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죽지 못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우울증 환자에게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온 제게 한 바퀴 구른 이 말은 정서적 현기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없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두 번 죽음 맛을 보기는 했으나 ‘아쉽게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이 어렵기만 한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우물우물 말했습니다.


생애 초기부터 그에게 어머니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5세 때 마침내 어머니는 머나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일을 계속했으므로, 어머니 부재상태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실상 그를 버렸듯, 그는 사실상 자신의 삶을 버렸습니다. 20살 이후, 단 한 순간도 삶에 애착을 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찾지 못한 따스한 인간관계를 찾으려고 연애를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병든 연애였으므로, 그는 거기서도 언제나 버려졌습니다. 헌신할수록 비참하게 ‘차였습니다.’ 차일 만큼(!) 헌신하는 데도 트라우마가 작용했습니다. 중학생 때 그를 좋아하던 여학생이 자신을 만나러 오다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깊은 죄책감의 또 다른 진원지였습니다. 그런 취약점을 간파한 여성들은 가차 없이 포식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상호작용으로서 따스한 삶을 그는 마침내 포기해버렸습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여성의 속옷, 액세서리, 소지품 따위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절도를 해서라도 지니려 시도했습니다. 정서적 충동이 격렬히 휘몰아칠 때는 거의 발작 수준이라 의식이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파출소에 잡혀와 있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닫혀만 갔습니다. 삶은 그저 시간에 밀려 떠내려가는 맛도 영양도 없는 건더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우물우물 그에게 제안 하나를 했습니다.


“음·······기왕 없어진 김에 맛이 없다, 영양도 없다·······뭐 그런 생각조차 거두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그냥 ‘함 살아보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없는 건데, 그걸 애써 있다, 있다 하는 것만큼이나 없다, 없다 하는 것도 거시기하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저를 봤다, 멍 하니 허공을 봤다,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에 와서 그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우물우물 하던 말에 살짝 속도가 붙었습니다.


“선생님,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만세!


그는 얼마 뒤,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난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면 찾아온다, 어쩐다, 따위 약속은 없었으니 그 다음 그의 삶은 모릅니다. 다만 저와 함께 일으킨 종자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우물우물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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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 추구를 천부인권으로 여긴다. 대한민국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철학과 종교의 난사람들 입에서 매순간 쏟아져 나오는 말이 행복 추구다. 진실은 다르다. 행복 추구는 역사적·정치적 개념이다.


행복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행복은 행복감으로 실재한다. 행복감은 개별적인 것이다. 설혹 함께 향유한다손 치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바는 다르다.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을 자각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자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연착륙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어떤 계기에 폭발적으로 자각이 일어나 경착륙되었다. 경착륙은 전쟁·차별·학대·착취·파괴를 결과하면서 도리어 행복 추구를 억압하는 정치체제로 공고히 되었다. 이 억압의 정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혁명운동이 비로소 평등한 개인의 행복 추구를 천명하였다.


18세기부터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이 거의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20세기 말에는 민주주의 진면모가 미증유의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나는 찰나 그 민주주의는 즉각 퇴행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시 민주주의가 거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정략적으로 결합하면서 야기한 행복의 파편화 때문이다. 행복의 역설이다.


행복은 개별적이다. 끝내 개별적이어서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이 이율배반의 진리가 고통스럽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이제 어찌 할 것인가. 개별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행복은 없는 걸까. 있다. 숭고다. 숭고는 개별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적 참여다. 공적 참여가 장엄을 향해 탱탱 느슨한 연대의 고리를 이룰 때, 숭고와 진정한 행복은 하나가 된다. 바야흐로 숭고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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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코는 모든 감각의 어머니다.


코는 냄새를 맡는 기관이다. 후각은 인간이 최초로 가지는 감각이다. 정자精子는 후각 수용체를 지니고 있다. 이 주화성에 힘입어 난자 쪽으로 이동해간다. 수정을 거쳐 태아가 되면 그 때부터는 직접적인 후각 기능을 가진다. 적어도 인간 생명의 감각에 관한 한 “태초에 후각이 있었다.”가 진리다. 이 감각의 연대기는 신생아 때 수면 습관과 심리적 안정에서 시작하여 생의 마지막 회한까지 비가역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코의 통시적 유일성diachronic uniqueness이다.


③ 코는 모든 감각· 지각의 중심이다.


코는 얼굴의 중심이다. 눈, 귀, 입으로 둘러싸인 모든 감각운동의 허브다.


생명의 생존 조건 중에 먹는 것, 그러니까 맛의 문제만큼 전全방위에 걸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먹는 것을 통해 생명운동에 필요한 영양 물질과 에너지가 대부분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 맛의 80-85%가 바로 후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코가 냄새 맡기로써 면역적합성을 판별해낸다는 사실이다. 특히 여성은 순식간에 200여 가지의 남성 체취를 판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성의 코가 인류의 길을 결정한다. 코가 후각을 통해 형성하는 미시micro의식 또는 무의식에 비한다면 다른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대뇌전두엽의 거시macro의식은 빙산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코의 공시적 유일성synchronic uniquenes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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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의 지정학


  (1) 코는 코만의 코다


코는 특별하다. 사람이 앞을 향해 우뚝 섰을 때, 코는 맨 앞에 있다. 코는 향도嚮導며 그 용기다.


사람이 누웠을 때, 코는 맨 위에 있다. 코는 스스로를 느끼고(공감) 알아차리고(인정) 받아들이는(신뢰) 지고至高의 자리다.


코는 사람 얼굴의 한가운데 있다. 코는 그 대칭성을 가르는 황금선이다. 코는 생명과 자아의 출발점이자 기준이다.


코의 특별함이, 그래서, 역사의 긴 시간 동안 시샘을 받는 까닭으로 작용하였다. 이제 그 은폐된 이야기를 돋을새김으로 드러내야 할 때가 왔다.


① 코는 생명의 드날목(나들목은 잘못 만들어진 말이기에 바로잡음)이다.


생명의 시작과 끝은 호흡이다. 이 호흡의 절대 관문이 바로 코다. 코는 찰나마다 이어지는 생명 사건의 특이점이다. 코를 통해 독립 생명체의 폐호흡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숨결이 마지막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호흡은 생명의 가장 관건적 요소로 작용한다.


코의 호흡 작동 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코의 구멍은 두 개다. 그러나 두 개가 한꺼번에 호흡에 참여하지 않는다. 1-5시간(사람마다 다름) 간격을 주기로 교대하여 호흡을 진행한다. 아직까지 그 연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오른쪽 콧구멍으로 호흡할 때 능동적이고 외향적인 면이 두드러지며, 왼쪽 콧구멍으로 호흡할 때 수동적이고 내향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 결과를 의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생명의 진화 방향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른바 교호호흡이라는 것이 있다. 먼저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왼쪽 콧구멍을 열어 숨을 내쉰다. 이어서 왼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숨을 잠시 참는다. 다음에는 반대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오른쪽 콧구멍을 열어서 숨을 내쉰다. 그 상태에서 다시 오른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역시 숨을 잠시 참는다. 이 과정들을 되풀이하는 호흡법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 교호호흡은 좌우 뇌와 자율신경을 균형 있게 조절함으로써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단순한 교호호흡만으로 큰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항상성은 드나듦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드나듦의 조화가 바로 생명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의 요체가 바로 코에 깃들어 있다. 교대로 구멍을 하나씩 열어 호흡을 빚는 코의 대칭성 지혜가 생명의 비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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