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은 모든 인간정신의 터전이며 가장자리다.

감정은 感知감성이다.

이성은 理智감성이다.

의지는 意志감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 세 시 홀연히 일어나 스마트폰 이메일을 연다.
우울장애 앓는 이와 강박-공황 결합장애 앓는 이가 보낸 글이 와 있다.
이 새벽에 읽으라고 일부러 보낸 것이 아니기에 나는 읽는다.
마음 다해 그 사연과 얽혔다 풀어진다.
인연이란 이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열렬한 삶만

곡진한 거 아니다

숨 죽이며

눈치 보며

멍 때리며

견디디견딘, 그

낮은 체온의 삶도, 한사코

곡진한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 그만큼이 전화기라는 사물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 쫑긋거림, 저편의 숨결까지 감지하고자 온몸을 기울이는 극진함이 살아 있는 세계. 문 저편이 침묵 중이라면 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의 말뿐 아니라 갖가지 사물과 동식물과 흙과 물의 말 앞에서도 좀 더 극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나무둥치 속에서도 물이 순환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그것이 나무의 말이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237-238쪽)


전문서적 아닌 책 한 권을 가지고 이렇게 달여 읽은 적이 없다. 하기는 달이려고 읽은 것이니 그럴 밖에. 마지막 장을 읽던 중이었다. 읽다가 문득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는 찰나 눈길 꽂힌 곳을 보니 책에 “꼬르륵”이라고 써 있다! 아.......물아일체. 아니, 이심전심.


이 작은 기적을 체험한 직후, 아니 그 결과, 나는 한바탕 펑펑 울고야 마는 사건과 마주했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물론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이지만, 고등학생의 유서 마지막 문장 을 본 것이다. 극진한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 목말라 마지막까지 투정부려 미안한데 물 좀 줘...


아, 이 얼마나 외로운 목마름인가. 대체 얼마를 울다가 뛰어내렸던 것일까. 처절한 엄마 그리움 어찌 하고 저리도 황망히 갔을까. 눈두덩이 새빨개진 채 침을 놓고 돌아다니는데 연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 아이 목마름의 절망이 내 목에 들어온 듯 울대가 뻑뻑하고 가슴이 아파온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말 끊어진 저승 넘어 그 아이 영혼이 지금 내게 와 오열하는 듯, 미소 지으며 등을 토닥이는 듯, 말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는 듯....... 나는 그 아이“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하는 비원(悲願)에서 “낮은 무릎”으로 이 하루를 보내려 한다. 이 어린 생명에 대한 예의로 오늘 이후 내 영혼의 휴대폰을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에 두기로 한다.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이 사람 사이 시공을 너무 좁혀서 오히려 세상은 아득한 소외로 갈가리 찢어진다. 지체 없이 말을 섞을 수 있어서 마음이 가려진다. 검색만 하면 생면부지 타인 신상을 죄다 털 수 있어서 정작 가까운 사람에겐 무지하다. 침묵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온갖 것을 부풀려 떠들어서 값 올리는 통에 인제 참된 가치란 찾아볼 수 없다. 인간 이외의 사물과 자연은 너무나 편리한 도구와 대상이어서 그들 내면의 풍성한 소리는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아니 우리 삶의 극진함을 먹어버린 휴대폰을 김선우는 김선우답게 와삭! 먹어버린다고 꿈꾼다. 그 맛있는 상상력이야 ‘천하시인’ 김선우의 몫. 나는 홀연히 휴대폰을 잊는다. 완전히 잃어버려서 새로 산 경우는 없지만 잊을만하면(!) 잊어버리고 빈손으로 다닌다. 그 빈손은 다른 생명과 사물에 내가 귀를 쫑긋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니.......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기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들이 있다.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볼 때도 그랬다. 기아와 내전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수단 남부로 들어가다가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 소녀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향해 그의 사진기가 셔터를 열었다 닫았을 때, 사진기 내부의 어두운 방은 얼마나 깊은 슬픔으로 몸을 떨었을까?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사진기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사진 속에 묻어 있다.”(221쪽)

 

 

 


고백하거니와, 실은, 나도, 아니, 나, 는 사진기다. “나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담 언어들이 있다.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상담 언어 속에 묻어 있다.” 그렇다. 나는 아픈 마음의 사진기다.


제대로 된 상담치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각하는 바다. 상담은 경청에서 시작된다. 경청은 나를 내려놓고 남을 듣는 거다. 남의 분노, 남의 슬픔, 남의 절망을 내 몸 온전히 열어, 내 영혼 온전히 열어 듣는 거다. 온전히 열어 들으면 내 몸이, 내 영혼이 놀란다, 떤다, 운다, 분노한다, 절망한다, 설렌다, 웃는다....... 이것은, 실로, 감염이다. 그러면서,


감염을 넘어선다. 넘어서는 순간 두 개의 자력이 대칭적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달려가는 연대의 방향, 융합의 힘이다. 다른 하나는 고통에 처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삶의 조건 전체를 냉철히 살피고 비판하는 자율의 방향, 독립의 힘이다. 온전한 치유가 되려면 이 대칭의 근본구도는 늘 유지되어야 한다.


이 대칭은 매순간 자발적으로 깨지면서 비대칭의 대칭, 그 기우뚱한 균형으로서 생명의 숨길을 열어간다. 언제 어떤 변화가 올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일방적으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더욱 아니다. 상담자가 깨어 있어 전체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순간마다 아름다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한다.


실제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선택의 순간이다. 회심의 선택이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망설이고 망설인 선택이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환자가 졸지에 발길을 끊기도 한다. 데면데면 대한 환자가 시절인연이 되기도 한다. 꿈같은 말이긴 하지만 길은 하나다. 늘 절박한 호흡으로 가는 거다. 그렇지만,


.......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 삼 개월 후 케빈 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 발표 당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그의 자살과 얼마나 연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도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통 앞에 함부로 돌멩이를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이들의 작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연대와 보호의 실천이 시작되곤 하므로.”(221쪽)


그 현실에 내재한 ‘진실’은 본인을 제외한 상태라면 누구도 알지 못 한다. 알지 못 하는 상태에서 이른바 ‘사실’에 터 잡아 바른 말이랍시고 해댄 결과가 한 사람, 더군다나 감추어진 진실 속의 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이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어떤 순간이든, 그가 누구든, 자기 “....... 앞의 생으로 오는 것들은 언제나 절박한 호흡으로 온다.”(198쪽)


설혹 일부 언론이 보도하듯 케빈 카터가 퓰리처상에 ‘필 꽂혀’ 소녀의 생명을 잠시 등한히 했다 하자. 그러나 그는 전쟁과 기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통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 사람이다. 그의 “작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연대와 보호의 실천이” 시작되었다. 한 마디 말로 단언할 수 없는 진실의 모순이 있다.


상담의 찰나마다 나는 이런 모순, 그 이율배반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나누는 치유적진실의 도구가 말이니 말이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 말로 치유 받고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여럿 있다. 하지만 똑 같은 내 말에 상처 입고 쓰러진 사람 또한 여럿 있지 않을 것인가? 화급히 심장에 손을 얹는다. 아앗(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