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문화평론가)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다 부질없는 개뻘짓이다. 진짜 조상 잘 만나 조상덕 본 사람들은 지금 다 해외여행가고 없다. 조상덕이라곤 1도 못 본 인간들이 음식상에 절하고 집에와서 마누라랑 싸운다."

대한민국의 명절을 바꾼 전설의 댓글이라 불리는 댓글이다. 이 댓글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한 번 본 사람은 잊을 수 없다고들 할 정도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이 댓글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한 번 이 댓글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이 댓글은 일종의 비속어를 쓰면서 시작하는데, 그보다 강력한 건 그 다음 문장이다. '조상덕 본 사람들은 다 해외여행가고 없다'는 이 한 줄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박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조상에게 절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 중에는 진심으로 조상을 애도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애도는 꼭 명절에 해야하는 건 아니다.

엄청난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간신히 고향을 찾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떤 부조리함을 느낄 법하다. 하루이틀 자고 돌아갈 거라면, 이런 날이 아니라 명절 이주 전에 와서 부모님 얼굴을 보면 안되나? 정말 조상님께 절하는 게 복 받는 일일까?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서 정말 행복하고 즐겁나? 좋아하는 친척이라면 다른 날 만나 웃으며 술 마시고 행복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한 번쯤 해봤을 법하다.

그런 와중에 진짜 조상 덕 본 사람들, 흔히 금수저라고 상정된 어떤 존재들은 다 해외여행 가 있을 거라는 말이 너무도 와 닿는다. 공항은 100만 명 이상이 몰리고, 그들은 행복을 찾아 떠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댓글 한 줄이 우리 나라 명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묘한 부조리를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 다음 줄은 더 잔인하다. 행복하기 보다는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 많을 수 있는 이 명절 속의 '나'를 비하하는 듯한 묘사가 가슴을 파고든다. 고작 세 문장, 실질적으로는 두 문장에 불과한 이 댓글이 많은 사람들을 결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삶을 살겠다. 관습의 강박을 뿌리치겠다.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시간을 살겠다. 그렇게 마음먹게 했을 것이다.

물론, 명절 문화에는 좋은 점도 있고, 온 가족들이 긴 연휴에 함께 만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저 댓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명절에 행복한 사람은 관습대로 행복하면 된다. 그러나 명절에 행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관습을 떨쳐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관습이 아니라 인습이다. 필요한 건 인습을 떨쳐낼 용기였던 것이다.

더 이상 관습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미로 작동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내게 이로운 관습은 존중하고, 내게 해로운 관습은 과감하게 물리쳐야 하는, 우리는 개별적 삶을 살아간다. 다른 날 가족과 친척을 만나고, 연휴에 해외여행 떠나는 게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한번 뿐인 나의 삶, 지나고 나면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시간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삶보다 우선인 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얼마 없는 시간을 쓰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내게 가장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때로 관습의 반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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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30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금수저인 분이라면 굳이 설이나 한가위에 나라밖마실을 안 가리라 봅니다. 금수저인 분들이 왜 그렇게 붐비는 철에 움직이겠어요.

금수저가 아닌 분들이 바로 설이나 한가위에라도 틈을 내어 나라밖마실을 가려고 하지 싶습니다. 다만, 금수저는 아니어도 금수저에 가 닿으려고 애쓰면서 목돈을 모은 분들이 설이나 한가위에 나라밖으로 나갈 테지요.

저처럼 그냥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설이나 한가위뿐 아니라, 여느 때에도 조용히 시골에서 하늘바라기와 바람바라기와 새바라기를 합니다. 구태여 멀리 나가야 하지 않고, 새가 어련히 찾아와서 노래를 베푸니까요.

저는 스스로 흙수저가 아닌 ‘풀수저‘나 ‘숲수저‘로 여깁니다. 어떤 수저를 쥐느냐를 놓고서 싸우거나 미워하거나 시샘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사랑수저와 노래수저와 ‘아이돌봄수저‘로 ‘살림수저‘를 가꾸는 하루이면, 온누리가 아늑(평화)하리라 봅니다.

bari_che 2025-01-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논점을 벗어난 ˝정답˝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한의원에 아주 일찍 출근한다. 다섯 시 전에 일어나 준비하고 한의원에 도착하면 일곱 시 반 전이다. 초 간단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는다. 이 아침상이 설과 한가위에는 그대로 차례상이 된다. 나는 형제자매들과 합의해서 함께 조상 차례는 지내지 않는다. 대신 혼자 한의원에서 416차례를 지낸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11년째 이어온다. 진실이 밝혀지면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그럴 날이 과연 오기나 할는지,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먼지로 돌아가지나 않을는지.


 

, 한가위에 한의원 나와 있어 봐야 거의 예외 없이 적막강산이다. 그래도 나오는 며리는 416차례를 거를 수 없어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내게 416은 인생 전체를 뒤흔든 일대 사건으로서 그 이후 세계를 내다보는 모든 창이 바뀌었다. 개인 차원 생사관은 물론 사회·역사관, 심지어 전혀 무관해 보이는 자연관까지 모조리 전복되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 저들 목숨값을 갚아야 할 책무가 내게는 있다. 텅 빈 진료실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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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신이 집사람 구속 기소를 촉구하는 광화문 집회가 25() 오후에 열렸다. 장관은 단연 깃발이었다. 커다란 전통 문양 깃발에서 손바닥 크기 종이 깃발에 이르기까지 “100깃발이 빚어내는 펄럭임과 일렁임은 그만으로도 가슴 뭉클하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결결이 번져가는 구호와 함성, 백인 백색 자유발언, 신명 나는 공연이 어우러지면서 K-민주주의는 찰나마다 약동하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깃발은 자기 정체성과 주장을 가리키는 표지며 실천과 참여 역동을 고취하는 향도다. 깃발 풍경을 보면 집회 성격과 수준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전광훈 떼거리 집회에는 태극기와 다윗 별(이스라엘 국), 그리고 성조(미국)기가 등장한다. 끝났을 때 태극기 팽개치고 가는 짓 보면 애국은 허울이고 속마음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을 테다. 현실 이스라엘을 성서 이스라엘과 동일시해 신앙 본진으로 삼고, 미국을 그 신앙 전해주고 공산주의에서 구원해 준 은인으로 여기는 무지몽매가 불러낸 부박한 블랙코미디다. 신학도 교의도 윤리도 없는 사이비 오컬트일 뿐이다. 구호는 악다구니고, 발언은 개소리고, 공연은 싸구려 복음성가 따위뿐이다. 문화도 정치도 없다. 교회 두겁 쓴 매국노 게토일 따름이다.

 

이렇듯 일소에 부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여기서 배설되는 유튜브에 중독된 권력자가 자기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 그래서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저들과 저들을 둘러싼 무리가 최소한 25%라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아뜩함이 줄어들지 않는 마력을 지닌다. 다른 나라도 그런가? 모르겠다. 안팎 일급 지식인 그 누구도 온전히 제국주의론 범주에서 우리를 이해시키지 않으나 나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중첩/누적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판단한다. 최근 2년 동안 공부한 결과다.

 

이번 내란 사건이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식민지 유제와 특권층 부역 엘리트가 형성한 무섭고 더럽고 막강한 담합을 전방위로 드러내 주는 바람에 우리 절망과 희망은 맹렬하게 갈마드는 중이다. 이제 엊그제 깃발을 되돌아보며 모순을 역설로 달여낼 길을 찾는다. 역설은 불안에서 나온다. 불안은 길이 있으니 그리로 향하라고 우리를 흔든다. 흔들리며 첫발을 내디딜 때 역설이 창조된다. 그 역설을 용기라 부른다. 우리는 고비마다 경이로운 용기를 내는 이웃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들과 동심원을 이루며 민주주의 터전을 넓혀나간다. 모두 깃발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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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부지법 폭동 중심에 특정 개신교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우리에게 개신교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전광훈이나 이만희가 특별한 꼴통이 아니라 이른바 보수 개신교 목사 대부분이 도긴개긴이라고 쓰다가 나는 문득 우리 사회에 참 스승, 참 어른이 없다는 생각에서 멈춰 섰다. 쓰던 글을 모두 지웠다. 어른 없는 우리 사회 풍경을 그리기 위해.

 

조선일보가 원로랍시고 인터뷰한 면면이 양비론에 정답훈계질을 일삼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훈아가 엄마행세하며 되지도 않은 양비론을 펼쳐 물의를 빚었다. 중앙일보가 인터뷰한 최장집은 양비론에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많이 배웠다고, 윗자리 있()다고, 명성 높다고, 그렇게 살아 나이 들었다고 어른이라면 나잇값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럴까?




 

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박 성공한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성공위에서 나이 들면 원로라고, 어른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런 성공은 개인 소유로 여겨진다. 사유로서 성공을 움켜쥔 어른은 그 성공을 공동체, 특히 다음 세대와 공유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공유는 겸허와 돈후(敦厚)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 그런 어른을 만나본 적이나 있던가.

 

백성이 불안에 요동치는데, 성공한 어른들이 나와 진심 사과하고 공동체를 위로하며 안온케는 못할망정 양 싸대기나 올려붙이고 심지어 겁박하는 꼬락서니를 보다못해, 성공도 거두지 못하고 어른 반열에 끼지도 못하는 내가나마 주제넘게 말씀드린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세대로서 용서를 구합니다. 잘 싸워준 젊고 어린 세대를 존경합니다. 안전하며 온전한 나라 꼭!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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