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정민(서울교대 교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글을 그대로 싣는다



나는 비판이론을 기반으로 연구하는 학자다. 비판이론은 한마디로 권력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론이다. 비판이론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쿨하고 멋진 이론이지만 극우들에게는 빨갱이 이론, 극우기독교들에게는 사탄의 이론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나는 빨갱이도 아니고, 더군다나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북한에는 1도 관심 없는, 쇼핑과 K팝 아이돌을 사랑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이기도 하다.

비판이론은 자본주의의 끝판왕 나라인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배웠다. 비판이론을 공부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더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최애가 오래오래 마음 놓고 돈 벌 수 있으려면 팬덤인 우리 모두가 잘 살아야 하니까 자본주의가 오래오래 잘 작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비판이론처럼 자본주의의 구멍들을 메꾸어줄 철학들이 필요하다. 내가 연구하는 “기술의 민주화”도, “사이비치료 연구”도 모두 비판이론에 근거한 것들이다. 비판이론을 얘기하는 이유는, 나는 소위말하는 “깨어있는” “진보적인” 교육학자라는 백그라운드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내가 아들을 깨어있는, 진보적인, 인권감수성이 높은 남자로 키우기 위해 교육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시켰겠나. 어릴 때부터 매일 2-3시간 토론을 하고, 전세계를 데리고 여행다니며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보여주고, 시사 문제들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하고, 예술과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클래식, 발레, 뮤지컬, 국악, 미술관과 박물관 안 데려간 곳이 없고, 설문조사지 만든다고 하면 편향되지 않은 설문지 만드는 것이 왜 중요한지 함께 생각하고, 역사적 사건들과 종교적 신념들에 대해 이야기나누고, 자연의 신비로움과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나 혼자 애 둘 데리고 바다로 산으로 협곡으로 사막으로 안 가본 곳이 없다. 남편은 여행 안좋아해서 나 혼자 아들, 딸 데리고 다니며 교육시켰다. 학교 공부만 빼고 다 지원했다(사교육 거의 안 시켰다는 뜻이다). 학교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해야지.

이보다 더 애들 교육을 잘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내가 바라던대로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정말 순식간에 내가 이렇게 정성스럽게 교육시켜놓은 아들은 극우 유튜버에 빠지게 되었다.

아들이 중 2 즈음 되었을 때이다. 어느 날 이런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왜 군대 안 가? 여자도 똑같이 가야지.”
“우리 사회는 남자를 너무 차별하는 것 같아.”
“남자가 왜 자기를 she 로 불러달라고 해? 내 마음대로 부르면 되지. 나는 남자는 무조건 he라고 부를거야.”
"여가부는 폐지해야해"

나는 단어 몇 개, 문장 몇 마디만 들어도 이 사람의 철학과 세계관을 유추할 수 있다.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가르치지 않은 가치에 대해 아이가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어?”

“유튜브에 엄청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그랬어.”

조던 피터슨이었다.
그 외에도 몇 몇 극우 유튜버들이 있었다.

그 후, 나는 아들을 극우 유튜버들이 심어놓은 사상에서 빼내오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생각보다 극우 사상은 접착력이 강했다. 잘 안 떨어졌다.

애를 빼내는 방법은 끊임 없는 토론 밖에는 없었다.
왜 여가부 폐지가 남자인 너한테도 손해인지. 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차별이 심한지. 왜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대로 불러줘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얘기하는 “페미”와 진짜 페미니즘은 어떻게 다른지. 진짜(학문적 철학적) 페미니즘은 장애인 인권,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인권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있는지. 극단주의를 알아보는 방법. 가짜뉴스를 가려내는 방법. 차별금지법 등등..

수개월 동안 온 정성을 다해 아이와 열심히 토론을 했다. 극우 유튜버들이 애 머리에 심어놓은 생각이 어디가 왜 잘못된 것인지를 애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논리를 매우 치밀하게 분석해서 어디에 허점이 있는지 찾아내야 했다. 남녀의 문제를 개인의 경험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적 관점에서 보도록 수없이 설명하고 가르쳐야 했다. 한번으로 안되고 여러번 반복적으로 토론해야 했다. 조던 피터슨의 논리와 생각이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정확하게 짚어서 비판해야 했다.

내가 가만히 보니 극우들은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이 특징이더라. 미시적으로만 본다. 지금 나의 이 행동을, 생각을 사회 모두가 하게 되었을 때에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생각을 안한다. 못하거나. 사회복지 시스템이 당장 자기는 필요 없으니까 세금 내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사회복지 시스템이 안좋으면 내 자식이 살게될 사회는 위험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안한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넘어 애써 더 넓고 긴 관점으로 문제를 보는 능력을 요하는데 이게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요한다.

이렇게 공부를 많이한 나에게도 애를 극우적 생각에서 꺼내오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는데 대부분 부모들은 자기 애가 이런 사상에 빠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알더라도 빼내올 방법을 모를 것이다. 나는 십년 넘게 애들의 가치관 교육에 이렇게 힘을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애가 극우에 단 한 달 만에 넘어갔는데, 이런 교육을 받지 않은 남자 아이들은 그대로 여기 세뇌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얘기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매우 sticky 해서 잘 안 떨어진다.

유럽에서는 중학생이 유튜브를 보다가 테러리스트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서 가입을 하고 테러리스트에 입단을 한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온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IS 같은 테러리스트에 가입하는 중학생은 없지만 또 다른 테러집단인 극우 보수 유튜버들에게 세뇌당하는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현재 고등학생인 우리 아들의 주변 모든 남자아이들이, 정말 거짓말 안하고, 단 한 명도 안 빼고, 100%의 남자아이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며 신남성연대를 추종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고등학생 아이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뭘 안다고 빨갱이 빨갱이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들보고 빨갱이라고 한단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의 정치성향을 그대로 배운 것일 가능성도 크지만, 내 경험을 보면 이 아이들은 부모의 신념과 관계 없이 극우 유튜버를 보며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100%이다. 실제로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극우 유튜버들을 신봉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 친구들이 좋아한다는 극우 유튜버들의 영상 몇 개를 아들이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나는 단 5분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말도 안되는 괴로운 개소리들을 아들 친구들은 “이 사람 너~~무 똑똑하지 않냐?”하면서 본단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세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학교 교육을 바꿔야한다. 이런 신념이나 가치관, 철학은 지금의 주입식 교육 방식으로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대항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토론과 글쓰기,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지식의 학습을 통해서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AIDT에 자원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청소년의 극우화 예방은 아주 시급한 문제이다. 우리의 자원을 비판적 사고력 교육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토론 교육과 역사교육, 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나도 대학생때까지만 해도 부끄럽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중도보수였다. 미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바뀐 것이다. 그들의 교육은 100% 토론 교육이었다. 교육은 중요하다.

그리고 둘째는, 건전하고 민주적인 가치관을 가진 2030 남성들이 유튜버를 더 많이 해야한다. 아들이 “엄마 그런데 진보 유튜버는 없어. 진보인 사람은 유튜브 안하는 것 같아.” 라고 말한다. 아니다. 진보 유튜버들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젊은 전문직이다. 이런 사람들은 청소년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정치적 신념은 가족 간에도 서로 바꿔놓을 수 없다. 극우적 생각이 일단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된다. 그래서 예방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극우 유튜버의 비민주적 개소리들을 저격할 수 있는, 청소년에게 매력적인 유튜브 방송이 더 많아져야 한다. 불행히도 청소년이 볼 수 있는 건전하고도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은 입시 콘텐츠 채널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어차피 경쟁적 입시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논술, 토론, 디베이트처럼 비판적 사고력을 집중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입시를 만들면 좋겠다.

2030 남성이 우측으로 쏠려있다는 통계 그래프를 여러번 보았다. 4050은 다시 좌측으로 쏠린다. 그런데 나는 지금 2030이 나이들면서 좌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30은 유튜브 세대이다. 새로운 유튜브 세대가 계속계속 밀고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 그대로 간직한 채 노인이 될 것이다.

이번 폭동과 같은 일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아야 한다. 나는 그런 세상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이미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극단주의와 파시즘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지 않게 지금 당장 우리의 아이들을 점검해보고,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무엇을 보는지 이야기해보고, 건전하고 상식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이 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책임이다.

+) “구출”이라는 표현이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극단주의는 ”혐오“의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는 구출하는 심정을 가지게 된다. 민주주의는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혐오의 반대편에 서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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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광화문으로 가는 일은 이제 제의로 굳어진다. 박근혜 때 스물세 번을 꼬박 갔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가야 끝나려나. 시민 발언과 가수 노래를 들으며 그때와 이제를 비교해 보니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복잡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지긋지긋한 식민 그늘을 벗어나려면.

 

서울서부지법에서 윤석열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광신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요일 아침, 나는 현장으로 향한다. 상황이 일단락된 뒤 풍경을 통해 오는 전언을 듣기 위해서다. 거리 곳곳에 저들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반증이 나뒹군다. 군데군데 여전히 남아 수군대거나 떠들어댄다. 슬프고 가여운 생명들이다.

 

자신이 짝퉁 키세스 전사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당 받고 나온 할멈 예닐곱이 뜨끈한 국물을 나누며 시시덕거린다. 자신을 여기로 끌어들인 사악한 자들은 지금 아늑하고 풍요로운 공간에서 돈 세고 있을 텐데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러는지. 아린 눈길을 접고 나는 다시 국사당으로 향한다. 지난주 남겨둔 아쉬움을 거두러.






 

고건축 전문가에 따르면 국사당은 전체로 견실 간소한 조선 후기 건축 방식을 따르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우아한 면을 찾아볼 수 있는 중앙 경공(京工) 솜씨가 드러난다고 한다. 나중에 덧붙인 부분과 제대로 가꾸지 못한 주위 경관 탓에, 옹색하고 심지어 너저분한 느낌까지 들긴 해도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만하기도 어렵다.

 

본디 국사당은 조선 수호신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해진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서울 수호 신당이다. 초기에는 신주도 있었으며 국가에서 제사도 지냈다고 하니 규모나 미학 측면에서 만만치 않은 건물이었음이 틀림없다. 왜놈에게 쫓겨나 이리로 오면서 원재료를 거두어 복원했다고 하는데 제반이 위축됐을 가능성이 크다.

 

왕궁과 대찰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국사당 앞에 한참 서서 나는 무속이 걸어온 침하(沈下) 역사를 돌아보고 또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문화, 정치경제, 생태계 문제 전반을 둘러본다. 유구한 우리 산천 신앙을 범주 인류학 서사로 재탄생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깨달음에 든다. 현실 무속, 딱 그 짝 거대종교는 망조다.

 

명신이를 부추긴 무속과 석열이를 부추긴 개신교는 신벌을 받아야 한다. 물론 천공이 놈이 믿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도 광훈이 놈이 믿는 여호와도 가짜 신이니 그들이 벌을 내릴 리는 없다. 그들을 벌할 신은 인민, 깨어 있는 시민이다. 시민을 깨어 있게 하는 신령들이다. 그 신령 가운데 신덕왕후께 절하고 국사당을 떠난다.



 

국사당 떠나 인왕산 남쪽 자락을 따라간다. 끄트머리 직전에 마을 길 거쳐 자하문로를 걷다가 이내 창의문로 건너편 칠궁으로 향한다. 한눈팔지 않고 곧장 육상궁으로 간다. 어제오늘 일을 고하고 팡이실이 신령을 청한다. 이렇게 새로운 순례길을 짠다: 국사당-육상궁-정릉. 버림받은 지성소가 연대해 반제 전의를 드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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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원(문화학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사람이 참으로 간사하다. 매일매일 속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뉴스를 챙겨보았다. 온갖 사람들의 온갖 발언에 신경을 끓이고 때로 긁히는 마음이 들 만큼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토리 아빠가 떠난 뒤 문득 허망한 마음이다.

언젠가 나는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을 아테네 민주주의 시대의 예술과 비교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은 <라오콘상>이나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날개> 같은 작품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장엄하고 화려하며 역동적인 기교와 자태를 뽐낸다. 이 시대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중 하나는 과거 그리스 시대 건축물을 상징하는 양식이 도리스, 이오니아식 원주의 소박하고 강건한 느낌과 달리 화려한 잎으로 테두리를 두른 코린트 양식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려하고 역동적인 작품들을 보면서도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만개한 꽃이 마침내 시들어버리듯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의 이면에서 그 시대의 우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들이 이처럼 화려해진 까닭은 한 마디로 예술가의 후원자(물주)들의 경제력에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 확장된 그리스-마케도니아 제국의 지배계층은 이전 시대 폴리스의 물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해졌다. 기본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 작품들은 부유한 개인 후원자의 현시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제작된 훌륭한 문화상품이었다. 설령, 이 작품들이 공공적인 목적으로 발주되었고, 공공장소에 전시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드러내주는 것은 과거 상고기 그리스 폴리스의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의 공공 건축물이나 이를 장식한 조각이 해당 도시국가와 공동체 주민들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냈다면, 헬레니즘 시대는 표면적으로 그리스 문화에서 기원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제국을 분할 지배한 제왕들의 전제 왕정이었음을 숨기지 못했다. 도시국가의 공공성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알렉산드로스 이후 남겨진 전제군주의 권세와 그 주변의 관료와 상인 등 지배세력의 공공성만 남아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작품들이 이처럼 극도의 화려함과 장식성을 추구한 이면에서 지식인들의 철학은 현실참여 대신 현실도피를 추구했다. 기원전 300년경에 등장한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은 쾌락과 금욕이라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두 철학은 사회의 복리가 아닌 개인의 선(행복)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는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졌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평정보다 나은 다른 것을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고전기 그리스 문화의 모태가 된 폴리스(도시국가)들은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회였다. 혈연, 경제적 이해관계를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정치적 유대를 통해 시민이 결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본토의 충만했던 사회적·가족적 유대관계는 개인에게 여러 정치적 의무와 가족과 공동체 관계 속에서 제약을 부과했지만, 반대로 이들 상호간의 이해와 신뢰는 고대의 다른 어떤 문화가 성취했던 것보다 큰 정치적 권리(참정권)를 시민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거대한 세계주의(전제정치의 지배 아래 있는 세계 제국) 아래에서 한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삶을 규정짓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정치(공동체 참여)와의 긴밀한 연계는 지방적 차원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다. 헬레니즘 왕국의 평균적 그리스인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직계가족밖에는 없었다. 그와 같은 시대였기에 문학에서 이른바 현실도피적인 '전원시' 장르가 출현한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자연인> 같은 프로그램이나 귀향 귀촌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이런 현상도 민주주의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당신은 더 이상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정치적 낙담이 하나는 퇴폐와 유미주의로, 다른 하나는 은둔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적 삶의 전통적 가치관과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현실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괴리가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헬레니즘 제국은 시민(市民)에서 신민(臣民)으로 정치적 위상이 변화한 이들에게 사회적 양극화와 정치적 무기력을 강요했다. 헬레니즘 제국의 세계주의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세계화'를, 그리스 본토의 좁은 경제권을 넘어 헬레니즘 체제에서 유한계급이 얻었던 경제적 권력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양극화를 발견한다. 모던(modern)한 고대(古代)의 풍경에서 현대(現代)의 고대(古代)적 풍경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아테네 민주정이란 정치적으로 각성된, '제멋대로 시민'들의 발언과 정치적 참여가 실제로 아테네의 현실 정치에 반영되는 정치적 효용감을 느낄 수 있었던 시대였다면, 헬레니즘 시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더 광대한 '제국의 세련된 신민'이 되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선택이 제국의 통치에 반영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장에서 돈을 세거나 더 즐거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일뿐이었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서로 다른 현장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벌써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란 우두머리가 버티다 체포된 지 이제 불과 하루밖에 안 되었지만, 벌써 내 안의 긴장이 이렇게 사라져버렸다. 어떤 이는 십년 넘은 쳇기가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선 그 심정이 곧 나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헌재의 시간'이라느니, '공수처와 검찰의 시간'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결국 지금까지도 존재해왔던 기득권 '체제의 시간'이기도 하다.

열린 광장과 촛불의 결과였던 문재인 정부가 검찰 개혁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검찰 공화국의 출현을 막지 못했던 것, 수구보수세력의 향수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했음에도 수구보수세력이 이후 ‘히드라’처럼 더욱 집요한 형상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이제부터가 진짜 어떤 미래로 갈 것인가? 어떤 대한민국을 요구할 것인가? 저들보다 더욱 집요하게, 더욱 혼란스럽게, 더욱 시끄럽게 말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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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나는 나지막한 산길을 걸어 출근한다. 남쪽에서 비탈길을 올라 능선길 따라가다가 북쪽 비탈길에 이르면 아연 풍경이 달라진다. 눈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심할 때는 아예 발길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거기만 걷기 위해 스노우 부츠를 신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오늘은 길섶에만 눈이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아예 눈을 떼고 걷기는 뭣하다. 밤기운이 여전해 어둑어둑할 때는 더 그렇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아직 동은 트지 않았다. 긴급뉴스 보는 일을 축으로 해서 돌아가던 긴장된 일상이 어느 정도 풀어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공화국 계절은 겨울이고 민주주의 하루는 밤이다. 가만히 앉아서 봄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우리 공화국 처지다. 이불 속에 누워서 아침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우리 민주주의 형편이다. 어쩌겠는가.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할 공화국이고 우리 손으로 닦아야 할 민주주의다.

 

남들은 모른다. 우리가 중첩 또는 누적 식민지라는 악무한(惡無限)과 분단이라는 악조건이 빚어내는 왜곡과 굴절로 말미암아 이렇게 몸부림친다는 사실을. 사회 모든 분야 꼭대기에 철옹성 쌓고 앉은 특권층 매판 부역 세력이 시도 때도 없이 나라를 말아 처먹는다는 사실을. 저들이 쳐놓은 가짜 반공과 사이비 자유민주주의에 휘말려 막무가내 날뛰는 광신도가 총궐기하면 능히 독자로 정권도 창출한다는 사실을.

 

말이 쉬워 평평하게 K-민주주의, K-공화국이라 일컬으나 인민이 주체이므로 민주주의일 뿐이고, 인민에게서 주권이 나오는 나라니까 공화국일 따름이다. 우리는 실제로 자주(自主)와 통일이라는 불퇴전 목표를 놓고 반제국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반제국주의 전쟁이라서 자맥질이 극심하다. 악랄한 제국과 노회한 부역 지배층이 구사하는 전략·전술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워온 인민이 치른 희생은 형언 불가다.

 

희생은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 어제 희생한 죽음들이 봄을 데려오고 오늘 희생하는 삶들이 동을 틔움으로써 패자 필생 승자 필멸 진실을 세워간다. 패륜·비리 검사 한 놈이 사이비 언론 사기술 탓에 대통령 돼서 210개월 동안 승승장구했던 부역 전쟁은 우주 전사 키세스 소녀들이 지새운 겨울밤 희생 덕에 끝판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붉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소녀는 응원봉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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