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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목길 부처다 - 이언진 평전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평점 :
1. 처음 보았을 땐 그냥 지나쳤습니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라는 제목 때문이라기보다 이언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이었을 터. 아마도, 넌 또 누구냐, 뭐 이런 습관적 반응이었을 겁니다. 개나 소나 끌어다가 스타 만드는 풍조에 넌덜머리 난 무지렁이의 냉소적 반응이랄까, 아무튼.
두세 번 지나다가 표지에 그려진 부처 인상이 운주사의 저 naïve한 그것과 흡사하단 느낌, 아, 물론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그 때문에 책을 펴 들어 보았습니다. 책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진부한 '간 보기'에서 몇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끌더군요. 중인이다, 박지원이 傳을 썼는데 최악이다, 이단적 또는 혁명적이다, 성속을 가로지른다....... 내면에서 슬며시 팔꿈치 하나 나와 옆구리를 찌르더군요.
2. 조선 영조 연간 태어나고 요절한 역관 이언진은 시대를 앞서간, 그래서 그 시대와 불화한 천재입니다. 저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 그의 면모를 정리합니다.
새로운 진리 구성 - 송시열이 구축한 사대적이고 매판적인 주자(朱子)주의가 초일극집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인간 평등을 주장했으며, 유불도의 공존을 통한 진리의 복수성을 인정했으며, 옛것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고 오늘의 가치를 창달하고자 했으며, 사서삼경 이외의 텍스트에도 진리성이 있음을 천명했고, 인간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새로운 주체 형성 - 양반만이 주체였던 시대에 그는 중인임도 주체임을 선언했으며, 도시 서민과 중인의 삶터인 호동(衚衕)을 자기 공간으로 삼았으며, 자기존중을 기한 항장(骯髒)한 주체였으며, 저항적 주체였으며, 성속을 가로지르는 주체였습니다.
물론 그가 지닌 한계도 있습니다. 저자가 지적한 것은 인간평등에서 남녀평등이 빠져 있다는 점(하지만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평가가 썩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조선사회 전체를 더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3. 한 사람의 사상과 그에 다른 실천이 전천후적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붓다나, 예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사상과 실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그래서 비판하고, 심지어 비난하고 말자는 의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상과 실천을 오늘 우리의 자산으로 받고, 한계 너머의 것을 향도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언진을 읽을 때, 그의 삶과 사유, 그리고 실천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의 자리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상황과 요청의 빛을 따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가 자신의 진리 인식, 또는 사상을 대부분 시로 표현한 사실부터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이언진을 옹호하면서 숱한 종교경전이 시로 되어 있으며, 높은 선지식(禪知識)이나 거유(巨儒)들도 종종 시로써 그 깨달음을 나타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예에서 간과하고 있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 경전은 고대적 문헌전승이 구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문 형태를 띤 것이지 의도적으로 시 형식을 빌린 것은 아니라는 게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종교 경전, 선승이나 유자의 시가 깊은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언진의 사상처럼 저항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구약성서 시편에, 이황의 시조에 무슨 저항의식이 들어 있다는 것인가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로써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언진의 차별적 사상을 표현하기에 시라는 형식이 과연 적합한가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의 사상이 당대 주류 주자학에 터 잡은 수구, 또는 보수적인 것이라면 특별히 문제삼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는 이언진과 흡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당나라 유학파 엘리트 승려들이 왕실을 끼고 사상계를 장악하여 초일극구조를 확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주류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 진골 출신의 의상이었습니다. 그 의상과 대척점에 선 원효는 성골도 진골도 아닌 육두품(이하) 계열 사람이었습니다. 원효는 당을 통해 수입된 불교사상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자주불교의 날카롭고도 웅혼한 나래를 펼쳐 갔습니다. 의상의 사상은 화엄일승법계도 7언 30구 210자 시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의 사상은 최소 80부 150여 권, 최대 102부 303 권으로 된 방대한 산문 저작입니다. 대부분 소(疏), 즉 자세한 풀이의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상의 시와 원효의 소(疏)는 어떤 결정적 차이를 지닐까요? 의상의 시는 고도한 직관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압축된 큰 덩어리입니다. 원효의 소(疏)는 낱낱이 풀어 놓아 이해할 수 있게 한 작은 이야기의 네트워크입니다. 전자는 엘리트의 기득권을 지키는 신화적 암호입니다. 후자는 다수 민중을 어루만지는 역사적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의상은 의상에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원효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을, 저자를 포함한 오늘날 우리 거의 모두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언진도 몰랐을 것입니다. 알았다면 그는 시를 내려놓았을 겁니다.
저자는 이언진의 시를 미학적 실천이라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 또한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를 통해 그 실천 양식을 드러낸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 규정과 맞물린 문제인데, 그가 주로 주의를 기울인 것은 자신이 양반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지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양반과 다름없는, 아니 양반보다 뛰어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 표지였던 셈입니다. 그 자체로도 물론 치열한 저항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도 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시로써 자신과 저 민중들을 동일시하는 생각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양반에 대한 태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공유가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문시를 통해 양반과는 저항적 일치가, 중인 이하와는 일치적 분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주체의 공간화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드러내줍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주체의 공간화라는 표현은 이언진의 주체적, 진보적 태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그 사명을 끝내는 게 아닙니다. 이언진이 그 민중들과 연대하지 못했다는, 다시 말하면 저항의 사회동원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공간에 그들과 함께 있었으되 다만 그것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혁명하는 생명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서삼경 대신 수호전을 경전으로 삼아도, 아무리 흑선풍 이규를 염원해도, 이언진의 열망은 한문시의 상징 공간에서 숨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종교적 수행이었습니다. 특유의 자존감 어린 표현이긴 하지만 스스로 부처라고 여길 정도였다니 상당히 결곡한 영성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또한 저자는 성속을 가로지른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때의 聖도 그 때의 俗도 매우 실존적이고 소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 만큼 살았다면 아마도 영종조 연간에 걸쳐서 살았을 것이고, 그 때, 이른바 중흥기 조선에서 혁명을 꿈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언진은 각혈하는 저항 시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시인은 시로써 혁명한다고 두둔하기에 그의 시는 날카로운 천재성에 비해 일렁이는 선동성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부처는 사회적 가치와 욕망을 내면화하는, 그래서 탈사회, 즉 출세간으로 귀결되는 수직 영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로지르기는 산 역사가 되지 못합니다.
4. 이언진은 이언진인 이언진입니다. 그는 일단 그로서만 보아주어야 합니다. 여태 제가 말씀드린 바는 이 이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를 오늘에 되살리려면 오늘의 관점과 요청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언진의 재발견은 오히려 이언진을 넘어서야 빛나는 것입니다. 저항의 방식은 일률적일 수 없고 우열도 없으며 심미적이기도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 공감 백만 제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언진을 떠올릴 때 원효도 함께 떠오르는 것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이언진의 불꽃 같은 삶,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유행위와 글쓰기 행위, 존재와 글쓰기의 구경(究竟)적 통일, 분잡과 고통 속에서도 고매함과 성스러움을 향한 갈구의 끊을 놓지 않은 것 등(도)-괄호 처리 필자-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아니 다시 강조한 이 말에서 서울대학교 교수인 저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우리는 봅니다. 누구든 이 이치를 떠날 수 없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제 위상과 너무 먼, 저 아득한 누구에겐가 저를 투영하고, 오늘 밤, 절연의 괴리감과 더불어 이 글 쓴 것을 후회하며 자책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은,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기를 계속합니다. 역사와 그 속의 사람, 오늘은 이언진을 통해 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