昏庸無道拒宇宙

春秋詖聲絶氣運

蜜寐否之迷昧魂

子酉地天離戀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다.(342쪽)


이른바 잘나가는 한의사 후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제게 물었습니다.


“형님, 재미있으세요?”


저는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재미있지.”


그 또한 주저 없이 제 대답에 응했습니다.


“저는 재미없습니다.”


그가 재미없는 까닭은 그의 진료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재미있는 까닭은 제 진료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음병을 상담과 숙담熟談으로 치유하고, 더 나아가 실생활의 난제를 숙론熟論으로 풀어냄으로써 환우와 함께 삶의 서사를 써가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의 “이야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사회의 베스트셀러 등 뒤에서 벌어지는 통속한 음모가 이 이야기에 들어설 여지란 근본적으로 없는 것입니다. 오직 나눈 사람 각자의 삶에서 소리 소문 없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갈 뿐입니다.


제 진료 이야기가 그러하듯 제 인생 이야기도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생 이야기가 베스트셀러로 되려면 승리나 기획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제 인생은 상처와 유기遺棄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신음소리, 치유의 웅얼거림이 뒤엉킨 이야기가 조증 숭배하는 ‘투명사회’에서 왁자하게 소비될 리 없습니다.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만이 소리 소문 없이 정독하고 재독할 뿐입니다.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이 제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제가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또는 포개지고 또는 쪼개지며 서로의 이야기들은 엮이고 기억됩니다.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즉시 사라지는 운명, 그 베스트셀러의 천형은 우리가 짊어질 바 아닙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내버리는 삿된 힘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줄기차게 번져갈 것입니다.


60년을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던 나날, 그 이야기로 살았습니다. 오늘 남은 날들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재미있나?”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품은 그 자신의 죽음 속에서 보편적인 박동을 듣는 데 있다.·······자신이 파괴되는 순간에조차 완전히 살아 있다.·······“작은 정신”이·······“큰 정신”으로 녹아드는 것과 같다.·······조만간 죽을 것이다.·······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고 그것은 괜찮은 일이·······다.(342쪽)


“강은 여기서 태어나서, 자신에게 주어진 거리만큼 흘러가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곧게 때로는 구불구불 돌아서,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바다에 닿을 때까지 계속해서 흐르는 거야. 난 이 모든 것에서 안식을 찾아.”

“어떻게?”

“강물은 알고 있어. 흘러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것을 만나든 간에 결국은 아름다운 바다에 닿을 것임을. 알고 있니? 결말은 늘 아름답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하지만 죽음은 아름답지 않아.”

“아름답지 않은 건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겠지.”


·······삶은 계속될 것이다.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었다. 단지 때가 되면 누그러질, 건강한 슬픔만이 있을 뿐이었다.


_팀 보울러(『리버 보이』)


강물이 흘러 결국은 바다에 닿는 것과 같이, “작은 정신”이·······“큰 정신”으로 녹아드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은 죽음에 가닿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고 그것은 괜찮은 일입니다. 바다가 아름답듯 죽음도 아름답습니다. 조만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되는 순간에조차 완전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죽음 속에서 보편적인 박동을 들을 때 우리 삶에는 기품이 어립니다. 기품어린 삶이 계속되는 동안 괴로움에 시달릴 일은 없습니다. 단지 때가 되면 누그러질, 건강한 슬픔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건강한 슬픔에서 우리는 안식을 찾습니다.


기품 있는 삶. 삶의 기품. 아름다운 죽음. 죽음의 아름다움. 이 얼마나 우리가 꿈꾸는 가치들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죽는 현실은 이런 꿈을 가차 없이 짓밟습니다. 특히 오늘 여기 대한민국은 삶일랑 남루하고 추하게, 죽음일랑 비참하고 원통하게 만드는 생지옥 그대로입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인간의 생사를 어찌 이다지도 모독한단 말입니까. 이 백성이 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물대포를 맞으며 살아야 하고 침몰시키는 배에 갇혀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삶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품을 수탈하지 않는 국가가 보고 싶습니다. 죽음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아름다움을 능멸하지 않는 국가가 보고 싶습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존재하는 것은 신과 씨름하는 것이다.(338쪽)

  ·······상처는 타자의 고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열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열린다.(339-340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32장에는 하느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 에서의 굶주림을 약점 잡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취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족을 먼저 보낸 뒤 홀로 얍복 강변에 머무르다 야곱은 하느님의 공격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힙니다. (환도 뼈를 부러뜨렸다는 것이 통속한 해석이지만 실제로는 생식 능력을 파괴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원의에 충실한 이해입니다. 구약성서 전통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것은 한 인간의 죽음에 해당합니다.) 야곱이 이 치명적 상실과 고통을 견디고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마침내 그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의 인정은 야곱(발뒤꿈치)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하느님이 싸운다/다스린다/보존한다)로 바꾸어주는 선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축복사건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진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통속주의 이해는 축복을 개인 기복의 차원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이 내러티브에 가한 모욕입니다.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 이야기의 고갱이는 축복 자체가 아닙니다. 기복은 더욱 아닙니다. 축복은 방편이고 변화가 요체입니다. 변화의 기축에는 죽음과 맞먹는 상실이 존재합니다. 축복의 대칭 지점에 놓인 극한의 상실, 그 고통을 주목하지 않으면 변화가 요체라는 진실도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 자칭하는 모든 자들이 이 진실을 놓쳤기에 결국 하느님은 스스로 극한의 상실, 그 고통을 경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겟세마네동산 기도에 이은 골고다언덕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것, 십자가를 지고 올라 마침내 거기 달린 것은 얍복 강변 야곱의 씨름을 하느님 스스로 재현·완수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 관건의 한 이치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돕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진실은 하느님은 인간이 되고서야 자신의 존재 방식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절정의 반전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운 사건! 하느님이 인간의 도움을 받은 사건은 인간이 몸의 존재로서 겪는 도저한 상실과 부정, 공포와 절망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상처 입힌 하느님과 상처 입은 하느님이 만났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은 비로소 쌍방향으로 열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전지전능하고 일방적으로 아가페를 베푸는 존재가 아님으로써 참다운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상처는 타자의 고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열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열린다.” 사람의 말을 듣기도 하고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을 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씨름 이야기 코다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과 야곱의 문답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발뒤꿈치, 곧 탐욕·계략입니다.) 이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이 싸운다, 곧 탐욕·계략을 공격한다. 하느님이 다스린다, 곧 탐욕·계략을 무너뜨리고 공존·연대를 이룬다. 하느님이 보존한다, 곧 길이 공존·연대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명이다. (무능, 곧 백전백패다.) 하느님이 야곱과 이름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하느님이 모를 리 없고 야곱이 모를 리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서로 존재 방식을 달리 하겠다는 상호 혁명의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나사렛 청년으로 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야곱,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차례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탐욕·계략을 쳐서 부러뜨려야 합니다. 야곱임을 기꺼이 부정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내 안에 스스로 있는 “신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웰빙과 힐링이 만연한 오늘날 모든 멘토는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통속한 멘토, 심지어 승려 등 종교 지도자조차 그것을 개인적 기쁨과 안녕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런 따위의 행복은 당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중독 상태일 따름입니다. 인간 생명은 연계된 전체로서 존재합니다. 타자를 듣기 위해 안으로 열리고 자기를 말하기 위해 밖으로 열리는 쌍방향 교감이 누락된 채, 홀로 느끼는 행복은 탐욕·계략의 속임수에 놀아난 부작용입니다. 부작용으로서 행복은 반드시 누군가의 것을 수탈한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전을 들고 자본이라는 ‘이름’을 지닌 하느님은 이 수탈을 성공이며 공공선이라 꼬드깁니다. 우리사회 지배층과 그 마름들은 이미 이 꼬드김에 다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각 제 손으로 죽인 아이들의 영혼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사코 야곱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탐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탐구를 지시하는 것은 오만이다.(334쪽)


2014년 5월 11일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해서 빈축을 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무슨 누구 책임, 이런 식으로 수습하지 말고 온 나라가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애통해하고 눈물 흘리고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우리나라도 선진국의 꿈을 가지고, 이번에 (하나님이) 추락시킨 실종된, 침몰한 세월호와 함께·······다시 한 번 일어나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참으로 천박하고 허접한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몰하려는 대한민국 건져내 선진국 만드시려고 아이들 250명을 침몰시켜 죽이셨다는 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왜 하필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민주국가를 침몰시킨 권력의 주구 수천 명이 아니고 죄 없는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을까요?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왜 하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자식 250명을 잃은 부모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을까요?


강자를 위해 약자를,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이 따위 논리가 하나님의 논리라면 대체 그 아들, 아니 그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킨 논리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이 땅의 통속 기독교는 죽임당한 250명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반열에 올려야 마땅합니다. 만일 이를 신성모독이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침몰시키셨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더 참람한 신성모독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침몰시키신 것은 김삼환류 인간들의 논리와 상식인 듯합니다. 그 대신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탐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천하 이치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탐구를 지시하는” 저 “오만”을 건져 올리신 듯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어설프게 ‘하나님의 뜻’을 읊조리는 맹랑한 주둥이는 필경 우주의 기운으로 혼을 정화하는 가금 신을 예찬하는 부리와 동급일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들·······믿음·······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177-178쪽)


아우슈비츠에 끌려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신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느끼는 사람의 삶의 실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에게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전도”라는 이름으로 탐구를 지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전투적 통속 기독교의 전도폭력은 이미 사회문제 수준에 도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심지어 광화문 대로에서 세월호사건 유족을 종북이라 떠들어대며 그 고통을 모독하고 그 의미를 강탈한 기독교 종파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만한 언행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그냥 오물입니다.


고통, 무엇보다 인간에 의해 의도된 고통의 의미는 ‘하나님’에게 물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묻는 순간, 의도한 인간을 은닉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삼환 목사는 대놓고 그 책임을 묻는 식으로 해결하지 말자고 두둔했습니다. 누구에게 화살이 돌아갈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권력의 주구들이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이런 범죄은닉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은닉할수록 진실은 자명해집니다. 그 진실에서 고통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눈물 흘리며 청문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