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희원(애리조나주립대 교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급진적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로 트럼프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 정책적 메시지도 별로 없었고, 트럼프는 Project 2025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급진적 변화”는 당연히 진보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진보”라는 말을 사용하자면.)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했던 변화가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수준의 경제적 박탈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를 지지했던 이들의 선택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좌절과 “이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분노가 결합한 결과다. 전자는 그들에게 현실적 이해관계를 설명해주지만, 후자는 그들의 선택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따라서 그들은 부끄럼 없이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의 결합이 바로 트럼프 캠프의 christo-fascism과 혐오 발언이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먹힌 이유다. JD Vance가 절대 고집을 꺾지 않고 모든 채널을 동원해 반복적으로 보냈던 그 뚜렷한 혐오의 메시지들은 표를 깎아먹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를 굳히는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가슴 아프게 깨닫는다. 망언 혹은 제 살 깎아먹기라고 생각했던 그 끔찍한 발언들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밴스는 미국인의 상당수가 자신의 발언을 좋아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우 전략적으로 “세상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인식을 “계급적 분노”와 결합시켰다. 이 계급적 분노는 “기독교-가부장 자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1.
“세상에, 요즘 10대들 정말 큰일이야! 성전환이라니! 그 나이에 뭘 안다고! 트랜스젠더가 점점 늘어난다고 하는데 진짜 말세야. 세상이 어찌되려는지… 정말 끔찍해!”

밴스는 이같은 보수층의 인식을 계급적 분노로 전환시키는 기가 막힌 framing 전략을 썼다. 그가 캠페인 기간 동안 퍼뜨린 메시지는 “상류층 및 중산층 계급의 자제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일부러 10대 때 성전환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돈으로 획득한 후, 이 소수자의 지위를 악용해서 다양성 정책의 수혜를 입거나 입시 전형에 유리한 자료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너무 기가 막힌 이야기라서, 해명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로 느껴진다. 이미 이 말 자체로 폭력이기도 하고, 당사자가 아닌 나같은 사람조차 듣는 순간 지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트랜스 혐오가 아니다. 그는 정확하게 계급적 분노(기독교-가부장 자본주의)를 건드렸다. 사람들은 이것이 허위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고, 혐오를 표출할 희생양을 찾고, 기득권을 욕할 수 있다면 그 뿐이다.

민주당은 허위 사실을 바로잡고 혐오 발언과 맞서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것은 단순히 “가짜 뉴스” 또는 “혐오”로 대응할 일이 아니었다. 이 허위 사실을 바로잡는 것 자체가 상류층 및 중산층을 변호하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 결국 의미화 싸움에서 완전히 질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2.
“내 집 마련은 대체 언제 할 수 있는 걸까. 요즘 집값이 너무 올랐어. 이제는 mortage도 엄두가 안 나. 월세도 말도 안 되는 가격이고. 분명히 4-5년 전에는 이렇지 않았잖아!”

밴스는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불법 이민자들을 너무 많이 받는 바람에 housing crisis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시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요가 폭증했고 바이든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집값을 잡으려면 불법 이민자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트럼프는 이에 발맞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Day 1”에 “mass deportation”을 하겠다는 허풍을 늘어놓았다.

이 메시지는 당연히 높은 월세와 대출에 허덕이는 많은 미국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위해 트럼프가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나? 천만에. 제대로 된 경제 정책 따위 상관없었다. 그저 저소득층의 분노를 건드린 후, 그 문제의 원인을 이민자들에게 돌리면 된다. 여기서 트럼프가 표를 끌어올 수 있었던 동력은 분명히 이민자 혐오, 그리고 이민자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인식이다.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민주당 역시 이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그렇다고 주택 문제의 원인을 이민자들에게 맘껏 돌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3.
“요즘 애 안 낳는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빠져서. 여자들이 결혼도 안하고 애도 안 낳고! 고양이나 키우면서 애지중지하고. 이래서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여자는 애를 낳아야지!“

이 맥락에서의 밴스의 발언은 워낙 유명하다. Childless cat lady. 이 발언이 터지자마자 수많은 여성들의 반발로 인해 그가 엄청난 백래시에 부딪혔던 것도 잘 알려져있다. 그러나 끔찍하고도 놀라운 것은 이 발언 역시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애 없는 여자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히 임신중지 불법화 지지로 이어진다.

밴스는 트럼프의 지지층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래시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장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저 표현이 “dumb”했을 뿐 자신의 생각은 동일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미국 사회가 “anti-child” 국가가 되어가고 있으며 “애 없는 여자들은 소시오패스”라고 오히려 부연 설명을 했다.

“애 없는 여자 혐오”는 (자식 낳기를 종용하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만연하며 매우 높은 수준의 도덕적 정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애를 낳지 않는 여자는 멸시받아도 좋다. 이것은 당연히 기독교-가부장 자본주의에 기반한다. 심지어 지식인들은 이 혐오를 공고하게 하는 교묘한 담론을 생산중인데, 이 부분은 여기서 논할 수가 없으니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쓰겠다.

사례들 중 일부만 언급했을 뿐이지만, 트럼프의 승리가 혐오를 공격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번 선거처럼 소수자들이 “과녁”으로, 또는 “먹잇감”으로 마구 내던져진 선거가 또 있을까. 이를 우파 포퓰리즘이라고 불러도 좋고, christo-fascism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예전의 파시즘이 인종주의 없이 불가능했다면, 지금의 파시즘은 인종주의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트럼프의 승리는 “이민자 혐오 + 여성/트랜스 혐오 + 계급적 분노”를 밀착시킨 결과다.

이에 대한 대안을 논하는 데 있어서, 앞의 두 가지를 삭제하고 오직 “계급적 분노를 해소(?)”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옳을까? 그것이 과연 모두의 해방을 가져올까? 대체 어떻게 모두의 해방을 가져올까? 자본가-노동자의 관계가 모든 지배-피지배 관계를 설명하나? 아니면 이민자와 트랜스와 여성은 그저 계급적 분노를 부추기는 데 “동원”되었을 뿐이라서? 그래서 폭력은 부차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효과를 위해 전선을 단일화해야 하기 때문인가? 경제적 문제가 우선시되는 것이 당연해서? 이민자 문제는 일단 뒷전인가? 여성이나 트랜스는 당연히 뒷전이고? 정말 그런가? 왜 함께 얘기할 수 없나? 진정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함께 논할 역량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입장은 “먹사니즘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뒷전”이라는 기득권의 입장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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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유엔 총회 제3 위원회, 러시아가 제안한 '나치즘과 신나치즘 찬양의 방지'에 관한 결의안 채택. 116개국 찬성하고 54개국 반대, 11개국 기권한 가운데, 한국은 '자랑스럽게도' 반대한 54개국에 속했다고 한다. 나치든 신나치든 찬양하는 것 막아야 하는데도 그것을 반대하다니, 한국 부끄러운 나라다. 조선은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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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어린 시절 이웃이나 동무 가운데 가끔 불상사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들은 적이 있다. 중학 1학년 같은 반의 한 동무는 여름 방학이 끝난 뒤 나타나지 않았는데 멱감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향 마을에서 산 넘어가면 걔네가 살던 곳 근처 저수지를 멀리서 볼 때면 동무가 거기서 죽지는 않았을까 근거 없는 추측을 한 적이 더러 있다. 더 어린 시절 아랫동네의 한 청년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때는 그를 위한 굿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구경 가서 누군가가 울면서 흰 천을 가르고 나아가는 것을 본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런 의식을 천도굿으로 부른다는 것은 커서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자살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는데 대개 여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0년대 초 이전 전근대 농촌에서 여성이 죽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다. 하나는 나무에 목매달아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이다. 누가 스스로 죽고 나면, 무슨 산의 어느 골짜기 소나무에서 광목천으로 목을 매달았다느니, 누구네 논 웅덩이에서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여성이 죽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는 것이다. 어릴 적 논 웅덩이를 지날 때면 고무신이 있는지 버릇처럼 살피곤 했다.

고향마을에는 ‘정신 나간’ 여성도 두엇 있었다. 그들이 시집오기 전 이미 광기를 드러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증상이 발현된 곳이 고향마을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질환에 내 고향의 무엇인가가 한몫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전근대 농촌의 자살자와 정신질환자가 대체로 여성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듯싶다. 고향의 경우 맨 아랫마을에는 신체 부자유, 가운데 마을에는 언어 장애, 맨 위 마을에는 정신질환을 보이는 사람이 자주 나온다는 말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런 점도 우연이었던 것 같지 않다. 내 기억으로 신체 부자유와 언어 장애를 지닌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정신질환을 보인 사람은 자살자와 더불어 대부분 여성이었다. 질병의 사회학 견지에서 보면 그런 상이한 증상들은 전근대 한국 사회의 성역할 구분, 남녀불평등 구조 등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에 농촌으로 시집온 여성은 대개 엄청난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꼭 고무신 벗었던 것도 그런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전통 생활 습관에서 신발을 벗는 행위는 어느 한 공간에서 다른 한 공간으로 들어갈 때 일어난다. 세상을 하직하는 여성이 고무신을 벗은 것은 생전에 당했던 수모와 억압, 고통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자살을 포함한 죽음은 사회적 성격을 띤다. 이전의 농촌에서는 자살하는 일이 사실 많지 않았다. 살인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은 어떤가? 2000년대 이후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자살률은 매우 낮았던 편이다. 자살률이 갑자기 높아진 이유는 무엇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엄청난 사회적 위기를 겪은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20년대에 들어와서 약간 낮아졌으나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남녀자살률에서도 반전이 생겼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은 남성이 훨씬 더 많다. 2022년을 기준으로 하면 남성 자살률(35.3명)은 여성(15.1명)의 2.3배에 달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화한 결과 남성이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여성 차별, 성 불평등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자살의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 옛날에 자기 목숨 끊던 여성들이 남긴 것이 오직 고무신 한 짝이었다면,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1990년대 이후라고 여겨진다. 일가가 자동차를 탄 채 저수지 등에 빠져 죽는 경우가 간혹 보도되곤 했다. 자살할 때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죽는 경우가 생긴 것도 새로운 현상에 속한다. 그리고 최근으로 올수록 자살의 이유로 경제적 원인이 언급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전에는 굶어서 죽는다는 말은 있어도 가난해서 자살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오늘날은 가난이 자살의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빚일 가능성이 크다. 그 점을 말해주는 것이 자살률은 부채의 증가에 비례해서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자살률이 급증한 2000년대 이후 가계부채도 급증한다. IMF 위기가 닥친 1997년 한국의 가계신용은 GDP 542.0조 원의 39.0%인 211.2조 원으로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2009년에 776조 원으로 GDP(1,255.3조)의 61.8%로 커지고, 2010년대 이후 더 급속하게 늘어나서 2015년 1,203.1조로 GDP(1,740.8조)의 69.1%, 2020년 1,726.1조로 GDP(2,058.5조)의 83.9%, 2023년 1,885.5조로 GDP(2,401.2조)의 78.5%가 된다. 부채의 이런 증가와 자살률의 증가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작용하는지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두 지표가 동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두 현상 간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충분한 정황 증거로 여겨진다.

자동차를 일가 자살의 도구로 삼거나 아파트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는 일은 나무에 목매달거나 웅덩이에 빠져 세상을 하직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사람들이 목숨을 끊는 것은 세상 살기가 어렵기 때문일 테지만 그 어려움의 시대적 차이가 커 보인다. 옛날에 사는 것이 어려워 죽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세상 하직할 때 남길 수 있는 재물은 매우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목매달거나 웅덩이에 빠져 목숨 버리던 여성들이 고무신 한 짝 달랑 남겼을 뿐이었던 것도 그런 점을 말해준다.

오늘날은? 저수지에 자동차 타고 들어간 일가,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의 경우 상당한 자산을 남겼을 공산이 크다. 자동차가 있으면 거주하는 주택이 있을 것이고 그 안에 가재도구며 가전제품, 전자기기 등 상당한 재물이 있을 것이다. 아파트 건물에서 몸을 던진 사람은 아파트가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점은 오늘날 가난한 사람은 이전의 가난한 사람과는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에는 가난하면 자산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은 가난해도 자산이 많을 수 있다. 아파트와 자동차, 그리고 다른 여러 물품은 모두 자산에 속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니 바로 자산의 구성이다. 자산은 자기자본 더하기 부채로 이루어진다. 빌라나 아파트, 자동차, 냉장고·세탁기·텔레비전 등의 가전제품, 스마트폰·PC 등의 통신기기 등 다양한 상품들을 생활수단으로 신용 구매하며 지게 된 부채가 자신의 순수입보다 더 많으면 자산이 아무리 많아도 빚밖에 없다는 말, 살기가 팍팍하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부채를 짊어지게 된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 역사적으로 최근의 현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를 지배해온 지난 수백 년 노동자가 빚을 지는 일은 드물었다.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신용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은 대부분 빚진 상태가 된다. 한국에서 금융화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으나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로 인해 IMF 구제금융을 받으며 긴축경제가 실시되는 등 신자유주의의 사회 지배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했다. 이전에는 문턱이 높아 접근하기 어렵던 은행이 그때부터 일반 개인과 가계를 상대로 대출을 늘린다. 일각에서 ‘금융의 민주화’로 부르는 그런 조치로 지금 수많은 개인과 가계가 부채로 허덕이고 있고,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자산 효과’라는 말이 있다. 보유한 자산의 가치 또는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이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고 여기고 소비를 더 많이 하는 현상을 가리킬 때 쓴다. 빚이 많아도 자산은 증가하기 때문에 크게 빚진 사람도 자산 효과를 누리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하고, 상층의 극소수는 부유해지는 데 반해서 하층 대다수는 가난해진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이 부자인 양 행동하며 여간해서는 소비를 줄이지 않거나 줄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삶의 모습이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가 지난 11월 4일 국회에서 그동안 자당이 제안해온 금융투자소득세법을 폐지하려는 정부 여당의 방침에 동의하겠다고 말했다. 1,500만이나 되는 주식투자자의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이유라고 한다. 1,500만 명이면 2024년 6월 기준 경제활동인구 2,976만 명의 절반보다 많다. 사람들이 주식에만 투자하는 것도 아니다. 부동산, 펀드, 채권, 외환, 가상화폐 등의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1,500만 명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 투자자가 운용하는 자산의 많은 부분은 부채라고 봐야 한다. 2023년 국민대차대조표를 보면 (1975년에는 2.8조 원에 불과하던) 금융자산이 물경 22,899.4조 원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부채가 그중 21,854.6조 원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지금 여야가 금융투자소득세법을 폐지하겠다는 것은 사람들더러 금융자산 늘리는 일을 계속하라고 부추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1,500만 주식투자자가 금융자산을 늘리는 것은 부채를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부채를 늘리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보면 주식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금융투자소득세법을 폐기하려는 정책은 사람들을 부채의 늪에 빠뜨리려는 심산에서 나온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채의 늪에 빠져 절망적으로 되면 자살에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가계부채가 급증한 시기에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해준다. 여야는 금융투자소득세법 폐지에 합의하면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기는 했을까. 법의 폐지는 주식투자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운용하는 금융자산의 규모를 키울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럴수록 금융자산에 포함되는 부채의 규모도 커질 것이요, 갈수록 더 많은 부채를 짊어질 사람의 수도 늘어날 것이다. 부채의 늪에 빠지면 자살의 유혹이 가까워질 수 있다. 금투법을 폐지하자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야당의 제안은 그렇다면 자살을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망할 놈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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