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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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그런데 아니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95-99쪽)

 

이 리뷰20에서 「맹자」<곡속장觳觫章>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떠는 소를 보며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일으킨 어느 왕의 이야기였습니다. 떠는 소를 보고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눈앞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보는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자기 대신 살해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기가 죽였다고, 그러니까 자기가 그 죽어간 사람에게 카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리모 레비 눈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자신의 용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 완전한 증인들, 원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영원히 기려져야 할 용기가 순간의 덧없음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완전한 증언이 완전한 침묵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워야 할 원칙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범죄는 아니지만 비겁함으로 살아남은 적자適者들이 불완전한 증인으로서 예외의 증언을 할 때, 또 그 증언 덕택에 편안히 살아간다고 느낄 때, 그것은 그대로 괴로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 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의 용기가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그렇게 움직여서 이루어진 원칙들이 증언으로 이어지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의 징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증언한 것일 텐데 그런 징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 아닐는지요. 프리모 레비의 절망이 영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여울목에 놓인 통찰입니다. 마침내 이 절망은 그의 죽음에 가 닿았을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도,

 

·······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최후까지 애써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절대의 벽이 있습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완전한 증언이 원천봉쇄 된 상황에서 역사는 무심히 ‘제 길’을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역사의 ‘제 길’은 최고의 사람들이 침묵 속에 죽어가는 일을 되풀이하는 방향으로 고정됩니다. 그것을 역사의 법칙이라 합니다. 역사의 법칙은 모든 역사적 특이점을 잡아먹습니다. 특이점을 잡아먹힌 역사는 맥락 없이 미끄러집니다. 맥락 없이 미끄러지는 역사는 시간을 공간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공간의 노예가 된 시간 속에서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이 변혁 불가능성과 맞서 싸워온 프리모 레비의 40년, 그 고독의 정점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한 자 한 자가 새겨졌을 것입니다.

 

감히 짐작하지 않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마음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죽음을.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마지막 매듭으로 삼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여기 이 자리, 우리 삶의 마지막 터로 삼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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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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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8월, 아우슈비츠는 아주 무더웠다.·······갈증은 배고픔보다 더 시급한 문제이다.·······갈증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배고픔은 기진맥진하게 만들지만 갈증은 광폭하게 만든다.·······

  카포가 잡동사니들을 치우도록 내게 할당한 곳은 창고의 구석자리였다.······수직의 벽을 따라 2인치짜리 파이프가 있었는데·······수도꼭지가 붙어 있었다. 수도관인가?·······나는 혼자였고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돌을 망치 삼아 수도꼭지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수도곡지에서 물방울이 흘러나왔다.·······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 물을 당장에 몽땅 마셔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니면 내일을 위해 좀 남겨둘 수도 있었다. 또 알베르토와 절반씩 나눌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작업반의 모든 동료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나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다니엘레는 뭔가 의심했고, 결국 짐작했다.·······해방 뒤·······다니엘레는 굳은 목소리로 내게 그 일에 대해 말했다. 왜 너희들은 되고 나는 안 되지? 그것은 다시 떠오른 ‘일반인의’ 도덕률이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인간인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잔인한 카포가 내리는 끔찍한 사형선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뒤늦은 수치심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없을까? 그 당시에도 나는 답하지 못했고 지금도 답하지 못하고 있지만, 수치심은 있었고 여전히 있다. 구체적이고, 무겁고, 영구적인 수치심 말이다. 다니엘레는 이제 죽고 없다. 그러나 우애 있고 애정 어린 우리 생환자 모임에서 하지 못한 그 행동, 나누지 못한 물 한 컵의 장막은 ‘큰 대가’를 요구하며 우리 사이에 투명하게 놓여 있었다.(92-95쪽)

 

프리모 레비를 읽은 뒤부터 제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실존적인 각성과 질문은 다름 아닌 죽음과 자살 문제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30cm 이내 거리에 있다.”

 

“무엇이면 스스로 목숨 거두는 선택을 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순간마다 프리모 레비를 더욱 사무치게 생각합니다. 그가 처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순간들,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 그 무엇보다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마침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섰을 때 명멸했을 상념들을 헤아려보면서 매번 지침 없는 눈물을 쏟습니다. 제 삶이 정화되는 시간들입니다.

 

프리모 레비로 말미암은 시간들 가운데 지금 이 부분은 참으로 아프고 쓰라린 것입니다.

 

다니엘레는 이제 죽고 없다.

 

이 문장을 써놓고 프리모 레비는 한참을 울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 절창이랄 밖에 없는 이 말이 폐부를 찌르며 달려듭니다.

 

물 한 컵의 장막

 

그래, 그렇구나, 물 한 컵이 장막이 되어 생사를 갈랐구나, 그러나 그 장막이 너무나 투명하여 죽음이 다시없이 선명하게 보이는구나, 바로 이게 치러야 할 ‘큰 대가’로구나·······문득 프리모 레비의 폭포 같은 죽음 한 줄기가 설핏 그 진실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물 한 컵으로 알베르토와 다니엘레 사이는 하늘과 땅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니엘레의 질문은 천하의 준엄함으로 다가옵니다.

 

왜 너희들은 되고 나는 안 되지?

 

프리모 레비에게 “구체적이고, 무겁고, 영구적인 수치심”을 안긴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시각각 던져집니다. 저 “너희들”과 “”를 구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리뷰24에서 패거리 문제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권력이 선두에서서 조장하는 패거리가 만연한 우리사회에서 이 질문은 매우 결정적crucial인 것입니다.

 

일천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매판적인 “통일신라 패거리”와 자주적인 의로운 사람들의 연대가 맞서온 과정이 우리 역사의 근간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구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통일신라 패거리”는 이 나라의 주류임을 자처하며 여전히 매판적 협잡을 통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채 의로운 사람들을 분할통치술로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로운 사람들은 누구까지 생명의 연대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프리모 레비처럼 그들에게는 “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인색과 물색없는 오지랖 사이지만 상대방의 처지에서는 선택과 유기 사이여서 더욱 어렵습니다.

 

한의원 털리고 낭인으로 떠돌던 시절, 우리사회의 어둠이 내린 여러 곳 사람들과 아주 적으나마 함께하였습니다. 강정마을, 평택 쌍차, 명동 마리·······해직 언론인, 희망버스 기획자·······함께하지 못한 사람이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습니다. 제 의료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침, 한약, 심리 상담이 대부분 무료로 이루어졌지만 상황에 따라 한약은 비록 원가 수준이었으나 돈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저 또한 “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물’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밀려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정반대의 죄책감과 수치심도 있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지아비로서 기본적인 돈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한약과 침을 싸들고 제주도로 날아가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대체 한의원은 어찌 하고 저렇게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니는지 알 길 없는 어린 딸은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누구도 매 순간 저 죄책감·수치심과 이 죄책감·수치심의 경계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해도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죄책감과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필요한 염치廉恥이기 때문입니다. 치러야 할 ‘큰 대가’는 각자 깜냥에 맞는 몫이 있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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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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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연대감의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자책 또는 비난은 더욱 현실적이다.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카포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다)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나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힌다.(91쪽)

 

어느 순간 우리사회 전역에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홀연히 떠올라 이제는 요지부동의 진실로 자리 잡았습니다. 의로운,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죄와 벌의 차꼬가 채워집니다. 불의한, 그래서 부유한 자들에게는 승승장구 대박 나는 탄탄대로가 열리고 있습니다. 급기야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아니 저질러야 헌법기관, 심지어 대통령도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야훼와 붓다를 제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천박하게 너무나 참담하게 겪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매판과두정치買辦寡頭政治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대한민국은 다르지 않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다만 외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 그 감정과 이성, 그리고 의지의 결을 따라 들어가 마음 실재를 포착해냅니다. 의도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그 범죄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자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 희희낙락 살아간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나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의로움의 감수성을 파고든다는 진실에 영혼의 촉수가 닿아 있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자책감과 수치심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자기의 악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늘 덜 누린다고 앙앙불락하고 의로운 사람은 늘 더 누린다고 자책합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하고 의인은 자기 손의 것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음모란 없다고 떠들며 늘 음모를 꾸밉니다. 의로운 사람은 음모에 당하면서도 늘 음모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인간답지 못한 현실 세상에서는 의롭지 못한 자가 백전백승합니다. 백전백패하는 의로운 사람이 끝까지 버리지 않은 꿈은 인간다운 실재 세계입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문제가 연일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관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기억을 지운다”며 나대고 있습니다. ‘찌라시’에 흔들리는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찌라시’ 흘리는 정치를 하는 집단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진돗개가 청와대 실세라는 ‘농담’은 다만 농담이 아닙니다. 그 ‘농담’은 무심코 진돗개가 제압하고 있는 ‘똥개’를 은유로 깔아 놓았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의 전형을 이루기 위해 총궐기한 저들의 모습은 가증스럽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자아내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죄책감도 수치심도 사라진 저들의 영혼은 초월적 권위의 망령에 사로잡혀demon possessed 있습니다.

 

정치적 귀신들림political demon possession은 이 땅을 나치와 같이 칠흑의 광기로 덮어가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을 물을 따름입니다. 돈이 모든 광기의 출발이자 귀결입니다. 돈을 위해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덮기 위해 사람을 죽입니다. 살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욱 깊이 귀신들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사악하고 음산한 시대를 꿰뚫는 힘, 그러니까 참된 정치적 영성은 무엇일까요? 의로워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지닌 따스한 죄책감과 수치심, 그러니까 염치가 빚어내는 날카로운 느낌과 맑은 알아차림, 그리고 옹골찬 손잡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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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2-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 사회적 연대가 절실한 시점인데 정치적 무력감이 널리 퍼지는 것 같습니다.

bari_che 2014-12-10 09:23   좋아요 0 | URL
걱정입니다.
외곽을 때려 중심을 무너뜨리는,
다른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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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슨 죄인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가 휩쓸려 들어가 있던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아니면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떠올랐다.·······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다.·······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생환자는 스스로를 피고로, 심판받는 사람으로 느끼며 자신을 해명하고 방어해야 할 것처럼 느끼게 된다.(89-91쪽)

 

“내가 그랬다, 내가 내 아들을 죽였다(I did it, I killed my son.)”

 

나이트클럽에 나가 밤일을 하면서 혼자 어렵게 두 아이를 키워오던 한 여인이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TV와 서랍장이 쓰러진 채 나뒹굴고 큰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평소에 아이들을 재워 놓고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하필 그 날 밤 따라 아이들은 깨어서 함께 서랍을 열고 들어가는 등 놀았고 그 와중에 서랍장이 쓰러지며 그 위에 놓여 있던 TV가 떨어져 큰 아이의 머리를 가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서투른 영어로 자기 잘못을 탓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말을 근거로 법원은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손 씨 성을 가진 한국인 교포였습니다. 이 일은 미국의 잭슨빌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내가 잡았어, 내가 내 새끼를 잡았다고!”

 

그는 분명히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상황이라면 대한민국 어느 엄마라도 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새끼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아니면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에 가슴 치며 절규했을 말이 이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사무치는 죄책감을 단도직입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 그 여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 교민과 어느 변호사의 노력 끝에 몇 년 뒤 주지사의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고 합니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그의 마음에는 “스스로를 피고로, 심판받는 사람으로” 여기는 나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기구하고 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죄인 자의 유죄인 느낌. 체제에 맞서는 대항이든 운명에 맞서는 대항이든 실현 불가능한 자기 의무를 전제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해명하고 방어해야 할 것처럼 느끼는” 의인의 수치심. 이처럼 날카로운 모순, 깊은 감옥이 다시 있을까요. 대항이 곧 죽음이라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도 “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때문에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아우슈비츠 생환자와 손 여인, 그리고 세월호 엄마들은 이런 점에서 하나입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 것에 무한한 죄의식을 지니는 사람들. 자기 책임이 아닌 것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 자기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여 당위를 세우고 수행하지 못한 것,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에 끝없이 마음 쓰는 사람들. 사실 인간세상은 이들의 고통을 통해 공존과 배려의 가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대박난 자들의 대죄를 대속합니다. 이들이 크리스투스입니다. 이들이 237일 째 단원의 아이들을 품어 안고 황천강을 지키는 바리공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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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나는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 해석들이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다. 즉, 심사숙고한 행위이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선택이다. 라거에서는 선택의 기회가 별로 없었고 노예가 된 동물들처럼 살았다.·······둘째,·······늘 코앞에 닥쳐온 죽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셋째,·······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형벌이 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므로)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88-89쪽)

 

젊은 사람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을 하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데 우울증은 무슨·······그런 거 비집고 들어올 틈이 어디 있냐? 다 살만하니 그런 소리하는 거야.”

 

우울증에 대한 이런 해석은 프리모 레비의 자살 해석과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정신장애이므로 말 그대로 ‘정신없는’ 상태라면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살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동물 상태라면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이런 해석은 프리모 레비의 자살 해석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삶은 긍정적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동물 같은 삶은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과연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삶은 긍정적일까요? 그것이 건강함일까요? 아닙니다. 인간다움을 잃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상태는 그럼 어떤 것일까요? 살만하니까 걸리는 부자 병 또는 호강 병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삶, 아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인정과 신뢰를 잃은 병입니다. 그 주된 원인이 바로 아우슈비츠 포로들을 자살로 이끄는 죄책감과 수치심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생물학적 생명에 손대기 전에 먼저 마음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이렇게 해서 아직 살아 있음과 이미 죽어버림이 공존하는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사회를 강타한 죄책감과 수치심은 본질에서 아우슈비츠 포로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지금 처한 문제의 심각성과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세계최고의 자살률을 10년째 기록해온 나라의 국가권력이 도리어 국민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을 강요하니 이 땅에 더 이상 자살은 없습니다. 오직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타살만 있을 따름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여전히 인간으로서 한 올의 마음조차 지니지 않은 반인간적 권력에 환호작약하는 무지한 자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 긍정주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 행태가 알량한 탐욕과 조작된 공포의 소산임을 모른 채 「임꺽정」(이두호)의 김달평처럼 잔혹하게 킬킬거리며들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짐승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의 특권층 포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울증도 자살도 공동체 전체의 문제, 그러니까 공공의 어젠다로 인식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깨달음은 준 사건은 너무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 문제에 안일하고 둔감했다는 증거입니다. 먹고살기에, 아니 살아남기에 급급한 삶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세력을 직시하고 그에 맞서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을 알아차리고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찰나마다 혼신의 힘으로 싸워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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