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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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옥을 건너다-11년 전 <바리공주>는 지옥을 ‘무사히’ 건넜습니다. 오늘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지옥을 ‘뒤흔들며’ 건넙니다. 염라대왕의 엄격한 통치 방식을 유연한 것으로 바꾸며 건넙니다. 

 

“내가 지옥을 둘러보니 지옥불 죄인 가운데는 좋은 말씀과 마음으로 보살피면 선한 영혼으로 거듭날 혼귀들이 꽤 있더이다. 형벌로만 다스린다고 죄가 씻기지는 않을 것이오. 불쌍한 혼귀들을 내 식대로 한번 구제해보고 싶소. 염라대왕님의 하락을 받아주오.”

수문장이 곰곰 따져보니, 필요하긴 하나 아무도 할 생각을 못 하던 지옥 일을 이 자가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그 길로 염라대왕께 전령을 보내 여쭈었더니 흔쾌한 수락의 답변이 돌아왔다.”(133쪽)

죄지은 ‘사실’에 터 잡아 가차 없는 형벌로 다스려지던 지옥의 법도에 죄지을 수밖에 없었던 ‘진실’이 들어갈 틈을 낸 것입니다. 구제의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리의 길입니다. 바야흐로 지옥에 인간의 입김이 쐬어지기 시작합니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가 제시하는 세계는 이렇게 다릅니다. 다른 어떤 종교사상에도 없는 지옥의 풍경을 바리의 지옥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의 한가운데 산 사람 하나가 들어가 죽은 사람을 구제하고 있는 경이롭고 장엄한 풍경 말입니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격절이 바리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의 꽃을 피워내는 바리에게 지옥이든 천국이든 인간세계든 걸릴 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원효의 일심-화쟁-무애 사상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본디 아래아를 써서 표현해야 함) 사상입니다. 포개지되 하나가 아니고 쪼개지되 둘이 아닌 묘법의 이치가 구현되는 누리가 바리의 시공간입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사상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가로-세로-높이를 지녔습니다.

 

이 옹골차게 말랑말랑하며 탱맑은 세계는 바리가 버림받은 존재지만, 아니 버림받은 존재라서 자신을 극진히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빚어낸 세계입니다. 쌍방향 생명작용의 비밀은 바로 버려짐, 그 절대 아픔에 있습니다. 절대 아픔에 대한 도저한 마음 씀은 개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넘어섬이 지옥의 통치 질서까지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지옥을 건너오면서 눈물을 속으로 삼킨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수척하게 깊었다. 그간 무쇠 옷은 옷소매며 앞섶이 많이 닳아 있었다. 손등이며 손가락 끝이 죄다 갈라터지고 얼굴의 살결도 거칠게 터서 외형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바리공주의 얼굴에선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강하고 고독한 바리의 눈빛은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했다.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고자 매 순간 자기 자신과 맨얼굴로 만나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하고 환한 빛이 바리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서천서역국으로 출발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강인한 얼굴로 바리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134-135쪽)

 

바뀐 것은 지옥만이 아닙니다. 바리도 바뀌었습니다. 바뀌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는 얼굴,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한 눈은 물론 “당당하고 환한 빛”이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이 바뀜이 곧 치유입니다. 바리는 곡진한 변화과정을 거쳐 완벽한 치유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본디 마음의 아픔은 배움과 자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니 치유로서 변화는 배움과 자람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바리는 여자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납니다. 바리는 여자 너머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납니다.

바뀐 지옥이 바리를 바꾼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개인을 바꾸는 일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현대 여성운동의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당합니다. ​바리공주가 지옥을 바꾸듯 세월호의 바리들이 지옥 같은 이 나라를 바꾸고야 말 것입니다. 나라를 바꾸지 않으면 결코 아이들 생령의 치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 점점 운명의 웅숭깊은 산 그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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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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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주령과 낭화 세 가지-바리가 유리산을 꿰뚫고 나온 것은 트라우마로서의 공포, 버려진 운명, 삶의 천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리는 일련의 깨침, 그러니까 치유 체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청태산 마고할미입니다.

 

마고할미는 “두 눈 사이에 청옥을 박아 넣은 것 같은”(109쪽) 제3의 눈을 지닌 욕쟁이 할미입니다. 제3의 눈을 지닌 것과 욕쟁이인 것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깊은 일치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3의 눈은 통속적 관점으로는 볼 수 없는 차원 높은 진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욕은 인간이 지닌 언어 가운데 가장 곡진한 것입니다. 거칠고 딱딱한 표현을 통해 돌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선禪적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세계를 구성하는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실에 이르게 하는 탁월한 방편인 셈입니다.

 

마고할미가 제시한 과제는 빨래하기입니다. 빨래의 통속한 의미는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언젠가는 완수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차원에 있는 작업입니다. 검은 빨래 희게 하기지요. 그러나 흰 빨래 검게 하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통속한 빨래 의미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제3의 눈이 없으면, 마고할미의 욕이란 자극이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흰 빨래 더미의 빨래를 방망이질하면서 또 몇 밤이 지나간 어느 아침이었다. 바리공주의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빨래 더미를 들고 개울가 흙바닥으로 나가 앉아 흙에다 빨래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물에다가만 빨래를 하란 법 있나. 세상이 처음 날 적에 지수화풍이 그 모체였으니 흙 묻은 옷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살이의 생각 한끝 차이지.......

그렇지. 생각 한끝 차이지. 연꽃이 꽃잎을 여는 것도 진흙탕을 통과한 다음부터지.

흙빨래를 해서 걷어진 빨래를 다시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며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거무튀튀해진 빨래들이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리공주의 숱 많은 머리칼 색을 꼭 닮아 있었다.”(110-111쪽)

 

그렇습니다. 빨래는 다만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빨래는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위한 능동적·창조적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 한끝 차이”로 이런 발상을 한다면 세상은 더 이상 고통도, 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생각 한끝 차이”를 실행하기 지난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리가 이런 깨침에 이른 것은 마고할미의 깨우침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전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린 유리산 체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리는 이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부분은 오류라는 것. 세계의 진실은 비대칭의 대칭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 깨달음의 끝에 바리가 다다른 곳은

 

기이한 곳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바리는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색 물고기들이 가득 노니는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바리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가다 보니 눈앞에 불쑥 검은 섬이 나타났다.”(113쪽)

 

진실을 온 몸에 지닌 사람은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길디긴 세월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한창 아플 때 자주 꾼 물 꿈은 시퍼런 물에 빨려 들어가거나 무서워 도망치는 꿈이었습니다. 치유가 익어갈 무렵에 더 자주 꾼 꿈은 물에 빠지지 않고 달리거나 나는 꿈이었습니다.

 

 

이 순간 문득 저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숨져간 아이들, 우리 시대의 바리들을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치유해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땅의 어른들이 끝내 잊지 않고 정치경제적·사회역사적 처결을 관철해내야 할 것입니다. 치유와 자유는 단지 부분적 뒤치다꺼리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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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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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명수를 찾아 떠나다-“.......거대한 유리산이 바리공주 앞을 가로막았다.......무서웠다. 공포가 몰려오자 옥함 속에서 울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울음소리란 걸 깨닫자 외면하고 싶었다. 바리공주가 손으로 두 귀를 막고 고개를 저었으나 아기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귀를 막았던 손으로 바리공주가 유리벽을 두드리며 아기와 함께 울었다.......숨을 고른 후 눈을 질끈 감은 바리공주가 갓난아기가 울고 있는 유리벽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101-102쪽)

 

고난의 여정, 그 첫 번째 난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유리산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유리산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비밀을 드러내어 알게 함으로써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바리의 공포는 버림받음에서 왔습니다. 갓난아기의 우주인 엄마가 사라진 시공에 찾아오는 검푸른 공포, 바로 그것입니다. 공포 뒤에 들이닥치는 눈물과 그 눈물에 대한 기억이 너무 아파서 바리는 한사코 외면하고, 부인하려 발버둥 칩니다. 그럴수록 아픔은 점점 더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옵니다. 급기야 바리의 영혼은 그 아픔에 꿰뚫립니다. 바리는 그 찰나 모든 아픔을 통째로 받아들입니다. 바리는 아픔을 품어 안고 함께 웁니다. 극진한 애도입니다. 마침내 바리는 공포, 그 두려움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아 나아갑니다.

 

김선우가 정신치료 과정을 공부하고 이 과정을 풀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질문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이치상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음의 병이 치유된다는 진실을 유심히 톺아보면 그만입니다. 특정한 해석·평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상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나아가지 않으면 치유란 없다는 진실이 간단명료한 내러티브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아픔을 겪을 때 흔히 생각하는 방법은 피하기입니다.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없다고 간주하는 것, 합리화하는 것 등 모두가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피하기입니다. 이런 방법은 사소한 버릇에서부터 세련된 긍정주의 전략까지 모두 허망한 거짓입니다. 아픈 것은 실제로 아픈 것이고, 있는 것은 엄연히 있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에서 내 팔 뻗어 잡을 수 있는 곳, 내 발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을 홀딱 벗은 눈으로 마주볼 때만이 아픔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리의 자세이며, 바리의 삶입니다.

 

꾸르릉, 쩡! 날카로운 소리와 둔중한 소리가 함께 울리며 유리산이 산산조각 난다는 느낌과 함께 바리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쿵 떨어졌다. 유리산을 뚫고 나오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쾌청한 하늘과 너른 풀밭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버려졌던 여자아지. 아니야. 나는 강한 바리다........나는 나를 믿으면 돼. 나는 나를 사랑하면 돼.......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야.......바리공주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102-103쪽)

 

유리산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거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끝이 아닙니다. 건강한 삶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참된 건강인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영성의 사람이며 열반의 사람입니다. 바리가 인도하는 길은 다름 아닌 영성과 열반의 길입니다.

 

사회 전체가 아픕니다. 혼자 행복하기 위해 은폐와 조작, 그리고 무시로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권력의 민낯을 보면서, 오늘 여기 우리 모두가 바리로서 살아야만 하는 날 선 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야 한다, 아가. 살라고 태어난 목숨이다.”(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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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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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대화에

말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말과 말 사이다.

 

대화에는

말보다

말과 말 사이가 더 많다.

 

말과 말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말은 대화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 오랫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대화/상담 치료를 함께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따스하고 정확한 치료의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낫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본디 실체적 힘이 없습니다. 말이 끝난 자리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틈, 곧 침묵 속에서 아픈 사람 스스로 말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섬으로써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상담자의 핵심적 임무는 아픈 사람이 자발적으로 병 앞에 서도록 허공을 열어놓는 일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말은 침묵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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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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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 얻은 것들의 슬픔-“.......“.......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왕가의 일이온데, 지금 불나국 백성들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더이다. 그 원인이 아버님의 병환 때문이라 하니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을 위해 아버님의 쾌유를 도모하겠나이다.”

침착하고도 당당한 바리공주의 목소리가 어전에 울려 퍼지는 동안 대신들이 엎드려 감읍하였다.

바리공주가 오구대왕 앞으로 세 발자국 더 나아가며 말했다.

“대왕이시여. 듣자니 정사가 바로잡혀야 백성의 삶이 평안해진다 하니, 소녀, 생명수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소녀가 생명수를 구해 와 아버님을 살린다면, 아버님의 목숨은 불나국 백성들에게 빚진 것이오니, 기억하고 또 기억하소서.””(98쪽)

 

11년 전 <바리공주>가 생명수 구하러 가는 이유는 이른바 효의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궁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목숨 얻은 것들의 슬픔과 나라의 피폐해진 모습을 목격하고 가슴에 불이 이는 경험을 했지만 이를 삶의 결단으로 동기화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자신의 결단이 지니는 대승大乘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딸로서 아버지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인 아버지가 병들어 정사를 바로 살피지 못해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하여 생명수로써 구해지는 왕의 목숨은 백성들에게 빚진 것임을 명토 박고 있습니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좀 더 깊은 통찰, 좀 더 섬세한 공감, 좀 더 광대한 자비심으로 세상을 보듬습니다. 세상을 보듬는 힘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바리공주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의 고통 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또한 부끄러웠다.”(95쪽)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감수성은 수미산을 나와 불나국 현실을 보는 순간 단박에 법과 도덕의 껍질을 꿰뚫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타인의 고통에 극진히 참여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결국 인간 존재란 홀로 성립하지 않으며 타인과 더불어 성립한다는 도저한 진실에 단도직입으로 들이닥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고통이 크다 해도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너무 편안히 살았구나.”(93쪽)라는 부끄러움밖에 고백할 말이 없다는 진실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탱맑은 감수성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리 자신이 버려진 존재로서 두려움, 깊은 슬픔, 그리고 절망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바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치유의 길임을 배웠습니다.

 

버려졌기 때문에 바리는 자신을 더욱 사랑했다. 한 번 버려졌으니 절대로 두 번은 버려지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더욱 사랑해줘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의 지극한 사랑은 바리를 그렇게 키웠다.”(95쪽)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가짐과 힘이 옹골차고 튼튼하지 못하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 이르지 못합니다. 흔히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켜 “자기 사랑이 지나치다.”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착각은 부끄러움의 감수성을 갉아먹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착은 그 자체로 질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대개 사회 최상위에 포진합니다. 권력, 자본, 종교를 쥐고 앉아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병들게 합니다. 질병을 가치로 둔갑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추종하게 합니다. 죽기 살기로 추종해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절대 다수는 결국 절대 신앙구조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속는 줄도, 착취당하는 줄도 모른 채 고통에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통째로 버려진 것만 같았다.......백성들은 조정으로부터 내팽개쳐진 채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95쪽)

 

 

통째로 버려지다니, 아, 이 소름 돋는 일치감! 오늘 우리는 이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을 통째로 버리는 조정이 그 강퍅함을 더해가는 나날을 견디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병을 고치는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생명수를 구하러 고난의 길을 떠나는 바리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리의 희생으로 질병에서 놓여나는 지배자가 과연 백성에 빚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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