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2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費而隱.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일개 부부의 어리석은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일개 부부의 못난 수준에서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은 오히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에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그 실마리가 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
2.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君子之道 費而隱)." <중용>을 최초로 읽었을 때 가장 감동을 받았던 문장입니다. 사실 이 한 문장으로 중용은 끝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부연 설명은 사족에 지나지 않지요.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차별을 단박에 부수는 압권입니다. 명시적 질서와 암시적 흐름을, 거시 구조와 미시 운동을, 천지 거래와 부부 소통을 한 눈에 꿰뚫는 비수입니다. 대칭과 모순으로 이루어진 우주 이치를 역설로 통합하는 초절정고수의 일식(一息)입니다.
이 말을 色卽是空으로 바꾸면 세존의 깨침이 되고 疎而不漏로 바꾸면 노장의 통찰이 됩니다. 사상의 심오함이나 사유의 자재함에서 공맹(孔孟)이 노석(老釋)에 못 미친다는 말은 통속적 편견일 뿐입니다. 문명에 직접 발 담그지 않는 언어가 문명을 빚어가는 언어보다 영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실천을 염두에 둔다면 세련미가 덜한 표현이 동원력 면에서는 더 우월할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중용>의 중용다움은 "압도하되 제압하지 않는" "평범한" 어기(語氣)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을 설파하는 언어 자체의 중용이 아닐까요? 어눌함에 실린 탄탄함!
3. 사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중용>은 우뚝 솟은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해석가들이 이 영광의 빛 아래서 멈춰 섭니다. 그러나 세계가 대칭/모순구조로 이치를 삼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결코 구조만이 아닙니다. 세계는 운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운동을 위해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동은 찰나찰나 대칭구조를 깨뜨림으로써 그 역동성을 유지 확산해 갑니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역설로 통합한다는 말이 바로 이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깨뜨림으로써만이 역설적 통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즉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허다한 지성들이 구조의 신비에만 주목한 것이지요.
이런 오류는 앞서 말씀드린 바, "명사적 독법"에 함몰된 교과서적 '먹물'들이 반성 없이 답습한 해석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중용을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읽는 마음결로 여기 "費而隱"을 보면 역시 隱을 동사로 읽으면서 그 방향으로 강조하게 됩니다. 은밀이라는 명사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지시하는 형용사도 아닙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단호한 결단이 전제되는 실천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앞장의 遯世不見知而不悔와 같은 맥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중용의 도가 실로 위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최고의 덕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삼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감춤으로써 "평범함"에 깃듭니다. 전 우주적 보편성을 가진, 그래서 편재성을 지닌 위대한 덕이 사소한 일상으로 내려올 때 진정한 중용이 이루어집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동사의 의미는 큰 덕을 작은 일의 수행에도 적용한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 <간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양이 다리를 다쳤다며 들어오자 간디는 동일한 진지함을 유지한 채 양 한 마리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납니다. 조국의 독립과 양 한 마리 치료, 이 엄청난 대칭! 간디는 큰 일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춥니다. 그리 함으로써 위대함과 사소함의 대칭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신약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일에 충심을 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심을 다한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費而隱을 명사적 독법으로 읽으면 실천적 의미가 명상 범주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야 개인과 사회 모두를 이끄는 실천덕목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중용>은 잘난 인간을 위한 처세훈을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소수의 잘난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허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 세상을 망치는 저 오만한 상위 1%의 제후적 독선에 맞서는 견결한 저항전선이 바로 오늘의 중용입니다. 甲男乙女의 겸손한 연대로 대동세상을 일구는 평범무비의 소통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뿐입니다.
4.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부부와 성인을 대비시킨 점입니다.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켰다면 아무도 그 자연스러움에 토를 달지 않겠지요. 하필 왜 부부일까요?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 匹夫匹婦의 소통이 모든 인간관계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이는 너무나 보편적 진실이라서 오히려 늘 묻혀 지고 말지만 적어도 부부 개념에 앞선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여기 부부 언급은 하등 의아할 게 없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의 핵심은 사랑이고 다시 그 사랑의 핵심은 성적인(sexual)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성교야말로 인간 존재 자체와 소통의 발원이자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sex)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자어 중 이 性 자 만큼 위대한 쓰임새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의 성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실 성적인 수치심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나 성교를 감춤/드러내지 않음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좀 더 내밀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존재와 소통의 시원을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지요.
다른 것도 매한가지 입니다. 숨 쉬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어나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교는 이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므로 더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권력, 돈 , 지식처럼 드러낼 경우 아마도 인간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대놓고 性을 권력, 돈, 지식 문제와 결합한다면 가장 잔혹한 억압체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아주 하찮게, 아주 조용히 말하지만 부부는, 부부의 性은 중용의 요체이자 뇌관입니다! 그래서 성인도 알 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5. 가만히 보면 이 장에 또 하나의 개념 顚覆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인과 군자의 구별입니다. 앞장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군자 개념이 성인의 상위 개념입니다. 여기 군자는 중용의 완전성을 전제한 요청적 개념이고 성인은 부부와 대비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전복은 자못 의미심장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형식에 따라 내용을 보면 중용이 일개 부부, 즉 匹夫匹婦라도 알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성인조차 알고 행하지 못하는 광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간의 강조점은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런 이의제기를 뒷받침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입니다. 제12장 전체 문맥에서 보면 매끄럽지 못한, 불쑥 끼어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입니다.
군자의 언어를 천지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중용의 실천적 측면,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마치 장자나 불경의 과장된 초거대 담론적 수사를 보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이해가 잘못일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 식 이해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을 양보 문장으로 봅니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중용의 이치를 그렇게 추상화, 신비화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매가 날고 땅(못)에는 물고기가 뜁니다. 천지 일은 그냥 그러합니다. 중용 또한 천지간 일일 뿐입니다. 중용의 최고 경지가 신비 차원까지 올라가서 그런 게 아니고 부부의 性처럼 구태여 드러낼 일이 아닌, 그러나, 아니 그래서 정녕 숭고한 것이기 때문에 성인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라고 이 문제, 즉 性을 더 고상하게 알고 행할 리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용 또한 이와 같습니다. 아니 바로 군자의 도는 匹夫匹婦의 性, 그 평범하고 사소한 소통으로 영원 회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