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7장 본문입니다.

 

大哉.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대재. 성인지도. 양양호발육만물 준극우천.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 

우우대재. 예의삼백 위의삼천 대기인이후행. 

故 曰苟不至德 至道不凝焉. 

고 왈구부지덕 지도불응언. 

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고 군자 존덕성이도문학 치광대이진정미 극고명이도중용 온고이지신 돈후이숭례. 

是故 居上不驕 居下不倍. 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시고 거상불교 거하불배. 국유도 기신 족이흥 국무도 기묵 족이용.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시왈 기명차철 이보기신 기차지위여.


크도다. 성인의 도여. 양양하게 만물을 발육하여 그 높음이 하늘에 닿았다.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 삼백 가지와 위의 삼천 가지가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으로 하지 아니하면 지극한 도는 실행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2. 전체적으로 대구對句를 통해 속뜻을 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 장입니다. 하지만 대구가 그리 치밀하지 않고 일관성을 잃은 듯한 메시지가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해석이 두루뭉술한 순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대구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문맥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3. 우선 성인의 도와 예의, 위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인仁과 예禮의 관계와 같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군자의 도는 이상형으로서 어떤 실체substance처럼 인식되고 예의, 위의는 실천 과정처럼 인식됩니다. 이는 후대 주희의 체용體用 대비와 맞물리는 것이겠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도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실천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4. 이런 빛에서 그 아래 문장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하지만 어조사 이而를 앞뒤로 해서 배치된 말의 내용이 누가 봐도 상반된 것인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접으로 처리해서 대구를 통한 강조 의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덕성이 존귀하게 되고, 넓고 큰 경지에 이르고, 높고 빛남이 극에 달하고, 이미 갖추어진 옛것을 익히고, 돈후한 것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경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고 배우며,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며,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 나아가며, 예법을 지키는 것은 부단한 닦음, 깨어 있는 실천 감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도란 찰나마다 치열한 실천 과정으로 증명되는 것이지 관념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반적 대구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각 이而 뒤에 오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 말은 이미 온고溫故에 무게가 실린 채 그 의미가 정착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순접으로 읽은 데서 비롯한 오류입니다.

 

성인의 도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완성된 실체적 존재로 관념화, 박제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 바로 온고이지신입니다. 물론 순 임금과 같은 성인의 이상형이 실존했다는 전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순 임금은 순 임금 자신의 실천을 한 것뿐입니다. 그 예를 본받되 우리는 우리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지신知新입니다. 바로 그 지신이 관건입니다. 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늘 묻고[문問] 배우고[학學]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고[진정미盡精微]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고[중용中庸] 세세한 예법 하나까지 지키는[숭례崇禮] 치열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기도 하고 자긍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도를 적확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면서도 자랑하지 않으니 겸손이요, 비록 성인이란 자의식은 한사코 내려놓지만 당당하게 평범함에 깃드니 자긍입니다.

 

5.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거상불교 거하불배居上不驕 居下不倍]”는 말이 바로 겸손과 자긍을 역설의 연금술로 달여 낸 것입니다. 다만 저는 배倍의 뜻을 달리 새깁니다. 윗사람의 교만과 아랫사람의 배반은 썩 어울리는 대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배倍는 비속하다, 더 나아가 비굴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만과 대칭이 될 수 있습니다.

 

6. 국유도國有道 이하 문장 역시 종래의 읽기를 답습하면 전체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리 읽으면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제10장에서 말한 바,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더욱 분발하게, 곧 흥興하게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알고 있음에도 덮어주어, 곧 용容하여 장차 바른 길로 나올 여지를 남겨둔다.”

 

이런 해석은 제6장에 나온 순 임금의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 실천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성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문장이 제26장 말미에 오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7. 과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국민을 부하로 여겼습니다. 건설회사 CEO 출신 대통령은 국민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여겼습니다. 현임 대통령은 국민을 무엇으로 여기는 지 궁금합니다. 아무리보아도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 여기지 않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신민臣民이거나 신도信徒 아닐는지요. 또는 둘의 결합이든지·······.


두루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분명히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의 권력도 국민에게서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공무원 집단의 우두머리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현임 대통령은 유체이탈 어법으로 국민을 가르치고 꾸짖습니다. 이는 헌법 제1조를 전혀 달리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국민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생각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국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실천, 그러니까 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왔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오히려 물색없을 따름입니다. 마음 다해 발원發願합니다. 각자 대통령인, 아니 각자 국가인 국민이여, 부디 헌법 제1조 제2항을 되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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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세 번째(마지막) 문단입니다.

 

詩云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 所以爲文也 純亦不已.

시운유천지명 어목불이 개왈천지소이위천야 어호불현 문왕지덕지순 개왈문왕지 소이위문야 순역불이.


『시경』에 이르기를, “오직 하늘의 명은, 아아 충실하여 그침이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말한 것이고, “아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아니하는가, 문왕의 덕의 순일함이여!”라고 하였으니 대개 문왕이 문文이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순일하고 또한 그치지 아니함이다.  

 

2. 목穆의 뜻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미美다, 누구는 심원深遠이다, 누구는 충실充實이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문맥에 답이 있습니다. 이 문단 전체의 맥으로 보아 목穆도 순純도 불이不已로 귀착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이는 제26장 전체 문맥에서 불식不息 또는 무식無息과 같은 의미 군群을 형성합니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온전한 도리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며 과정이기 때문에 수단화되어서도 안 되고, 결과적 상징물로 모셔져도 안 된다는 원칙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 문맥에서 그 온전한 도리는 지성至誠이며 다른 표현은 지성의 변주variation입니다. 결국 지성불식 유구무강至誠不息 愈久無疆의 빛 아래서 부분적 이해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목은 지성의 범주와 동떨어질 수 없는 말입니다. 충실充實이란 뜻으로 읽는 게 비교적 타당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그냥 성誠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은 성이되 사물의 이치를 가없이 맑게 드러내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뒤에 문文 임금의 덕을 순純이라 한 것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3. 문文 임금 덕은 순수함입니다. 그의 정치적 실천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목적이므로 무슨 이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순수합니다. 백성과 온전히 소통하므로 그 기품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순수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불이不已입니다.

 

4. 맑고[穆] 순수한[純] 소통이 끊임없이[不已] 넘실거리는 축제로서 세상, 그 대동 잔치를 우리는 2008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촛불집회, 바로 그것. 구호와 재잘거림이 하나인 여고생이나, 아빠 등에 올라타고 방글대는 아가나, 소주 한 잔 하고 덩실거리는 중년 사내나, 스크럼 짜고 노래를 연방 불러대는 대학생이나, 유모차 밀면서 옆 사람과 수다 떠는 아줌마나 모두 맑고 순수한 연꽃송이였습니다. 그들이 문文이고, 그들이 천天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촛불은 시대의 모든 어둠으로 번져갔습니다. 강정. 영도. 평택. 명동. 밀양. 안산. 광화문. 맑고 순수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들의 촛불 행렬을 따라가면 언젠가 대한민국 자주·민주·통일의 바다에 다다를 것입니다. 이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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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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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26-27쪽)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성과주체는·······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28-29쪽)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와 “주인이자 주권자이다.”는 상호모순입니다. 한병철은 알랭 에랭베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는 주권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규율사회의 피안에서>라는 소제목 아래 있는 글을 마무리하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는 주권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한병철의 논리적 실패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만 맞을까요?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한병철은 자기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논리적 실패를 통해 결과적으로 진실의 전경을 드러내 보인 셈입니다.


동질적 긍정성의 시대를 노동하는 성과주체가 스스로 열었다면 모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노동의 열매를 수탈하는 자들이 이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 수탈자들이 동원한 전략적 이미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로서 언어가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상태입니다. 마치 현 정권이 원칙이라는 언어를 전유함으로써 원칙의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동질적 긍정성이면서 동질적 긍정성이 아닙니다.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착취함으로써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일치하게 되는 역설보다 이 역설이 더 근본적입니다. 이 역설이 우울증 역설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입니다. 이 역설의 인식과 실천을 누락시키면 우울증은 개인 문제로 환원되고 맙니다. 우울증은 정치경제학적인 문제입니다. 우울증에 입대는 사람은 자신이 공적 참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병철의 글은 모호해 보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의 몰이해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귀책사유가 환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특히 부모의 미명으로 가해의 실재를 덮고 환자 스스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몰아버리거나, 설혹 가해 실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다그칩니다.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 아이들이 철이 없어 못 나왔다고 말한 세월호사건 해경의 태도와 같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이란 교묘한 음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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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두 번째 본문입니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천지지도 가일언이진야.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기위물부이 즉기생물불측.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愈也久也. 

천지지도 박야후야고야명야유야구야. 

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成辰繫焉 萬物覆焉. 

부천 사소소지다 급기무궁야 일월성진계언 만물복언.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금부지 일촬토지다 급기광후 재화악이부중 진하해이불설 만물재언.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之. 

금부산 일권석지다 급기광대 초목생지 금수거지 보장흥지. 

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生焉 財貨殖焉.

부수 일작지다 급기불측 원타교룡어별생언 재화식언.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지의 도道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유원하고 오래 지속된다. 지금 하늘은 곧 밝고 밝은 것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무궁함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이 그것에 덮이어 있다. 지금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화산華山과 악산嶽山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함이 없고 강과 바다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새지 않으며 만물이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지금 산은 한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광대함에 이르러서는 초목이 거기에서 자라고 금수가 거기에서 살며 보물들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지금 물은 한 술씩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악어·교룡·물고기·자라가 거기에서 살고 재화가 거기에서 불어난다.

2. 이 문단 해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부분을 앞 문단 내용에서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지성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이 문단에서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문맥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풀어 보겠습니다. 중용 실천을 하는 주체와 그 실천을 통해 일구어지는 새 세상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중용 실천자가 주체면 새 세상이 객체다, 이런 논리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체면 ‘서로 주체’이니 대상화, 즉 물화物化될 그 무엇은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주체’의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무한 연쇄로 일어나는 한, 둘로 나눌 수 없는 게 이치다, 이런 말이지요. 중용 실천의 집단성, 공동체성, 사회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측測은 근본적으로 예측한다는 의미를 썩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리학적 진실부터 이야기하지요. 만유인력을 계산하는 뉴턴의 공식이 있습니다. 만유인력 상수에다, 물체들의 질량 곱 값을 물체들 사이 거리 제곱으로 나눈 몫을 곱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공식은 두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타당합니다. 그리고 세 개 이상의 물체 사이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주에서 멈춰서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두 물체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뉴턴의 공식은 특수 상황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이론 모델일 뿐입니다.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무수한 소통을 무언가 도구를 써서 측정한다는 것, 나아가 예측한다는 것임에랴·······.

더군다나 서로 주체성의 무한 확장으로 넘실거리는 중용 세상이고 보면 측정, 예측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도구화하여 구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도덕적 측면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측은 분리를 전제합니다. 측은 누군가를 대상화, 물화해야 가능합니다. 천지의 도리에서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3. 사소함의 평등한 상호 소통이 모여 위대함이 됩니다. 그 위대함은 사소함의 위대함입니다. 그 사소함은 위대함의 사소함입니다. 천天, 지地, 산山, 수水, 그 어디에도 이런 도리의 예외는 없습니다.

4. 세월호사건 직후 공영방송인 KBS 보도국장이란 자가 “한꺼번에 300명이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교통사고로 죽는 연간 인원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소수 문제니까 크게 떠들 것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소수는 다만 소수가 아닙니다. 그들은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 드러내주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이 백성의 대표입니다. 상징입니다. 그들과 백성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들과 백성 사이에 측測질은 통하지 않습니다. 중용은 준엄하게 말합니다.


“백성은 개인으로 쪼개지지 않는 하나다. 낱 백성이 온 백성이다. 고등학생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백성의 죽음이다. 분리하지[측測]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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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첫 번째 문단입니다.

 

故 至誠無息. 

고 지성무식.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愈遠 愈遠則博厚 博厚則高明.

불식즉구 구즉징 징즉유원 유원즉박후 박후즉고명.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愈久所以成物也. 

박후소이재물야 고명소이복물야 유구소이성물야. 

博厚配地 高明配天 愈久無疆. 

박후배지 고명배천 유구무강.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여차자 불현이장 부동이변 무위이성.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함은 쉼이 없다. 쉬지 아니하면 오래 지속되고 오래 지속되면 효험이 나타나고 효험이 나타나면 유원해지고 유원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넓고 두터운 것은 물物을 싣는 것이고 높고 밝은 것은 물物을 덮는 것이며 유구한 것은 물物을 이루는 것이다.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이 되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이 되며 유구함은 끝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나타내지 아니해도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가 없어도 이루어진다.

 

2. 실천 중용이 구체적으로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 신호와 에너지를 전달해 나아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다함이 없는 법입니다[무식無息], 중단하지 않는 법입니다[불식不息]. 늘 깨어 있으면서 시간과 함께 단련되어 갑니다[구久]. 물이 흐르기를 멈추면 썩는 것처럼 “이만하면 됐다” 하고 주저앉는 순간 기득권 의식이 독으로 자라납니다. 시간의 물결에 늘 씻기면서 실천은 더욱 더 퍼들퍼들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후패하지 않아야 살아 있는 깃발이 됩니다[징徵]. 다함없는 실천은 그 자체로 증거이자 징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며 깨닫게 하는 신호입니다. 굳센 에너지가 되려면, 경쾌한 파동이 되려면 시간 속에 살아 펄럭여야만 합니다.

 

그 깃발이 펄럭여 아득히 먼 데까지 표지로 작용합니다[유원愈遠].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지평선 저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푯대가 되어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걸어갈 용기를 줍니다. 참 실천은 반드시 또 다른 실천을 낳는 법입니다.

 

그 실천의 아득한 파장은 점점 멀리 퍼져 나아가고 겹겹이 쟁여집니다[박후博厚]. 참된 소통은 생명의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잠자던 생명의 감각이 눈부시게 살아납니다. 감각들의 공현共絃은 깊은 울림이 되어 서로를 감싸줍니다. 퍼지되 얄팍해지지 않고 깊어지되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생명력을 드높이고, 그 평등한 연대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고명高明]. 중용의 자랑은 중용 실천자의 덕이나 경지가 아니고 중용 실천으로 드러나는 대동 세상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쌍방향 소통, 그 자체의 향기가 긍지입니다.

 

3. 이처럼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지성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4. 대한민국의 현임 대통령은 이른바 유체이탈 어법으로 자신이 여느 사람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이를테면 ‘교주’ 리더십입니다. 이는 주권자인 국민과 소통해야 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과는 거리가 먼, 자신을 높이고 국민을 얕잡아 보는 시대착오적인 태도입니다. 그런 대통령의 정치적 실천이 어떻게 적확하고 치열할 수 있겠습니까? 원론만 꺼내 놓고 사라지는데. 어떻게 다함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됐다고 늘 자랑하는데. 어떻게 깃발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또 다른 소통을 낳겠습니까? 백성이 울고 있음에도 혼자 웃으며 다니는데. 어떻게 생명의 시너지가 일어나겠습니까? 생떼 같은 아이들 250명을 죽이고도 못 본 체 하는데. 어떻게 평등한 생명 연대가 일어나겠습니까? 저토록 강고하게 국민을 아랫것 취급 하는데.


중용은 자기 엄정성無息에서 출발하여 평등한 생명 연대高明로 나아가는 유기적 통합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대함으로써 남을 억압하게 되는 정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채워 온전히 자신을 비우는 군자 나기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평범한 시민의 작은 촛불 하나를 큰 가치로 받들 줄 아는 통치자 나기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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