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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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해하는 주체는 고집스레 상실한 대상과 나르시스적 동일시를 한다. 그러나 불안해하는 주체는 대상 상실에서 기인하는 바로 그 위험에 반응한다. 따라서 불안과 우울은 대상 상실에 대한 상이한 반응이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상호보완적으로 보이는데, 불안은 대상 상실로 인한 위험의 신호가 되는 반면, 우울은 주체가 상실한 대상과 고집스레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67-68쪽)

 

학생 시절 뜨르르한 명성을 지닌 법학 교수 한 분이 강의 중에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갇혀 망망한 인도양을 바라보며·······” 운운 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 동안 지녀온 신뢰가 돌연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대가들도 아주 작은 부분에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인간이니 말입니다.

 

우울(증)을 언급한 이 부분을 작은 실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가에게도 있을 수밖에 없는 어쩌지 못하는 한계랄까, 그런 것입니다. 프로이트 견해인지, 라캉의 견해인지, 살레츨 자신의 견해인지 정확히 구분이 가지 않지만 아무튼 변방의 이름 없는 한의사인 저에 비하면 모두 대가임에 틀림없는 이들의 견해가 꽤나 어설프다, 싶은 순간, 돌연 그 때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불안은 우울과 같은 층위의 마음작용이 아닙니다. 불안은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고 우울은 불안에 대처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병리적 상황으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정신장애의 기저에는 불안이 깔려 있고, 그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기준의 네 가지 형태 장애 군群이 형성됩니다. 분열, 우울, 강박, 전환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안과 우울은 대상 상실에 대한 상이한 반응이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상호보완적”이라는 표현은 체계적 이해가 결핍된 엉성한 것입니다.

 

고집스레”라는 용어도 문제입니다. 학자든 임상가든 병(인人)을 향해서는 삼가야 할 말입니다. 고집스럽다는 표현은 그 주체에 대한 비난, 적어도 책임 지움의 의미를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장애를 개인 책임으로 귀결시키는 오랜 인습의 일환이거니와 유난히 우울증에는 노골적인 듯합니다. 다른 사람과 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불식되지 않는 이런 편견의 끈질김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우울은 “상실한 대상과 나르시스적 동일시”라는 극단적 상태 이전에 근본적으로 자기 단일單一성의 문제를 대할 때 자타의 분리보다 연속에 무게를 두는 경향성을 가리킵니다. 독립된 개인보다 모여서 상호 의지하는 공동체 전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리킵니다. 병적으로 진행되면 자기보다 타인·공동체에게 지나치게 기울어지고 급기야 타인·공동체에게 합일되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경향성과 장애를 분열이라 이름 합니다.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분열은 매판지배계층, 보수·수구집단, ‘대박’족속celebrity에게서 나타납니다. 세월호사건 지겹다, 국익에 해된다, 떠드는 자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우울은 자주피지배계층, 진보집단, ‘쪽박’족속張三李四에게서 나타납니다. 세월호사건 유족,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변방의 가난한 마을 한 구석에서는 보이는 이런 진실이 서구 지성의 한가운데서는 (또는 그렇다고 믿는 데서는) 보이지 않는 한계로 말미암아 레나타 살레츨이 문득 아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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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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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자들이 불안을 다루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환상은 주체가 자신에게 일관성을 제공해주는 시나리오, 이야기를 만들어 결여를 덮는 방식이다.·······불안은 결여의 자리에서 어떤 대상, 곧 주체가 현실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환상의 틀을 뒤흔드는 대상과 마주칠 때 나타난다.·······환상을 통해 주체는 결여에 대한 보호막을 스스로 만들어내지만 불안 속에서 결여의 자리에 나타난 대상은 주체를 집어삼킨다-즉 주체를 서서히 소멸하게 만든다.(53-58쪽)

 

역사란 현재의 욕망을 투사하여 과거를 해석함으로써 미래를 기획하는 작업입니다. 해석자가 누구냐에 따라 역사는 진실 추구의 전위에 가까워질 수도 있고 수탈체계의 주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이야기의 핵심은 사실史實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자의 “환상”입니다. “환상”은 “결여를 덮는 방식”입니다. “결여를 덮는 방식”으로서 이야기는 반드시 “결여”에 대한 격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지배집단은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황제·신농·복희 까지 중국의 실제 조상으로 끌어들이고, 한漢족 문화권과는 색깔이 다른 동북아 시원문명인 홍산弘山 문화도 흡수하여 고대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장강長江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자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일으켜 재벌 식 MNA 문명사를 날조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왜곡·조작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의 주된 공격 대상이 우리나라임은 물론입니다.

 

우리나라 지배집단도 열심히 역사를 왜곡·조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일본과는 정반대로 자기 내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상고사는 아예 관심 밖으로 쫓아내버렸습니다. 스스로 고대의 강역疆域 범위를 좁히고 한사군을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신라 정통론에 입각해 고구려·백제·발해를 홀대하며 ‘통일신라’라는 허구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들의 관심은 서인 노론 집단이 조선을 일제에 팔아넘긴 이후 역사입니다. 자주·민주·통일 위해 희생한 인물들을 테러리스트로, 매국노로, 빨갱이로 몰고 있습니다. 매판·독재·분단고착이라는 치명적 자기 “결여를 덮는 방식”으로 “환상”의 역사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저들의 “결여”는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부작위가 아닙니다. 매판·독재·분단고착의 작위입니다. 능동적 “결여”입니다. 능동적 “결여”는 끊임없이 “결여”를 재생산합니다. 세월호사건, 메르스대란 모두가 그것입니다. “환상”의 이야기도 온갖 협잡을 동원해 쓰고 있습니다. 저들을 “소멸”시키려면 저들을 저들이 “사용하는 환상의 틀을 뒤흔드는 대상과 마주”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사용하는 환상의 틀을 뒤흔드는 대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저들을 형벌 불안으로 밀어 넣는 것은 물론 진실입니다. 진실은 중립적 사물이나 사태가 아닙니다. 죽임당하고 수탈당한 사람들의 역사, 그 역사의 기억, 그 기억의 이야기가 진실입니다. 물론 결과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기억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결국 잊히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잊은 자처럼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원인을 캐냅니다. 과정을 살핍니다. 구조를 드러냅니다. 심판합니다. 이것이 저들의 “환상의 틀을 뒤흔드는”, 끝내 저들을 “소멸”시키는 사람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환상 실재” 이야기 행렬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저들을 홀랑 “집어삼킨다”면야 달리 무슨 여한이 남아 있을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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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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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대타자의 결여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여를 다루면서 불안과 마주친다. 그러나 주체에게 불안의 근원은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결여의 부재, 즉 결여라고 하는 곳에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53쪽)

 

90세 어르신 한 분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50대 초반에 이미 중풍으로 쓰러졌던 분이라 이후 40년가량 인생은 후유증 그 자체라 할 것입니다. 후유증으로서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삶의 자세가 바뀌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지나치게 신중합니다. 지나치게 소상합니다. 긍정 사안은 지나치게 과소화합니다. 부정 사안은 지나치게 과대화합니다. 지나치게 애착합니다. 계속 검사 받습니다. 계속 상담합니다. 계속 치료 받습니다. 치료 받는 내내 신음을 토해냅니다. 80세 부인은 말합니다. “평생 저 양반 아프단 말에 내 아프단 말 한 마디 끼워 넣을 틈도 없었다니까.”

 

그 분의 모습을 뵐 때마다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사는 재미와 의미 모두를 는적는적 썩여가는 저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불안. 속수무책 끌려갈 때 음산하게 드리우는 기운, 그 “결여의 부재”. “결여의 부재”는 결여의 부정denial, 그러니까 결여를 삶의 한가운데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채워도 다 차지 않는데 뭔가를 채웁니다. 아무리 있어도 없다고 느끼는데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여가 결여인 한 결코 끝내지 못할 부질없는 싸움입니다. 결여란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있어야 하는’ 무엇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본디 없습니다. 무無입니다. 무는 nothing이 아닙니다. 무는 무상無常입니다. 무는 무아無我입니다. 무상은 무아로 말미암습니다. 무아는 무상으로 말미암습니다. 무상의 맥락과 무아의 지평, 그 틈에서 찰나마다 상常과 아我의 실재를 짓는 것이 생명이며 삶입니다. 생명이며 삶인 사건은 불가피하게 통痛(아픔)과 고苦(괴로움)를 수반합니다. 통과 고의 어름에 불안의 기운이 안개처럼 스며있습니다. 생명이며 삶인 사건이 “결여의 부재”로 존속하는 한 불안의 기운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안이 지닌 비대칭적 대칭성이 삶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 입니다.

 

불안은 본디 전략도 무기도 아닙니다. 전략을 짜고 무기를 동원하도록 자극하는 징후·신호입니다. 불안은 본디 아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닙니다. 징후·신호를 잘 읽어 무상 안에서 상을 조절하고 무아 안에서 아를 조절할 경우, 불안은 아군입니다. 조절에 실패하여 여러 격정 상태에 빠질 경우, 불안은 적군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징후·신호에도 끝내 전략을 짜지 못하고 무기를 들지 못할 경우, 불안 그 자신이 생명과 삶 속에 주저앉아버리기도 합니다. 불안이 생명과 삶을 점령한 이것이 이른바 불안장애입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경우, 이른바 공황장애로 나아갑니다.

 

10년 전 전에 10세 된 한 어린이를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공황장애가 뚜렛증후군으로 발현된 희귀하고 어려운 경우였습니다. 수많은 양의사들이 3년 넘게 뚜렛증후군으로 접근해 치료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저는 불안으로 접근해 1개월 만에 치료를 종결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불안이 지닌 저 비대칭적 대칭성의 진실을 소년이 체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어른 아닌 아이였기 때문에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그 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기적(!?) 하나만으로도 제 인생이 불안에 진 빚은 없습니다. ㅍㅎㅎㅎ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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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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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위험을 인식하는 데에서 우리는 불안은 단순히 대상 없는 두려움이 아니라 대상 상실의 위험에 대한 특정한 반응이라는 단서를 얻는다.(49쪽)

 

예쁜 포메라니안 강아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강아지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예쁜 포메라니안은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강아지를 얻었을 때 느꼈던 기쁨을 1이라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그 강아지를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얼마쯤 되겠습니까?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4 이상이라고 합니다.

 

소녀에게 미안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슬픈 기억을 지닌 채 세월은 흘렀습니다. 이번에 병은 소녀의 엄마를 찾아왔습니다. 1.4 이상의 슬픔을 겪었던 소녀는 엄마의 병 앞에서 “상실의 위험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엄마라는 “대상 없는” 결과 이전에 거기로 가는 과정, 그러니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알 수 없음이 낭자하게 뿌려대는 불안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실의 슬픔이 어떠한 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상실의 위험성, 중립적으로 말하면 가능성만 현존할 뿐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울울하게” 불안해집니다. “울울하게”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불편함과 견뎌내기 힘든 “지랄 맞음”을 끌어안고 있는 감정입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이 희한하게 달래지지도 눌러지지도 않고 제멋대로 스멀거리며 휘감기는가 하면 때로는 날뛰고 줄달음치는 감정은 하루 두 번씩 맹렬한 기세로 들이닥칩니다. 잠에서 깨어났으나 눈 감고 누워 있는 시간, 그리고 자려고 누워 눈을 감았으나 잠들지 않은 시간. 바로 이때가 ‘어둠’의 시간이며 ‘알 수 없음’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가장 위험한, 그 위험을 감지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이 마음의 아킬레스건을 물어뜯으며 들이닥치는 바로 이때가 또한 치유의 결정적 기회임은 물론입니다.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이 짧은 시간에 자신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수용의 극대화가 일어나도록 하면 됩니다. 자기수용의 극대화가 일어나도록 하려면 신음소리와 더불어 친절하고 자비롭게 불안할 수밖에 없음과 불안할만함의 모든 조건을 자기 삶의 일부로 품어 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요히 불안을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영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 영혼을 둘러싸는 드넓은 생명의 힘을 감지합니다. 길게 한숨을 토합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잠들고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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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문제란 터질 때 터지는 모양입니다. 마음에 익혀두었던 것이지만 꺼내들지 못한 문제를 정색하고 꺼내들게 하니 말입니다. 한 소설가의 표절 문제로 말미암아 아직도 문단은 물론 우리사회 전체가 웅웅거리고 있습니다. 문학·문학인하고 그다지 서로 의미로운 인연 지닌 사이도 아닌 저 같은 사람도 자꾸 되풀이해서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적잖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표절 논쟁에 참여했던 한 문학인이 한 ‘현재 한국문학의 초라한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이야기는 가당치 않다’는 내용의 말 때문입니다. 권력 이야기는 단 두 사람 사이에도 성립한다는 진실을 모를 리 없는 지식인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커다란 객관적 사실을 전경으로 내세움으로써 내밀한 진실의 고갱이를 은폐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회자되는바 문단 내부 간의 권력관계는 어차피 외부인이니 잘 모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어느 분야든 패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다지 입 댈만한 흥미로운 사항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독자의 처지에서 여전히 대한민국은 문학·문학인 ‘과잉’ 사회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사회는 적어도 조선 이후 양반관료·도학道學지식인·문인을 하나로 인식하는 오랜, 그리고 강고한 전통을 지닌 사회입니다. 그 전통은 식민지 시대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므로 이제 전통이 아니라 인습의 몽당비에 지피는 귀신같은 관념입니다.

 

문학인이 누리는 특별한 지위는 독자들의 대우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인 스스로가 의식·무의식 간에 그 자리를 향해 올라갑니다. 대가나 스타 급 인사들은 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등단만 해도 바로 자세를 바꿉니다. 아마도 대부분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문학에 대하여 자신들끼리 공유하는 조소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할 것입니다. 만일 그게 제스처뿐인 것이 아니라면 왜 그들은 그 조소를 넘어 기어코 문학인이 되었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빤한 겸양 떨기라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거나, 더욱 영악하게 알고도 일부러 그리 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요.

 

문학인의 이런 태도는 정치인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정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기서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켜보겠다고 각고 끝에 입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배지를 다는 순간 그들은 제스처를 통과의례 삼아 바로 ‘나리’ 반열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나리’가 되면 유체이탈 어법을 단박에 습득하고 이내 곳간 불리기에 돌입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표절 문제는 문학의 표절 문제가 아닙니다. 문학인, 문학인의 의 삶의 표절 문제입니다. 문학인의 삶을 정치인의 삶에서 표절해 들이는 문제입니다. 치명적으로 치명적인 표절입니다. 인간을, 삶을 표절한 문학인이 표절 없는 문학을 빚어내는 일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지, 문학·문학인의 꿈조차 꾸지 못하는 무지렁이에게는 심히 궁금한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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