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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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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66쪽)


“당신의 소유가 증가하면 할수록 당신의 존재는 줄어들 것이다.”_칼 마르크스


제게는 아주 돈이 많은 제자가 하나 있습니다. 새해 맞으면 청와대에서 연하장이 날아올 정도의 부자입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돈이 많아지니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자꾸 없어집니다, 선생님. 없어지는 대상에 저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얼굴 못 본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가 가난한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제게 와서 밥도 먹고 교통비도 받아갔습니다. 부자가 되고 나서는 돈을 꾸러 온 친구에게 ‘내가 은행이냐?’고 했답니다. 돈이 많아지니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자꾸 없어진다는 말의 뜻을 문득 깨닫습니다. 그는 돈으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은 구름 아래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인간 영혼의 말랑함은 홀로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더불어 삶을 공유할 때 그리 되는 것입니다. 남과 더불어 삶을 공유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령입니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소유를 줄여야만 합니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을 단호히 포기해야만 합니다. 단호한 성과 포기가 말랑한 영혼의 전제입니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_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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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經綸 天下之大經 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유천하지성 위능경륜 천하지대경 입천하지대본 지천지지화육. 

夫焉有所倚. 

부언유소의. 

肫肫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 其孰能知之.

순순기인 연연기연 호호기천 구불고총명성지달천덕야 기수능지지.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천하의 큰일을 경륜할 수 있으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의 화육을 주관한다. 대저 어디에 의지하는/치우치는 바가 있겠는가. 정성스러워 어짐 그 자체이고 깊고 깊어 못 그 자체이며 넓고 넓어 하늘 그 자체로다. 진실로 본래 총명예지하여 하늘 덕德에 도달한 자 아니면 누가 그를 알 수 있겠는가.

 

2. 이상적 차원에서 본 성誠, 즉 중용의 실천은 온 세상의 흐름을 이끌어[경륜經綸], 바르게 방향 짓고[입立], 새롭게 빚어[화육化育] 갑니다. 따라서 그것은 치우침[의倚]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가운데란 뜻이 아닙니다. 본디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가득차고[인仁] 사려 깊으며[연淵] 너그러운[호浩] 삶이 바로 그런 실천입니다.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투명하게 열려 있지[달천덕達天德] 않으면 중용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기수능지지其孰能知之]. 자기반성이 생략된 특정 이데올로기, 신조, 학문적 이론, 심지어 유아적 편견에 입각하여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강제하려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중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전체성을 향해 투명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요? 답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중용』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 그 하나입니다. 평등한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기중심을 버려야 합니다. 중심을 버려 가장자리, 아니 자기 경계선 밖의 어둠과 혼란으로 걸어 나와야 비로소 또 그렇게 걸어 나온 생명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도 기존 문명이 제공해준 권력과 오만과 독선을 내려놓아야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심장, 그 붉고 뜨거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모술수도 위세도 손익계산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오직 서로를 버려 벌거숭이가 된 자연 생명, 그 단도직입의 마주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새로이 빚어지는[화육化育] 우. 리. 의 가치를 창조하는 영원한 실천, 동사動詞의 시공간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개인의 품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전제된 실체, 명사名詞의 시공간이 아닙니다. 중용은 온 생명의 집단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실천입니다. 그 집단, 그 공동체 또한 늘 이루어져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 간절함으로 참여하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함께’ ‘몸으로’ 하는 명상/참선이 진정한 명상/참선입니다. 

 

3. 매판적 본질을 지닌 현 지배집단은 독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 독선은 오직 하나의 표적만 봅니다. 돈! 돈 말고는 다른 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도, 국민을 죽이는 행위도 돈만 된다면 옳게 여깁니다. 진실의 전체성은 당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진실은 그들에게 음모와 술수의 계기일 따름입니다. 덮고 비틀고 뒤집고 조작하고·······. 전천후 협잡으로 투명함의 덕을 모독합니다. 세월호는 이렇게 다시 한 번 침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사악하고 집요한 분탕질을 보며 문득 떠오른 말이 있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오직 단.도.직.입 한 마디 뿐이다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惟一直字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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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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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53쪽)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참선은 변방이 되고자하는 연습입니다. 왜냐하면 주권은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권은 변방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변방으로 가면 ‘당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을 만나려고 나를 선두에 세워 변방으로 나아가는 연습이 참선, 참眞 선입니다. 나의 변방과 ‘당신들’의 변방이 만나는 곳이 참 중심입니다. 참 중심은 자기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공空은 공共입니다. 공共이 참 무위입니다.


2013년 5월 13일, 제가 이 서실에 올린 <참 나는 남에게 있다>라는 글입니다.



대승의 큰 지식이

참 나를 찾으라니

땡초는 나를 보고

중생은 남을 본다


천하시인 김선우의 <참나라니, 참나!>(『녹턴(문지, 2016)』수록)를 읽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슬의 역설이라 하옵지요.

비루를 덜기 위해 저잣거리를 떠났던 자이오나

참나의 환영에 속았음을 알게 됐습죠, 참나라니, 나참.

속았으니 냉큼 돌아올밖에.

마음 깊이건 영혼 끝이건

나를 초월한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아 영영 헤매라뇨, 참나,

먹지도 자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영롱한 참나의 이데아라뇨, 나참,

비루할지라도 당신,

당신들과의 접촉면에서 이슬이 맺히죠.

이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죠.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

나의 밤을 깊이 두드리면 내가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아침이

드물지만 오기도 합디다.

당신이 기쁠 때 왜 내가 반짝이는지 알게 되는

이슬의 시간,

닿았다 오면 슬픔이 명랑해지는

말갛게 애틋한 그런 하루가 좋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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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1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薄博淵泉 而時出之. 

유천하지성 위능총명예지 족이유림야 관유온유 족이유용야 발강강의 족이유집야 제장중정 족이유경야 문이밀찰 족이유별야 박박연천 시이출지.

薄博如天 淵泉如淵 見而民莫不敬 言而民莫不信 行而民莫不說. 

박박여천 연천여연 현이민막불경 언이민막불신 행이민막불열. 

是以 聲名 洋溢乎中國 施及蠻貊. 

시이 성명 양일호중국 시급만맥. 

舟車所至 人力所通 天之所覆 地之所載 日月所照 霜露所隊 凡有血氣者莫不尊親 故 曰配天.

주거소지 인력소통 천지소복 지지소재 일월소조 상로소대 범유혈기자막하존친 고 왈배천.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만이 총명예지하여 임臨함이 있을 수 있고 관유온유하여 용납함이 있을 수 있고 발강강의하여 잡아줌이 있을 수 있으며 제장중정하여 공경함이 있을 수 있고 문리밀찰하여 분별함이 있을 수 있으니 두루 넓고 깊게 근원하여 때에 알맞게 나타난다. 두루 넓음은 하늘과 같고 깊이 근원함은 못과 같다. 나타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을 하면 백성이 믿지 아니함이 없고 행동하면 백성이 기뻐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 때문에 명성이 중국에 넘치고 다시 퍼져 만맥蠻貊 지방까지 미친다. 배와 수레가 이끄는 곳과 사람의 힘이 통하는 곳과 하늘에 덮이어 있는 곳과 땅에 실리어 있는 곳과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무릇 피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높이고 친애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하늘과 짝을 이룬다고 한다.

 

2. 완전한 성인의 속성을 말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실천을 해야 완전한 성인으로 볼 수 있다는 요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며[임臨], 백성의 뜻을 받아들이며[용容], 백성을 든든히 잡아주며[집執], 백성을 공경하며[경敬], 백성 앞에서 사리 분명한 실천을 해야[별別] 완전한 성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의 성인은 철학적, 종교적 차원에서 말해지는 신비성과 거리가 멉니다. 일상적 삶의 현실에서 백성과 마주하는 정치권력을 단도직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순과 문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위 요건은 오늘날 정치권력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실천 강령입니다.

 

그 요건을 따르면 백성이 공경함으로 되갚고[경敬], 신뢰하며[신信], 기뻐합니다[열說].

 

본문 내용을 아무리 정교하게 해설해도 더는 심오한 내용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쾌하고 소박합니다. 정치권력이 어찌 하면 백성은 또 어찌 반응하는지 여기서 더 장황하게, 현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는 사소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정치권력과 백성이 공경함敬을 서로 나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순서는 정치권력이 먼저라는 사실!


3.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세월호에 가두어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여 온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도, 메르스를 방치해 수십 명을 죽여 온 국민을 공포에 빠뜨리게 하고도, 이 지배집단은 국민과 도무지 함께하지 않습니다[불림不臨],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불용不容], 든든히 잡아주지 않습니다[불집不執], 공경하지 않습니다[불경不敬], 사리 분명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불별不別].


어느 국민이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그 정권을 공경하고敬, 신뢰하고信, 기뻐하고說 싶지 않겠습니까? 그가 ‘요순’이나 ‘문무’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실로 엄청난 인내를 발휘해 온 이 선한 주권자에게 입만 열면 지시·금지를, 말만 하면 훈계를 들이대는 권력자를 대체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4. 이럴 줄 알고 『중용』은 드넓음the Spaciouness에 기대어 한 번 더 당부합니다.

 

“무릇 피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높이고 친애하라[범유혈기자막부존친凡有血氣者莫不尊親].” 

 

다른 생명은 고사하고 제 국민만이라도 공경, 즉 존귀하게 여기고尊, 피붙이처럼 사랑하면親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권력자는 국민 아닌 자기 자신만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국민 아닌 자기 추종자들만 피붙이처럼 사랑합니다. 짝해야[배配] 할 하늘을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 그는 울어야 할 때 웃고 다닙니다. 즐거워야 할 때 화를 내고 일어섭니다. 그는 끝까지 국민과 주고받는 공경만이 참 공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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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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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50쪽)


우리말에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어휘는 흔히 쓰는 것이 대략 430여개 정도이며, 그 중 72% 이상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는 감정 어휘들을 대개 두루뭉술하게 씁니다. 건강한 사람한테야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감정에 상처입어 질병으로 자리 잡은 사람한테 이렇게 접힌 어휘 사용은 그 자체로 질병일 뿐만 아니라 질병을 더욱 깊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정확한 뜻과 섬세한 느낌을 되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담치료에서 마음 아픈 사람을 풍부하고 정확한 감정 표현으로 이끌어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은 대부분 한두 가지 감정에 묶여 있고 나머지 것에는 아예 무감각하거나 모호한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 치료자 자신이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 역량을 갖추고 도와야 함은 물론입니다. 감정개념의 방을 만들고 거기에 느낌을 채워 넣는 일은 아픈 사람 혼자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 아픈 사람이 실생활에서 아주 많이 시달리는 감정 상태가 다름 아닌 짜증입니다. 짜증을 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와 상관없이 저는 그 동안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짜증은 항복 선언입니다.”


대부분 이 말에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지만 짜증은 접힌, 아니 구겨진 감정입니다. 분노의 외양을 갖추지만 분노의 에너지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미 체념한 상태에서 던져보는 투덜거림, 굴절된 신음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내면이 아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거나 학대받은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찌꺼기 감정, 정확히는 감정의 찌꺼기입니다. 결국은 현실에 더 잘 순응하기 위한 위악적 추임새인 셈입니다. 짜증나서 총을 집어 들었다고 떠들어봐야 짜증은 길바닥에 뱉는 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총을 집어 들려면 분노로 총을 집어 들어야 합니다. 시를 쓰려면 분노로 시를 써야 합니다. 술을 마시려면 분노로 술을 마셔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려면 분노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의로우려면 분노로 의로워야 합니다. 분노, 이것이야말로 2014년 4월 16일 이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다듬어야 할 최우선의 감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분노를 어영부영 건너뛰면 나머지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탈취당할 것입니다. 분노의 칼날을 딛고 끝까지 발을 베이지 않은 채 이백 쉰 명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역사 현실로 불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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