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질병 그 자체는 예측 가능성의 상실이다.·······질병은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85쪽)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의 세포 안에 들어 있는 소기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포 호흡에 관여하여 에너지를 생산합니다. 자체 DNA를 지녔습니다. 본디 독립적인 외부 생명체였는데 진화 과정에서 공생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추정컨대 미토콘드리아가 처음 몸속으로 들어왔을 때 숙주 생명체는 질병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염증반응이나 중독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사건 “그 자체는 예측 가능성의 상실” 상태였습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며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숙주 생명체는 안정적 에너지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혁명적 변화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질병은 분명히 예측 가능성과 통제의 상실 사건입니다. 그 상실이 몰고 오는 불편과 고통 때문에 질병은 박멸의 대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불편과 고통을 견디면 변화가 찾아옵니다. 변화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줍니다. 상실을 보상하는 획득입니다. 질병에 대한 사유를 확장해야 합니다. 가령 완벽하게 예측하고 통제하여 질병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생명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요? 그 생명의 역사가 지금과 같은 진화로는 이행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인간 존재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인간은 불편과 고통을 관통하고서야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변화의 산물입니다. 질병의 산물입니다. 아니, 질병입니다!


옛말에 “골골 백년 무병 단명”이라 했습니다. 질병의 경험으로 생명의 요체를 증득하면 장수하는 이치를 명쾌한 대구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수는 다만 오래 산다는 뜻을 넘어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설혹 무병장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장수는 그저 생명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연장을 위한 탐욕에 온갖 의술과 약, 식품, 운동이 들러붙어 돈을 뜯어가는 풍경이 오늘 우리의 통속한 질병 인식 수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질병 그 자체는 예측 가능성의 탐욕을 내려놓는 것이다. 질병은 통제의 탐욕을 내려놓은 채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질병이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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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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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몸의 문제는 행위action의 문제다.(83쪽)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도중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덜덜 떨며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인간이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의 사랑할만한 점은, 인간이 건너감이고 몰락이라는 데 있다. 나는 오로지 몰락하는 자로서만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저편으로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엊그제 시인 김소연이 쓴 글 <가장 합리적인 문장>에 인용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일부를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인간은 건너감, 그러니까 “행위action” 그 자체입니다. 행위, 그러니까 “움직임은 삶을 정의하는 방식”(크리스틴 콜드웰의 『몸으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삶의 정의는 결국 몸에서 나옵니다. “모든 몸의 문제는 행위action의 문제”입니다.


행위한 만큼이 삶입니다. 살아낸 만큼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냄으로써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기 위하여 살아내야 합니다. 살아낸다는 것은 행위한다는 것입니다.


행위하는 몸을 은유하고 환유함으로써 말이 생겨납니다. 말을 통해 마음이 형성됩니다. 마음이 행위의 경계를 훌쩍 넘어 달아날 때 마음병이 찾아옵니다. 마음이 병든 사람은 결국 몸도 놓치게 됩니다.


매우 명민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절제할 틈도 없이 고급 독서와 사유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명문고, 명문대로 승승장구했습니다. 부모도 자신도 그것이 마냥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급전직하 우울증의 낭떠러지로 떨어진 다음에야 모두 당황하고 허둥거렸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왜 우울증이 들이닥쳤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에게 나지막이 일러주었습니다.


“인간은 몸입니다. 몸을 따돌리고 허공만 챙기는 마음이 그대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과제 하나를 내주었습니다.


“세 끼 밥을 손수 챙겨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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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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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발화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불러일으킨다.·······이야기들을 듣는 데 있어 문제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말하는 몸을 듣는 것이다.·······몸은 이야기에 특정한 형태와 방향을 부여한다.(80쪽)


새누리당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회 위원장에 김을동이 앉혀진 것을 두고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새누리당이 김을동을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장에 앉혔다는 것은 까다로운 논의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이다. 지극히 섬세하지만 명백한 문제를 놓고, 반지성주의와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가.”


이 짧은 글에는 김을동이란 인물을 상징으로 하는 새누리당 “이야기에 특정한 형태와 방향을 부여한” “”의 실상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암시가 구태여 입 댈 것은 아니라서 저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김을동이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일으킨 역사쿠데타의 얼굴마담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서사적 교차가 결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김을동이 유명한 연기자 출신이라는 데서 맥락을 이루는 서사입니다. 저들이 ‘올바른’ 교과서라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짓지만 실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이 ‘개선’이라고 목청을 돋우지만 실은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존엄’이 세월호사건에서 손수 시범을 보인 바가 살아 있는 경전이 되어 역사쿠데타 세력의 행동강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놓고 기만하는 배짱입니다.


다른 하나는 김을동이 김좌진 장군의 후손으로 회자되는 기묘한 서사입니다. 그 통속한 이야기가 사실이면 사실인 대로 거짓이면 거짓인 대로 그 서사는 우리 현대사의 불쾌한 스캔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항일독립투쟁 영웅의 후손이 독립군 토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를 미화하는 일에 앞장선다, 또는 독립군 토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를 미화하는 일에 앞장서면서 자기 선조가 항일독립투쟁 영웅이라 주장한다, 이 둘 모두 말 안 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기든 아니든 대놓고 이런 분열적 상황조차 이용해먹는 상술입니다.


이 두 서사의 교집합은 진실의 왜곡입니다. 그 왜곡을 엄폐하는 것이 바로 반공주의입니다. 반공주의는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고 거기 부역한 자들이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동원한 야비한 술수입니다. 매판과 독재, 그리고 분단 고착 세력을 지키는 살인병기입니다. 3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식민의 삶을 살았으므로 부역행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대다수 민중의 죄책감을 약점으로 잡고, 3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 전쟁을 통해 얻은 공포심·적대감을 극대화함으로써 반공주의는 초대박 상품으로 굳게 자리 잡았습니다.


반공주의의 축복을 받으며 애국을 전유한 매판독재분단고착세력은 이제 유체이탈어법으로 일가를 창립했습니다. “이야기들 속에서 말하는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데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반대의 유체이탈어법도 있습니다. 몸을 이탈시키고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 다 몸과 이야기의 분리, 몸과 마음의 분열입니다. 몸을 떠난 이야기는 허구이며, 몸을 떠난 마음은 허깨비입니다. 허구는 이야기가 아니고 허깨비는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기 원합니다.


국정교과서 문제는 다만 교과서 문제가 아닙니다. 교과서 이야기의 몸, 그 몸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몸은 바로 자주독립입니다. 민주주의입니다. 민족통일입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 놓고 외출한 혼을 하루 빨리 되찾아야 합니다. 250명 말고 새끼들이 얼마나 더 죽어나가고서야, 그 몸의 말을 얼마나 더 틀어막고서야 우리가 인간 구실을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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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로서 우리의 가장 어려운 의무들 중 하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듣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이다.·······타자를 위해 들음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듣는다는 것·······이야기에서 목격의 순간은 요구의 상호성을 확고히 하는데, 이 때 각각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77-78쪽)


2015년 10월 18일 오후 광화문에서 단원고 명예3학년 9반 정다혜의 아버지가 딸아이 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팠습니다. 슬펐습니다.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절망감으로 아뜩해졌습니다. 홀로 술을 마시며 제 영혼이 뒤척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밤늦도록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았습니다. 저 또한 한 딸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딸을 추억하던 그 아버지의 음성이 여태도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듣기는 어려운 일”임을 통감합니다. 어려워도 들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 우리의 가장 어려운 의무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타자를 위해 들음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듣는 그 “때 각각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인간은 인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혜를 죽이고 다혜 아버지도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은 오늘도 귀를 막고 있습니다. 저들은 듣는 인간homo auditus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기가 떠들 때만 귀를 열어 자기 말만 듣습니다. 자기만의 말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도착 귀鬼들입니다. 저들은 이제 역사를 죽이자고 떠드는 자기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사나무 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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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내용으로 환원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미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 효과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어떤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74-75쪽)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여기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라”는 요청에 극진히 감응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경청傾聽합니다. “내용으로 환원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짓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전제와 분석틀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경청敬聽합니다. “이야기를 이미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야기 자체를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경청하고 또 경청함으로써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고 “그 효과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어떤 진실을 발견”할 때,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 하나 탄생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아픈 이야기를. 그것도 슬픈 이야기를. 그 사이 제가 겪은 가장 근본적radical이고 급진적radical인 변화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 몸이 먼저 골똘히 듣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골똘히 듣는 자세를 취하면 감성은 활짝 펴지고 이성은 고요히 접힙니다. 이야기를 흠뻑 들을 수 있습니다. 감염이 스며들고 경험이 번져옵니다. 진실에 닿습니다. ‘사흘’ 뒤 이야기와 저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꽃피기 시작합니다. ‘사흘’은 감응 발효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사흘’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제가 이야기로 아픔과 슬픔 전해온 사람을 치유한 적은 없습니다.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무슨 말이든 남의 말을 들을 때 무조건 무장해제하고 듣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습관이 때때로 제게 크고 작은 손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일상의 삶은 대부분 손익을 다투는 거래입니다. 그 거래에서 ‘사흘’이 필요한 상대방은 많지 않습니다. 상담실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물론 맞지만 저 같은 어수룩한 사람한테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는 손해가 그나마 돈 따위면 견딜만합니다. 더러 인격과 인연에 끼쳐오는 손해는 참으로 쓰디씁니다. 삶의 이런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운명이라 하면 너무 남루해집니다. 저는 이것을 천명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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