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6장 두 번째 본문입니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愈也久也.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成辰繫焉 萬物覆焉.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之.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生焉 財貨殖焉.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지의 도(道)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유원하고 오래 지속된다. 지금 하늘은 곧 밝고 밝은 것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무궁함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이 그것에 덮이어 있다. 지금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화산(華山)과 악산(嶽山)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함이 없고 강과 바다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새지 않으며 만물이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지금 산은 한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광대함에 이르러서는 초목이 거기에서 자라고 금수가 거기에서 살며 보물들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지금 물은 한 술씩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물고기. 자라가 거기에서 살고 재화가 거기에서 불어난다.  

 

2. 이 문단 해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부분을 앞 문단 내용에서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이 문단에서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문맥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풀어 보겠습니다. 중용 실천을 하는 주체와 그 실천을 통해 일구어지는 새 세상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중용 실천자가 주체면 새 세상이 객체다, 이런 논리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체면 서로 주체이니 대상화, 즉 물화될 그 무엇은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주체의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무한 연쇄로 일어나는 한, 둘로 나눌 수 없는 게 이치다, 이런 말이지요. 중용 실천의 집단성, 공동체성, 사회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측(測)은 근본적으로 예측한다는 의미를 썩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리학적 진실부터 이야기하지요. 만유인력을 계산하는 뉴턴의 공식이 있습니다. 만유인력 상수에다, 물체들의 질량 곱 값을 물체들 사이 거리 제곱으로 나눈 몫을 곱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공식은 두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타당합니다. 그리고 세 개 이상의 물체 사이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주에서 멈춰서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두 물체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뉴턴의 공식은 특수 상황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이론 모델일 뿐입니다.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무수한 소통을 무언가 도구를 써서 측정한다는 것, 나아가 예측한다는 것임에랴.......   

 

더군다나 서로 주체성의 무한 확장으로 넘실거리는 중용 세상이고 보면 측정, 예측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도구화하여 구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도덕적 측면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測은 분리를 전제합니다. 測은 누군가를 대상화, 사물화 해야 가능합니다. 천지의 도리에서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3. 그러므로 사소함의 평등한 상호 소통이 모여 위대함이 됩니다. 그 위대함은 사소함의 위대함입니다. 그 사소함은 위대함의 사소함입니다. 天, 地, 山, 水, 그 어디에도 이런 도리의 예외는 없습니다.  

 

4. 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종교 갈등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를 마귀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이른바 "땅 밟기" 등 몰염치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헌데 그 문제점을 지적을 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일부다." 즉 다 그렇지는 않다는 이야깁니다. 말인 즉 맞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게 참으로 진정성을 지니려면 그들 중 누군가는 그런 행위를 말렸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서 "안 그런 사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그런 행위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백 사람이고, 백 사람이 만 사람입니다. 허무맹랑한 測질, 즉 분리는 자기기만일 따름입니다.    

 

정반대의 예를 들어보지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으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직 김연아 한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온 백성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뿌듯해할까요? 아사다 마오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울까요? 앞 이야기의 논리라면 일부, 아니 한 개인의 일일 뿐인데....... 좋은 일이면 함께 묻어가고 나쁜 일이면 따로 떼내버리나요? 참으로 가소로운 논리입니다. 중용은 준엄하게 말합니다. "분리하지(測)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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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첫 번째 문단입니다.  

 

故 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愈遠 愈遠則博厚 博厚則高明.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愈久所以成物也. 博厚配地 高明配天 愈久無疆.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함은 쉼이 없다. 쉬지 아니하면 오래 지속되고 오래 지속되면 효험이 나타나고 효험이 나타나면 유원해지고 유원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넓고 두터운 것은 물(物)을 싣는 것이고 높고 밝은 것은 物을 덮는 것이며 유구한 것은 物을 이루는 것이다.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이 되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이 되며 유구함은 끝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나타내지 아니해도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가 없어도 이루어진다. 

2. 실천 중용이 구체적으로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 신호와 에너지를 전달해 나아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다함이 없는 법입니다(無息), 중단하지 않는 법입니다(不息). 늘 깨어 있으면서 시간과 함께 단련되어 갑니다(久). 물이 흐르기를 멈추면 썩는 것처럼 "이만하면 됐다" 하고 주저앉는 순간 기득권 의식이 독으로 자라납니다. 시간의 물결에 늘 씻기면서 실천은 더욱 더 퍼들퍼들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후패하지 않아야 살아 있는 깃발이 됩니다(徵). 다함없는 실천은 그 자체로 증거이자 징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며 깨닫게 하는 신호입니다. 굳센 에너지가 되려면, 경쾌한 파동이 되려면  시간 속에 살아 펄럭여야만 합니다. 

그 깃발이  펄럭여  아득히 먼 데까지 표지로 작용합니다(愈遠).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지평선 저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푯대가 되어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걸어갈 용기를 줍니다. 참 실천은 반드시 또 다른 실천을 낳는 법입니다. 

그 실천의 아득한 파장은 점점  멀리 퍼져 나아가고 겹겹이 쟁여집니다(博厚). 참된 소통은 생명의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잠자던 생명의 감각이 눈부시게 살아납니다. 감각들의 공현(共絃)은 깊은 울림이 되어 서로를 감싸줍니다. 퍼지되 얄팍해지지 않고 깊어지되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생명력을 드높이고, 그 평등한 연대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高明). 중용의 자랑은 중용 실천자의 덕이나 경지가 아니고 중용 실천으로 드러나는 대동 세상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쌍방향 소통, 그 자체의 향기가 긍지입니다. 

3. 이처럼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4.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모 재벌 회장이 “한국 더 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전에도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정작 더 정신 차려야 하고 정직해야 할 장본인이 그런 말을 훈계조로 일삼아 하고 다니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게, 아, 정말 형언할 수 없이 모멸스럽습니다. 물론 저 자신, 더 정신 차려야 하고, 정직해야 하지요. 그러나 그 화두가 그에게서 비롯할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그 따위로 뻔뻔하게 말하기 전에 이미 뼈에 새기고 있는 각성입니다. 

중용은 자기 엄정성(無息)에서 출발하여 평등한 생명 연대(高明)로 나아가는 유기적 통합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대함으로써 백성을 억압하는 헤게모니 블록이 판치는 이런 사회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평범한 백성이 일으킨 작은 깨달음 하나를 귀하게 받들고 자신의 어줍지 않은 문제의식일랑 가볍게 여길 줄 아는 군자 나기가  이리도 어려운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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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5장 본문입니다.  

 

誠者 自誠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성(誠)은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자기를 인도하는 것이다. 誠은 물(物)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誠하지 아니 하면 物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物을 귀하게 여긴다. 誠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物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인(仁)이고 남을 완성하는 것은 지(知)이니 성(性)의 덕이며 안과 밖은 합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때에 맞게 조처하는 마땅함이다.  

 

2.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誠)은 내면의 힘에서 나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의 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스스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즐겁고 행복해서 관통하고 흡수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에게 겸손하게 청하여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일입니다.  

 

3.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사건(物)을 일으키고 마무리합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상호 소통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실천은 그 사건들의 생명주기와 함께 합니다. 사건의 주체이자 사건 그 자체의 불가분 일체입니다.  

 

4. 그러므로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소통의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사회와 자연과 절연된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5.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仁)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에게 부름 받아 규정됩니다. 그의 사랑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은 사건의 흐름과 방향을 알아차려야(知) 가능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실천에서 나오는 증득(證得)의 지혜입니다. 함께 흘러감으로 생겨난 슬기로움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일은 본질(性)에서 통합됩니다(合內外).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소통의 서정이며 알아차림은 소통의 지성입니다.   

 

6. 소통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시간입니다. 그 때 그 때 알 맞는 영양과 보살핌이 마땅히 있어야(時措之宜) 생명은 유지되고 확산됩니다. 생명은 다만 은총인 것이 아니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할 인연인 것입니다.    

 

7. 지금의 헤게모니 블록을 보면 仁도 없고 知도 없음이 확실합니다. 오직 탐욕과 그 것을 채워주는  공작적 정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밀어 붙이고 나중엔 오리발 내미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時措之宜와는 정반대의 길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저들이야 결코 오래가지 못하겠지만 나라가 회복 불능 상태로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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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4장 본문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芪龜 動乎四體 禍復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 至誠 如神.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앞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주역점)와 거북(거북점)에서 나타나고 몸에서 움직여진다. 화와 복이 장차 이를 경우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실함은 신과 같다.    

 

2. 온전히 적확한, 흐트러지지 않은 실천의 길을 가노라면 모름지기 예지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예지력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흐름을 공감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백성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다면 오늘의 마음 씀, 몸놀림을 보고 내일을 아는 일 또한 일상적 수준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백성의 선한 말, 바른 행동,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백성의 악한 말, 슬픈 노래,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징조란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하얀 구렁이가 나타났네, 돌부처가 눈물을 흘렸네...흥미롭기는 하나 그런 현상을 징조라 한다면 군자의 至誠으로 얻어지는  통찰력과는 실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인의 복서(卜筮) 행위는 자기 성찰이라는 정갈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고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이는 행위를 다만 앞날을 예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요,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에서는 사태를 통합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챙김의 역설적 일치에서 군자의 중용은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3. 이렇게 至誠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 명상을 통해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실천에서 증득(證得)되는 통찰력, 예지력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권력, 재물,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용으로 이룬 大同 세상에서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있을 뿐이거늘 무슨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까? 혁명의 기득권과 전리품을 내려놓고 밀림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가 바로 至誠의 화현이요 신입니다.   

 

4. 일전 주역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대산 선생과 인터뷰한 기사를 어느 일간지에서 읽었습니다. 그 어른께서 2012년에 어진 지도자가 난다고 하시더군요. 주역을 풀어 말씀하신 것을 중용적 실천에 따른 통찰력과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 가당한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예언을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지금 세월이 너무나 신산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거꾸로 된 생각이 더 큽니다. 왜 저 어르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역사의 한가운데서 백성의 각성을 이끄시지 않을까, 주역에 기대어 예언하는 게 주역을 배운 이들의 최상의 실천은 아닐 텐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그 어진 지도자가 누굴 말하는지, 아니 어떤 이를 세워야 할지, 말해야 하지 않을까.......이런 생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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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목길 부처다 - 이언진 평전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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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보았을 땐 그냥 지나쳤습니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라는 제목 때문이라기보다 이언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이었을 터. 아마도, 넌 또 누구냐, 뭐 이런  습관적 반응이었을 겁니다. 개나 소나 끌어다가 스타 만드는 풍조에 넌덜머리 난 무지렁이의 냉소적 반응이랄까, 아무튼. 

두세 번 지나다가 표지에 그려진 부처 인상이 운주사의 저 naïve한 그것과 흡사하단 느낌, 아, 물론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그 때문에 책을 펴 들어 보았습니다. 책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진부한 '간 보기'에서 몇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끌더군요. 중인이다, 박지원이 傳을 썼는데 최악이다, 이단적 또는 혁명적이다, 성속을 가로지른다....... 내면에서 슬며시 팔꿈치 하나 나와 옆구리를 찌르더군요.  

2. 조선 영조 연간 태어나고 요절한 역관 이언진은 시대를 앞서간, 그래서 그 시대와 불화한 천재입니다. 저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 그의 면모를 정리합니다. 

새로운 진리 구성 - 송시열이 구축한 사대적이고 매판적인 주자(朱子)주의가 초일극집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인간 평등을 주장했으며, 유불도의 공존을 통한 진리의 복수성을 인정했으며, 옛것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고 오늘의 가치를 창달하고자 했으며, 사서삼경 이외의 텍스트에도 진리성이 있음을 천명했고, 인간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새로운 주체 형성 - 양반만이 주체였던 시대에 그는 중인임도 주체임을 선언했으며, 도시 서민과 중인의 삶터인 호동(衚衕)을 자기 공간으로 삼았으며, 자기존중을 기한 항장(骯髒)한 주체였으며, 저항적 주체였으며, 성속을 가로지르는 주체였습니다.   

물론 그가 지닌 한계도 있습니다. 저자가 지적한 것은 인간평등에서 남녀평등이 빠져 있다는 점(하지만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평가가 썩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조선사회 전체를 더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3. 한 사람의 사상과 그에 다른 실천이 전천후적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붓다나, 예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사상과 실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그래서 비판하고, 심지어 비난하고 말자는 의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상과 실천을 오늘 우리의 자산으로 받고, 한계 너머의 것을 향도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언진을 읽을 때, 그의 삶과 사유, 그리고 실천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의 자리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상황과 요청의 빛을 따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가 자신의 진리 인식, 또는 사상을 대부분 시로 표현한 사실부터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이언진을 옹호하면서 숱한 종교경전이 시로 되어 있으며, 높은 선지식(禪知識)이나 거유(巨儒)들도  종종 시로써 그 깨달음을 나타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예에서 간과하고 있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 경전은 고대적 문헌전승이 구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문 형태를 띤 것이지 의도적으로 시 형식을 빌린 것은 아니라는 게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종교 경전, 선승이나 유자의 시가 깊은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언진의 사상처럼 저항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구약성서 시편에, 이황의 시조에 무슨 저항의식이 들어 있다는 것인가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로써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언진의 차별적 사상을 표현하기에 시라는 형식이 과연 적합한가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의 사상이 당대 주류 주자학에 터 잡은 수구, 또는 보수적인 것이라면 특별히 문제삼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는 이언진과 흡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당나라 유학파 엘리트 승려들이 왕실을 끼고 사상계를 장악하여 초일극구조를 확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주류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 진골 출신의 의상이었습니다. 그 의상과 대척점에 선 원효는 성골도 진골도 아닌 육두품(이하) 계열 사람이었습니다. 원효는 당을 통해 수입된 불교사상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자주불교의 날카롭고도 웅혼한 나래를 펼쳐 갔습니다. 의상의 사상은 화엄일승법계도 7언 30구 210자 시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의 사상은 최소 80부 150여 권, 최대 102부 303 권으로 된 방대한 산문 저작입니다. 대부분 소(疏), 즉 자세한 풀이의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상의 시와 원효의 소(疏)는 어떤 결정적 차이를 지닐까요? 의상의 시는 고도한 직관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압축된 큰 덩어리입니다. 원효의 소(疏)는 낱낱이 풀어 놓아 이해할 수 있게 한 작은 이야기의 네트워크입니다. 전자는 엘리트의 기득권을 지키는 신화적 암호입니다. 후자는 다수 민중을 어루만지는 역사적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의상은 의상에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원효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을, 저자를 포함한 오늘날 우리 거의 모두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언진도 몰랐을 것입니다. 알았다면 그는 시를 내려놓았을 겁니다. 

저자는 이언진의  시를 미학적 실천이라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 또한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를 통해 그 실천 양식을 드러낸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 규정과 맞물린 문제인데, 그가 주로 주의를 기울인 것은 자신이 양반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지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양반과 다름없는, 아니 양반보다 뛰어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 표지였던 셈입니다. 그 자체로도 물론 치열한 저항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도 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시로써 자신과 저 민중들을 동일시하는 생각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양반에 대한 태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공유가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문시를 통해 양반과는 저항적 일치가, 중인 이하와는 일치적 분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주체의 공간화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드러내줍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주체의 공간화라는 표현은 이언진의 주체적, 진보적 태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그 사명을 끝내는 게 아닙니다. 이언진이 그 민중들과 연대하지 못했다는, 다시 말하면 저항의 사회동원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공간에 그들과 함께 있었으되 다만 그것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혁명하는 생명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서삼경 대신 수호전을 경전으로 삼아도, 아무리 흑선풍 이규를 염원해도, 이언진의 열망은  한문시의 상징 공간에서 숨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종교적 수행이었습니다. 특유의 자존감 어린 표현이긴 하지만 스스로 부처라고 여길 정도였다니 상당히 결곡한 영성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또한 저자는 성속을 가로지른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때의 聖도 그 때의 俗도 매우 실존적이고 소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 만큼 살았다면 아마도 영종조 연간에 걸쳐서 살았을 것이고, 그 때, 이른바 중흥기 조선에서 혁명을 꿈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언진은 각혈하는 저항 시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시인은 시로써 혁명한다고 두둔하기에 그의 시는 날카로운 천재성에 비해  일렁이는 선동성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부처는 사회적 가치와 욕망을 내면화하는, 그래서 탈사회, 즉 출세간으로 귀결되는 수직 영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로지르기는 산 역사가 되지 못합니다.  

4. 이언진은 이언진인 이언진입니다. 그는 일단 그로서만 보아주어야 합니다. 여태 제가 말씀드린 바는 이 이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를 오늘에 되살리려면 오늘의 관점과 요청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언진의 재발견은 오히려 이언진을 넘어서야  빛나는 것입니다. 저항의 방식은 일률적일 수 없고 우열도 없으며 심미적이기도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 공감 백만 제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언진을 떠올릴 때 원효도 함께 떠오르는 것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이언진의 불꽃 같은 삶,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유행위와 글쓰기 행위, 존재와 글쓰기의 구경(究竟)적 통일, 분잡과 고통 속에서도 고매함과 성스러움을 향한 갈구의 끊을 놓지 않은 것 등(도)-괄호 처리 필자-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아니 다시 강조한 이 말에서 서울대학교 교수인 저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우리는 봅니다.  누구든 이 이치를 떠날 수 없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제 위상과 너무 먼, 저 아득한 누구에겐가 저를 투영하고, 오늘 밤, 절연의 괴리감과 더불어 이 글 쓴 것을 후회하며 자책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은,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기를 계속합니다. 역사와 그 속의 사람, 오늘은 이언진을 통해 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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