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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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더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해주지 못한다.·······

  ·······제아무리 가능한 모든 데이터와 수치를 쌓아올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기 인식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계산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이야기다. 계산Zählung이 아니라 이야기Erzählung가 자기 발견과 자기 인식에 이르게 해준다.

  ·······푸블리카치오 수이(Publicatio sui, ‘자신을 밝히기’, ‘고백하기’-테르툴리아누스)는 자기 돌봄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푸블리카치오 수이는 진실 추구를 위한 노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은 자아의 윤리에 기여한다.(85-86쪽)


‘학교 우등생이 사회 열등생’이라는 말 적어도 한 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의 핵심이 ‘학교 시험 성적 높게 받는 능력과 사회인으로서 인생을 잘사는 능력은 다르다’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학생으로서 시험 성적 높게 받는 능력 또한 학교라는 사회에서 잘사는 능력이므로 근본적으로 양자를 구태여 대립시킬 이유란 없습니다. 성인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능력이 요구된다는 충고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유독 이 말이 회자된 맥락을 찬찬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뉘앙스가 풍겨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말의 핵심은 ‘공부 잘하는 능력과 돈 잘 버는 능력은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 맞지 싶습니다. 식민지와 전쟁, 매판 독재의 아수라장을 겪으면서 사람들 마음 깊숙이 자리한 생존의 문제, 그것의 단도직입적인 표지인 돈, 그러니까 죽자고 자식 공부시키면서도 ‘암만 공부 잘해도 돈 못 벌면 꽝이다’는 식으로 내포가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학교 우등생이 사회 열등생’이라는 말의 정치경제학적 기반은 “데이터와 수치”로 통치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돈 잘 버는 “데이터와 수치”로 “나는 누구인가?”를 말하겠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신학이 떠받치는 교리입니다. “데이터와 수치”로 “계산Zählung”된 돈 가진 자들이 돈 없는 사람들을 ‘근본 없는 물건’이라 경멸하는 가짜 “이야기Erzählung”가 우리사회의 경전입니다. 혹시 ‘근본 없는 물건’인가요? 그러면 진짜 “이야기Erzählung”를 시작합시다.


본디 인간은 이야기하는 인간homo narrans입니다. 이야기함으로, 이야기함으로 인간입니다. 이야기의 출발은 “푸블리카치오 수이(Publicatio sui)”입니다. 자기 자신을 공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윤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 발견과 자기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자기 발견과 자기 인식”은 돈의 “데이터와 수치” “계산Zählung”이 아닙니다. “자기 돌봄”의 “이야기Erzählung”입니다.


자기 돌봄”은 대칭의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자기 돌봄은 자기 돌아보기임과 동시에 자기 보살피기입니다. 자기 돌아보기는 자기반성입니다. 자기 자신이 신자유주의에 예속된 존재인가를 준열하게 묻는 것입니다. 자기 보살피기는 자기인정입니다. 신자유주의에게 물어뜯기는 자기 자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니다 그렇다, 불연속과 연속의 화쟁和諍 상태에 놓음으로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무애無碍의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무애의 답은 일심一心입니다. 일심은 ‘한마음’이 아닙니다. 일심은 비대칭의 대칭인 진실 전체를 한꺼번에 품는 것입니다. 진실 전체를 한꺼번에 품으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나를 가로질러 넘어선 너의 이야기에 가 닿아야 나온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이야기하기가 이야기 듣기와 결국 하나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하기와 듣기가 하나인 이야기는 아픔과 슬픔으로 함께 흐르는 강이 됩니다. 함께 흐르는 강을 연대라 합니다. 연대가 일심입니다.


연대는 이야기를 드넓음the Spaciousness으로 열어가는 사건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폐기하려는 이야기들을 살려서 엮고 이어가는 운동입니다. 매판독재세력이 엄폐하려는 진실을 기억하고 말하여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발걸음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이들을 그렇게 무참히 떠나보내고 두 번째 맞는 한가위가 다가옵니다. 아이들 앞에서 물어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나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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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3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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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3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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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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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그리스에서 매우 범상치 않은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그것은 뚜렷한 상징성을 띤 사건이었다. 미래에서 온 신호처럼 느껴지는 사건. 아이들이 무너진 집터에서 고액의 지폐 뭉치를 주웠다. 아이들은 그 지폐를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그들은 지폐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돈을·······놀이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돈을 세속화한다. 세속화는 오늘날 너무나 물신화된 돈을 일거에 세속적 장난감으로 변신시킨다.

  ·······세속화는 자유의 실천이며, 우리를 초월성에서, 모든 형태의 예속화에서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세속화는 내재성의 놀이 공간을 열어준다.(75-77쪽)


공포와 당혹에 순간적으로 휘감기며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10대 초반의 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지인이 방문했습니다. 대화중에 고향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집에 가려면 대관령을 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무심히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고향은 평창군 진부면의 산골마을이었으니 말입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조용히 저를 불러내셨습니다. 집 뒤편으로 돌아서자마자 따귀에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천둥소리가 쾅하고 터졌습니다. 놀라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런 성난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아버지는 돌아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한 동안 거기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가 왜 맞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아버지가 서울의 지인들한테는 고향을 강릉시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산골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지성소를 침범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는 바, 거룩하다는 것은 거짓되다는 것입니다. 대개 그 말은 종교적인 신과 숭배 행위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에 쓰이는데 그 종교나 상황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만 경계 밖에서 보면 전혀 까닭 없는 일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한 것으로 꾸미고 그 거룩히 여김 속에서 정색하고 거룩해지려는 모습이 도리어 실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거짓으로서 거룩함의 진경입니다.


본디 거룩한 것은 인간의 아우라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은 자연입니다. 거룩한 자연을 인간에게 은유 또는 환유한 것입니다. 자연의 장엄을 닮은 숭고가 인간에게서 나타날 때 거룩하다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연을 닮은 인간의 거룩함은 목적 없는 박애에 터하고 있습니다. 싯다르타·예수가 거룩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통속 불교·기독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저들만의 목적이 있습니다. 저들은 거룩 떠는 떼거리입니다. 거룩 떠는 떼거리가 왜곡한 거룩 때문에 인간 영혼은 “무너진 집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폐허에 저들은 “고액의 지폐 뭉치”를 숨겨두었습니다. 낮에는 거룩 떨고 밤에는 그 돈 생각하며 킬킬거립니다.


이제 이 거짓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미래에서 온 신호”를 몸에 지닌 존재, 그러니까 노는 아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폐허 속으로 들어가 저들이 숨겨놓은 지폐를 꺼내와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 합니다.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려야 합니다. “물신화된 돈을 일거에 세속적 장난감으로 변신”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세속화”입니다. “세속화는 자유의 실천이며, 우리를 초월성에서, 모든 형태의 예속화에서 해방”합니다. “그리하여 세속화는 내재성의 놀이 공간을 열어”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내재성의 놀이 공간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로 싯다르타이며 예수라는 진실이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성인이 초월적 공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재적 공간에서 노는 평범한 필부필부가 거룩합니다. 위대한 성聖을 사소한 속俗이 품습니다. 사소한 속俗을 회복할 때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구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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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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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증진을 위해 본래는 노동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놀이의 영역마저 점령한다. 감성 자본주의는 삶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를 게임화한다.·······

노동의 게임화는 호모 루덴스를 착취한다. 인간은 이제 놀이하는 가운데 지배의 메커니즘에 예속된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진정한 행복은 일탈·······에 있다.·······노동과 생산의 과정에서 분리된·······놀이는 사물을 자본의 신학과 목적론에서 해방시켜 사물의 완전히 다른 쓸모를 발견하게 해준다.(71-75쪽)

 

2013년 이른바 중독법안 논쟁이 한창일 때 토론회 패널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쟁점은 둘이었습니다. 인터넷게임에 아이들이 중독된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고 할 때 그 책임을 인터넷게임 관련사업자에게 지우는 것이 맞는가? 진중권, 이인화를 비롯한 뜨르르한 패널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이를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그 법안이 전제하는 중독 개념도 오류거니와 당최 법안 발의가 토건·경찰 행정적 발상에 터한 정치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간단한 기조발언만 하고 토론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아, 무명의 한의사라 발언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부각시킬 쟁점이 아니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사실은 좀 더 깊고 본질적인 쟁점이 있었습니다.

 

“게임은 과연 놀이인가?”

 

사전적 의미로만 본다면 질문 자체가 실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에서도 주된 것은 그 말 속에 contest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실제 속에서는 승패가 걸린 노동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각적인 성공과 보상 체계가 작동함으로써 무한히 가속되는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게임화된 노동이든 노동화된 놀이든 “호모 루덴스를 착취한다. 인간은 이제 놀이하는 가운데 지배의 메커니즘에 예속된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 문제는 중독의 쟁점을 넘어섭니다. 토건·경찰 행정적 착취보다 깊은 문제입니다. 놀이의 왜곡과 훼손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노동과 생산의 과정에서 분리된·······놀이”만이 인간을 “자본의 신학과 목적론에서 해방시켜·······준다.

 

호모 루덴스”의 복원. 목적도 목표도 계획도 의미도 없이 즐거이 노는 인생, 그런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주어집니다. 이런 능동적 휴식으로서 놀이가 예속적 노동을 해방합니다. 어찌 노동 없이 사는 게 가능한가, 궁금해 하실 수 있습니다. 노동과 놀이는 입자적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착취 없는 노동일수록 놀이와 이루는 파동적 교집합 영역이 커집니다. 노동과 놀이가 파동적으로 일치할수록 인간의 탐욕은 줄어듭니다. 인간의 탐욕이 줄어들수록 자본주의의 음모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음모가 는적는적해질수록 노동과 생산은 휴먼스케일을 유지합니다. 휴먼스케일이 유지되는 세상은 그 자체가 놀이입니다. 놀이인 세상에서라면 놀이는 노동을 감싸 안은 어머니와 같습니다.

 

결국 놀이가 인간을,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 “지배의 메커니즘”에서 이탈하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사물의 완전히 다른 쓸모를 발견”하는 길에 서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한의사입니다. 제 가난 때문에 돈 더되는 의료 노동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웃과 함께 자유로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노동을 놀이로 삼을 생각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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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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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은 반성 이전의 층위, 행위하는 인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반의식적이며 신체적이고 충동적인 층위에 속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이러한 반성 이전의 층위에서 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기분을 장악한다. 심리정치는 기분을 통해 인격 깊숙한 부분까지 개입한다. 기분은 인격의 심리정치적 조종을 위해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70쪽)


기분이란 말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 바로 “기분이다!”입니다. 이는 찰나적인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즉 기분파가 행동을 개시할 때 외치는 강령 같은 것입니다. 기분은 판단 없는 결단을 촉발시키는 모멘트입니다. 즉자적 긍정성이므로 당최 부정성이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저자는 이를 “반성 이전의 층위”라 합니다.


반성 이전의 층위는 본디 포유류의 층위입니다. 포유류의 층위에서 윤리적 판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좋다 싫다면 그만입니다. 옳다 그르다는 없습니다. 이 부분을 조종하면 욕구를 예속 상태로 묶어둘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곳간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유류는 욕구 너머 욕망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넘어선 욕망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획득한 것입니다. 진화의 성공이기도 하고 실패이기도 한 인간의 욕망에는 음성되먹임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항문 없는 진드기처럼 터져 죽을 때까지 욕망은 제 길을 갑니다. 바로 이 욕망의 불가제약성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전지전능해집니다.


결국 문제는 욕망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악마성은 “기분을 장악”하여 욕망을 무제한 증폭시키는 데서 드러납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려면 욕망의 실재를 직시해야 합니다. 욕망의 무한 긍정이 악을 생산한다고 해서 욕망을 깡그리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을 답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선은 악 앞에 무력합니다.


긍정과 부정의 양극단을 떠난 역동적 중도가 답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공존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욕망의 휴먼스케일을 합의하는 사회적 지혜가 중도입니다. 휴먼스케일의 근간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등한 공적 참여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등한 공적 참여로써 인정한 욕망의 스펙트럼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게 중도입니다.


중도를 향한 길 위에 국가도 있고 정치도 있고 법도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이 인간의 이상입니다. 물론 현실은 다릅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는 그 이상에서 너무 멀리 이탈한 상태입니다. 지배집단이 대놓고 신자유주의 앞잡이가 되어 휴먼스케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단 하나뿐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어서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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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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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소진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는 심리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는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을 함께 가져온다.

  미국의 자기계발서에서 통용되는 마법의 주문은 힐링이다. 힐링이란 효율과 성과의 이름으로 모든 기능적 약점, 모든 정신적 억압을 치료를 통해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자아의 최적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의 최적화와 완전히 부합하는 부단한 자아 최적화는 파괴적이다. 그것은 결국 정신의 붕괴로 끝나고 만다.·······(47-48쪽)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50쪽)


지상파 3사와 조·중·동 같은 황색저널리즘의 적폐는 가히 전방위적이거니와 그 가운데 말 더럽히는 짓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표적으로 희생당한 말이 바로 멘토와 힐링입니다. 저들이 떠들기 전에 이 두 말은 매우 기품 있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개나 소나 멘토라 부르고, 연예인 미셀러니에 값싼 눈물 섞은 설정을 힐링이라 부른 이래 두 말은 거의 막말 수준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말의 타락은 말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 쓰는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착각 상태에서 “시스템의 최적화와 완전히 부합하는 부단한 자아 최적화”로 빨려 들어갑니다. 한 번 빨려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자기계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한 생이 끝납니다. 이런 생은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 그 자체입니다. 심리적 질병을 본질로 삼은 이제는 바야흐로 “소진의 시대”입니다.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은 심신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상생활에서 의욕과 기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의학적으로 정의된 용어가 아니고 사회학·경영학·사회복지학 분야에서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후를 드러내는 용어로 정착시킨 것입니다. 의미 맥락을 따져보면 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장애를 사회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진증후군과 본질이 같은 병리 현상으로 초신성증후군Supernova Syndrome이 있습니다. 정상을 향해 전력질주한 사람이 성공한 직후 갑작스럽게 깊은 우울상태로 빠져드는 소진 현상을 뜻합니다. (초신성은 별의 진화 최종단계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엄청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방출하고 서서히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소진증후군이든 초신성증후군이든 우울장애든 각자의 영역에서 명명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의학은 사회정치적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하고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의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인 통찰은 이미 넘쳐나고 있지만 이론적 완성이나 실천의 측면에서는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학은 여전히 오만합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구체적인 치료 도구를 가질 수 없는 한계에 막혀 결국 의학의 눈치를 보거나 긍정주의 따위에 기대는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적거리는 사이 신자유주의의 “파괴”는 가차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정신의 붕괴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정신의 붕괴는 육체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되는 것이 필연의 인과입니다. 소진의 시대는 곧 제노사이드의 시대입니다. 제노사이드는 힐링이란 매혹적인 독가스를 든 친절한 멘토가 자행하는 안락사입니다. 멘토의 안락사는 자살의 형태를 취합니다. 멘토의 힐링 멘트에 ‘좋아요’ 클릭으로 “디지털 아멘”(26쪽)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소진의 시대, 제노사이드의 시대, 아니 자살유혹 시대를 뚫고 인간다운 삶을 단 하루라도 살기 위해 사. 소. 한. 제안 세 가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지상파 3사와 조·중·동과 결별하시기 바랍니다. 지니고 계신 자기계발 서적을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멍 때리고 노는 것 빼고 모든 일을 딱 17초만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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