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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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곳을 향해 걸어가라·······. 단 유의할 것이 있다. 느리게 걸어야만 그리움은 살아남는다.(568쪽)

 

 

느린, 늘인 걸음으로”(569쪽-황동규의 재인용) 떠돌며 살아온 삶이라면 저 또한 누구 못지않습니다. 사십대 중반까지 이 골짝 저 들녘을 배회하다가 친구들보다 이십오 년 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오십대 초반 한의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친구들로 치면 이제 삼십대 중반 직장인 정도인 셈입니다.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친구들이 많은 현실이고 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은 시간만큼은 제 느린, 늘인 삶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동안 친구들과 만나는 일도 느린, 늘인 시간 속에 두어왔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들과 이따금씩 어울리는데 소통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미상불 제 느린, 늘인 삶이 가져다 준 사유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 차이 가운데 아마 그리움에 대한 태도가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베이비부머 선두 세대로서 속도에 휘말려 살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은 대부분 오늘에만 집중함으로써 삶의 두려움을 내쫓기에 바빴으므로 그리움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별적으로 만나든 여럿이 왁자하게 만나든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들을 챙겨보면 오늘을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그저 그것을 위해 동원되고 소비될 뿐입니다. 추억도 없고 전망도 없습니다. 이른바 대박난 자도 이른바 쪽박난 자도 부유하는 오늘의 이야깃거리를 서로 붙들고 되씹을 뿐입니다. 드물게 누군가 제법 육중한 화제를 꺼내들지만 이내 농지거리와 술잔 부딪는 소리에 묻히고 맙니다. 뒤끝 없는 만남입니다.

 

그들이 오늘에 매달리는 것은 두려움, 그러니까 결핍 때문입니다. 결핍 문제에 대하여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반응reaction입니다. 병리 상태에서 성찰은 불가능합니다. 성찰은 결핍에 대한 건강한 감응response이기에 말입니다. 결핍을 무턱대고 채워 넣으려 하지 않고 세계의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삶의 결을 들여다보는 힘은 느린, 늘인 시간 속에 자기를 맡길 때 생깁니다. 어제와 내일의 소통인 한에서 오늘은 위대합니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어떤 슬픔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를 개인적 욕망으로 엮어 노년의 문턱까지 허덕지덕 달려오는 동안 그들의 생각은 오직 제 가족에 묶이고, 그들의 말은 다만 지배 문법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들의 눈은 사회의 어둠을 돌아볼 수 없고, 그들의 입은 더 이상 진실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 한 시대가 깊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 이 도저한 결핍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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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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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수동적인 정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기술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과 결합하면 소진되는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것이어서 늘 충족의 유예 상태 속에서 존재를 추동하는 욕망의 기술이고, 그 덕분에 지금 여기 ‘나’의 결핍을 ‘객관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기술이니까 말이다.(568쪽)

 

 

 

 

그리움은 끼쳐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에 젖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이 배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추억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낙엽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입니다.

 

그리움은 어제의 불씨를 빌어 오늘의 애태움을 피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오늘이 어제를 찾아가 내일을 함께 여는 일입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더해서 채우는 부요의 나날이 아닙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밝혀서 바르게 하는 진실의 나날입니다.

 

그리움 없이는 오늘 광화문 위에 하늘도 없습니다.

그리움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단 하나의 극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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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구성한 존재다

인간이니까, 는 없다

인간이려면, 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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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외면하지 않지만 그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564쪽)

 

상처를 외면하고 쓰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그 시 아닌 시를 읽고 치유로 나아간다 말하는 경우 또한 치유가 아닙니다.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 쓰는 시는 어떠할까요? 더 깊은 시로서 더 깊은 치유의 지도地圖가 될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더 아파하고 더 절망한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덜 아프고 덜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말을 조금 바꾸어보겠습니다. 그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로 파고든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별 것 아닌 상처 때문에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의 진실은 객관적 사실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 둘 잃은 상처는 하나 잃은 상처의 두 배입니까. 둘 잃은 부모에게는 아이가 더 있고 하나 잃은 부모에게는 그 아이가 외동아이였다면 어떤가요. 상처의 더 깊은 곳, 더 깊은 상처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시가 되어 나올 상처라면 상처의 깊고 얕음은 따질 일 아닙니다. 그 상처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옴팡진 진실입니다. 설혹 더 깊은 상처가 더 깊은 깨달음 주어 위대한 삶으로 인도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누구에게 그 길을 권할 안목과 자격이 있을까요.

 

인간의 인간다움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깊은 곳은 당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붓다와 예수의 삶은 깊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지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도 팔 벌려 유민이네를 껴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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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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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미지가 최초로 발화(發火)하는 순간 그것은 독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낯선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이미지들은 낯선 가운데 그 안에 상처를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그 상처가 독자의 상처를 건드려 점화되는 순간 그 이미지는 폭발한다. 폭발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낯선 것이었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뼈아프게 낯익은 어떤 것으로 변한다.·······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이다.(563쪽)

 

번역1-시적 이미지의 점點적 찌르기는 시인의 punctum에서 비롯합니다. punctum은 마치 미분방정식의 특이점 같은 것이므로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낯선 것일수록 서정적입니다. 서정적일수록 선연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상처는 인간의 보편적 숙명입니다. 상처라는 숙명의 보편성이 studium으로서 독자한테 면面적 접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접속하는 찰나 가장 아픈 한 점을 찌르고 들어갑니다. 독자의 봉인된 상처에 구멍, 그러니까 punctum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뼈아픈 낯익음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번역2-시적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낯설다는 것은 난해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고-인용자)·······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367쪽)입니다. 결국 낯설음의 요체는 광활함과 경이로움입니다. 무의식 속에 접어 넣었던 상처를 펴서 드넓게 하고 그래서 새로이 펼쳐지는 진실 때문에 낯선 것입니다. 이미지가 낯설면 낯설수록 상처를 도저하게 드러내므로 아프면 아플수록 상처는 높은 진동수로 공명합니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역해-내가 아플 때 두 가지 생각 속에 갇힙니다. 세상에서 내 아픔 같은 아픔이 다시 있으랴. 내 아픔을 아는 이 그 누구랴. 남이 아프다 할 때 두 가지 생각 속에 갇힙니다. 다들 그러고 사니까 징징댈 필요 없다. 네 아픔 내가 다 이해한다. 협소함과 진부함 때문에 자기 아픔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 밖으로 나가서 맑은 마음으로 보면 적어도 나만큼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아니 나보다 더 아파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사람도 보입니다. 지금 광화문에 청운동에 안산에 팽목항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낯설기만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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