간상이 또 있다. 진보 보수 넘어 거대 위상이 부여된 “원로”라는 종자들이다. 싸구려 양비론을 고담준론인 양 포장해 내란 일으킨 집단을 두둔하고, 현실과 아득히 떨어진 정답을 말함으로써 오늘 이루어야 할 대오를 흐트러뜨린다. 큰 깨달음으로 모두를 일깨운다는 망상은 지붕 위에서는 어디에 비 새는 줄 모른다는 작은 이치 앞에서 허망 그 자체다. 응원봉 든 여고생만 못한 판단력으로 무슨 원로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거대 무속 말해야 한다. 무속은 본디 인간을 이끌어 신의 뜻을 묻도록 하는 ‘거대’ 존재가 맞다. 오늘날 타락한 사이비 무속은 신을 이끌어 인간의 야욕을 채우도록 한다. 그 결과 야욕을 채운 인간은 과대망상에 빠진다: 거대는 망상이다.
나는 매일 산길을 걸어 출퇴근한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청딱따구리 같은 작은 새를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들은 나를 보면 서둘러 도망간다. 내가 적의 없음을 밝혀도 헛일이다. 내 말을 들을 수 없어서다. 내가, 내 말이 너무 커서다. 저들이 듣게 하려면 작은 존재로, 작은 소리를 내야 한다. 작디작은 존재로 작디작게 고요처럼 말해야 참 신, 팡이실이다.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한강진에서 작디작은 키세스 소녀들이 발하는 작디작은 함성이 거대한 거짓 존재를 무너뜨린다. 이는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과학을 꿰뚫어 초극하는 참 주술이기 때문이다. 키세스 소녀를 우주 전사라 한 표현은 가히 진리다. 실로 어이없는 대한민국 내란 한가운데서 실로 장엄한 범주 인류학이 탄생한다. 여기서 비로소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선다. 개벽이 따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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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