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3장 본문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그 다음은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한 부분에 지극하면 誠이 있을 수 있다. 정성스러우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며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化)한다. 오직 천하의 정성스러움만이 化할 수 있다.  

 

2. 여태까지 기초적 본문 읽기는 이기동 역(譯)을 따랐지만 구체적 내용에서는 명사적 독법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제 나름의 이해를 펼쳐 왔습니다. 이 장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번역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치곡(致曲) 문제입니다. 주희가 曲을 '모퉁이'라고 했다는군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기동은 '한 부분‘으로 읽어 致曲을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극한 誠이 어려울 때는 차선으로 한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주희 식 명사적 독법입니다. 저는 曲을 '곡진하게 (행) 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이든 한 부분이든 그 것을 명사로 읽으면 치곡능유성(致曲能有誠)이 아니고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 한 본문을 설명하기 궁합니다. 그리고 본문 맨 앞에 있는 기차(其次)를 보면 이 장이 바로 앞장인 제22장과 문맥상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 장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盡)은 여기의 曲이고, 화육(化育)은 여기의 化입니다.   

 

3. 곡진하다는 말은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므로 자연스럽게 誠과 연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曲能有誠인 것이지요. 誠에 진정성을, 간절함, 섬세함을 부여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曲입니다. 曲으로 표현된 誠은 치밀한 과정을 밟아 至誠으로 나아갑니다.  

곡진하게 誠의 실천을 통해 중용적 삶의 얼개를 그리는(形) 것이 첫 번째 과정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중용의 도에 정향(定向)하는 일일 것입니다. 선택하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순간들이 모여서 그 방향과 테두리를 잡아 갈 것입니다.  

 

그  윤곽에 내용을 채워 확연하게 드러내는(著) 과정이 그 다음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은 자랑한다거나, 무기로 삼는다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천의 열매들이 무르익고 쟁여져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쳐나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도리를 명쾌하게 꿰뚫는(明) 과정이 세 번째 과정입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에서 오는 이른바 증득(證得)입니다. 몸으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行知로써 세상사는 이치를 밝히는 일은 다만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중용의 위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과정은 거침없이 大同을 향해 움직이는(動) 단계입니다. 밝히는(明) 목적은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용이 구가하는 사회동원력이 바로 動 한 글자에 실려 있습니다.  중용은 결코 책상머리 놀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꾸는(變) 다섯 번째 과정으로 진입합니다. 움직이되, 나아가되 혁파가 없다면 무의미합니다. 승자와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악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특별하고, 잘난 소수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으로 들리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마침내 大同으로 질적 전환하는 화(化)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저 舜이 이룩한 세상, 온 생명이 평등하게 상호 소통함으로써 함께 자유롭고 더불어 평화로운 누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세상의 꿈을 간직한 곡진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둠을 뚫는 촛불이 되어 중용천지를 만들어 갑니다.  

 

4. 우리는 오늘날  반중용적 헤게모니 블록이 대놓고 권력을 사유화함으로써 무참하게 중용천지가 도륙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의 손과 발이 되어 반중용의 폭거를저지해야 할 사람들이 곡진한 실천을 통해 나라의 앞길을 닦지도 않고, 꿰뚫고 나아가 악을 혁파하지도 않고, 결국 새 세상을 만들지도 않으면서 입만 열면  백성 위한다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슬픈 마음으로 저 오만방자한, 또는 입만 살아 있는 엘리트들이 變하고 化하기를 빌고 있어야 할는지요....... 정녕 이제는 우리 백성이 사화산 되고 만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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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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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Keep Going인데 왜 번역자는 '그래도'를 덧붙였을까? 사실 이 의문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저자가 북미대륙 원주민 전통의 사유 세계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도 이 의문은 든든한 근거를 지니게 됩니다. 영어로 된 것을 읽어 보지 못해서 책 본문 어딘가에 '그래도'란 표현이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그들의 정신 속에는 '그래도'가 없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문제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란 말을 구태여 넣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까닭에 수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갈 수 없을 만큼, 또는 그러기 싫을 만큼 고통스런 상황임을 전제하고 있는 어법이거든요. 그리고 이 전제는 일반적으로 그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시 전제합니다. 결국 고통 자체와 고통에 대한 부정적 판단의 이중 장벽 때문에 사실은 계속 가라고 할 수 없음에도 가라고 한다는 뜻에서, '그래도' 가라고 한 것이지요. 누구든 이런 맥락에 선뜻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늙은 매'를 화자로 해서 펼쳐지는 저자의 사유 지평은 인생사, 아니 세계 전체의 양면성 또는 대칭성을 알아차리는 것에 근본적으로 터 잡고 있습니다. 이 양면성 또는 대칭성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구체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한 가치가 결코 완전 분리된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고 환희만 좇으려 해도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됩니다.  이치로 보아 그렇게 해도 결국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진정한 환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고통 자체를 환희로 받아들이는 고행주의나 매저키즘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환희는 완전히 쪼개진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개진 하나도 아니거든요. 

이런 이치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  '그래도'란  수식어는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어서 저자의 사유를 현저하게 비틀거나, 적어도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번개처럼 우리에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접속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빙고! 리듬까지 맞추자면 "그러니"도 좋겠지요. '그래도'가 고통과 환희의 불연속성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이라면  "그러므로"는 양자의 연속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치상 연속성은 불연속성을 포함(包含 아닌 包涵)하기 때문에 훨씬 더 궁극적인 관계지음입니다.  

요컨대 뭔가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해 덧붙임 말을 넣으려 했다면 "그러므로"가 나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러므로 계속 가라"는 표현은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나 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이런 책을 왜 보겠습니까. 어차피 이런 책이 필요한 사람은 깊은 고통 속에 빠져 있거나, 뭔가 일이 안 풀려 힘을 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 상황 자체 속에 답이 있다, 즉 고통을 통해 환희를 깨닫고 강인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데는 "그러므로"야말로 기품 있는 '임팩트'가 아닐까요?   

 '그래도' 계속 가라, 이는 이른바 긍정주의, 즉 '고통은 없다 치고' 가라 하는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나마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세계의 전체적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도저한 진실, 더 나아가 '그래도'와 "그러므로"를 분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따스한 진실을 향해 옛 생각 거적을 훌렁 벗어 던지고 한 번 가보시지요.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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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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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표지 그림이 제 살갗을 날카롭게 찢어놓습니다. 섬뜩하달 수도 있겠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이없달 수도 있겠고....... 비둘기로 보이는 새 한 마리에게, 얼핏 보면 총을 겨눈 것 같지만, 실은 총이 아니라 눈을 겨눈 것 같은....... 아무튼 책의 내용을 짐작하도록 이끄는 그림임에 틀림없습니다. 

2. 저자의 인생행로가 고스란히 투영된 관점, 내용을 지닌 책입니다. 심리학을 떠났다가 심리학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진보적 사회운동 경험이 무르녹은 것이지요. 하여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거의 모든 심리학 책들이 자연인으로서 개인을 화두로 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풍조는 심리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 전반의 주류적 사유 프레임이지요. 이렇게 보면 결국 심리 문제의 해결 또한 그렇게 자연적 개별화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일정 부분 맞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부분은 오류입니다. 언제나 열린 지평을 지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저자는 IMF 경제위기라는 특정 사건을 논의의 기점으로 삼습니다. 엄청난 사회적 트라우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깊고 내밀한 곡절이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IMF 경제위기를 야기시킨 사회체제와 전략,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절망적 한계, 이후 펼쳐진 우리사회의 추악한 면면들은 어찌 보면 IMF 경제위기라는 상징을 만들어내기 위한 앞뒤 조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사회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외피 안에 발톱을 숨긴 헤게모니 블록의 탐욕 기제가 작동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쩌다 실수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획된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이는 음모론의 제기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요즘 들어 저들이 대놓고 도적질하는 꼴을 보면 명약관화하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저자는 헤게모니 블록의 이런 전략이 만들어낸, 불안을 증폭시키는 심리 코드 아홉 개를 제시합니다.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 이것은 아마도 어떤 연역적 틀이나 패턴을 전제한 연구 결과가 아닐 것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삶이 일구어지는 구체적 현실과 정황에서  일일이 찾아낸 것일 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박하고 거침없는, 일부러 다듬지 않은 거친, 가령 속어적 표현까지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구어체적 언변으로  우리사회의 어둠을 거의 총망라하여 까밝히고 있읍니다.  기존의 주류 심리학 책들과 전혀 다른, 역동적이고 대승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4.  책을 읽으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두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점진적 자살 문제. 임상의 실제에서 미처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그래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던 부분이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미래의 주체들이 형성하는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또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오래 전부터 궁굴려 온 화두입니다. 때마침 저는 그 화두를 깨치기 위해 제 인생행로를 바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제 삶의 모습이 드러날지 자못 궁금합니다.  

5.  21세기 첫 10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사회에 속한 나를 고요히, 그러나 곡진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한 권의 책을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류) 심리학자들에게 던진 고언(苦言)에 동의 백만 제곱하고 아무쪼록 저자가 바라는 일이 현실로 일어나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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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남의 性을 다할 수 있고 남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며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 흔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이 훌륭하면 그에 걸맞는 행위가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지 않은가에 대한 선험적 구별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실천을 보고 나서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관념이나 지식이나 자세는 아직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至誠), 온 힘을 다한 선택만이 자기 본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실천하지 않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을 거절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중용의 이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이렇게 실천의 자리에만 자신의 본성을 매겨 넣어야 타인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참 소통은 실천의 소통입니다. 실천으로 관통하고 실천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 인식의 통합이 꽃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천의 연대가 바로 사회적 본성입니다. 중용의 사회적 본질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인간사회가 중용의 이치를 담는 최종적 그릇은 아닙니다. 인간 아닌 존재, 그것이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지나는 모든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중용은 생태학적 지평을 획득합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눈에 띄지 조차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 돌 하나,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그들 모두도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세계가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유아적 허상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마주한 주체이며, 소통의 동등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방적 제압, 착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야(化育) 합니다. 서로 경이로움을 향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그 존재 가치를 맘껏 펼쳐야 합니다. 이 경지가 大同입니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 되는(與天地參) 궁극의 차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초월명상이나 면벽참선에서 일어나는 신비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의 부단한 확산, 치열한 선택의 무궁무진한 증폭을 통해 그리 되는 것입니다. 至誠에서 與天地參에 이르는 길가에 신비주의와 관념론이 더러 꽃으로 피어 우리를 잠시 쉬게 할 수는 있으나 여독이 풀리면 이내 일어서서 다시 걸어야만 합니다. 몸이 지나가지 않는 여정은 다 헛것입니다.   

 

3. 함께 살아야 할 인간 외 생명, 나아가 우리 모두의 삶의 근거이자 조건인 생태계 전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무서운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들이 승리하고 저들이 독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비는 선악을 따지지 않고 내리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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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1장 본문입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의 작용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교(敎)의 효과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2. 치열한 실천을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타고난 본디 작용(性)입니다. 이치를 깨우쳐서 적확하게 실천하는 것은 가르침(敎)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실천할수록 명쾌하게 깨달아지고 꿰뚫어 알수록 옹골차게 실천하는 법입니다. 인식과 실천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둘입니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誠을 한사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적 자세 정도로 묶어두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誠을 철저히 동사적 의미로 읽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정성스러움, 성실함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내포를 넘어 적확하고, 어김없는 실천의 뜻까지도 담아낸다는 말입니다.  

 

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라하든 '밝아진다.'라고 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明은 선택과 결단에 의거한 인식 추구 행위입니다. 따라서 억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을 지니는 것 자체가 이미 실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억압이 합리화된 사회일수록 인식의 전환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한 때 반독재 투쟁에서 전설적 실천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의 환원을 통해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은 그 자체로 벡터적 동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그들이 변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바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잃어버린 10년" 운운 하는 자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설혹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바꾼 주체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어떻게 그 열매는 독식하려 드는 것인지 그 심사를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明은 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한결같은 실천 안에서 明은 明입니다. 誠은 明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제 방향을 잡은 인식 안에서 誠은 誠입니다.  

 

3. 일전 송년 모임에 갔는데 뜻하지 않게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한 친구와 가벼운 설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서 현직 대통령은 신 대하듯 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와 지식은 죄다 일방적 홍보에 의존한, 한 방향으로만 줄을 선 것들이었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소주 한 잔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 하고는 이야기를 접었습니다.  

 

“찬 소주 한 잔 하고 정신 좀 차려야겠구만, 자네!”     

 

돌아오면서 그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깊은 좌절감이 느껴졌습니다. 늘 훈계조에다 단정적인 어법으로 자신의 배타적 인식과 실천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하는 사람들에게 誠과 明의 선순환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사람들의 세상을 어떤 지혜와 인내로 살아내야 할지, 연거푸 들이켠 술 때문에 몸은 흔들리는데, 정신은 명료해지기만 하고, 어허,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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