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참으로 다양한 인간 행태를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부분 스마트폰 들여다보는데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대부분 자던 풍경과 비교하면 뭐 꼭 그렇지만은 않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각양각색이기 마련이다. 요즘 내가 궁금해하는 색다른 풍조 하나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신경 안 쓰고 넘어갈 문젠데, 옆 기대기 이야기다.

 

전동열차 맨 앞이나 뒤 칸 가로 벽은 보통 너덧 사람이 기대서서 간다. 언제부턴가 기대는 방식이 달라졌다: 등을 대어 뒤로 기대지 않고 한쪽 어깨를 대어 옆으로 기댄다. 내가 이런 기대기를 불편하게 느껴서 유심히 살피게 됐다. 내가 뒤 기대기로 섰는데 어느날 누군가 옆에서 내 얼굴-실제로는 그 사람 스마트폰-을 보는 자세로 기대는 바람에 촉발된 일이 분명하다.

 

며칠 동안 궁금해했다: 왜 사람들이 저런 옆 기대기로 바꾸었을까? 정답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내 결론은 코비드-19가 몰고 온 불안이 폐쇄 의식을 증폭시켰다, . 옆 기대기를 하면 뒤 기대기보다 폐쇄 면이 배가된다. 뒤 기대기는 등과 가로 벽이 폐쇄 면 하나를 이루지만, 옆 기대기는 어깨와 가로 벽으로 하나, 타인에게 돌린 등으로 둘, 이렇게 폐쇄 면이 늘어난다.

 

폐쇄 면을 늘려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 본능 또는 무의식은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 심리와 맞닿는다. 마스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대부분은 불안 지수가 높다. 불안 지수가 높은 사람이 위험에 더 잘 대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비 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불안이 증폭된다고 거꾸로 생각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

 

옆 기대기 풍조가 우리 사회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계속되고 증강될 때 공동체성은 약해진다는 추론이 불가피하다. 아니다. 그 반대다. 제국이 부리는 신자유주의 주술에 걸린 개인이 저렇게 고립되고 소외되는 거다.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런 풍조가 더 결 지고 겹 지면 평범한 인간 모두가 참혹함으로 내몰리고 만다.

 

문제 삼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문제 삼기 위해 섬세하고 치밀하게 사유하는 습관부터 길러간다. 대충 사유하고 대번 판단하면 대병 들어 죽기 마련이다. 이미 우리는 그 길로 너무나 깊숙이 들어왔다. 이제부터라도 죽을힘을 다해 살길을 찾는다. 제국이 풀어 놓은 악한 주술을 확인하고, 내가 거기 걸려 있음을 직시하고, 함께 벗어나서, 팡이실이 선한 주술로 번져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경강(京江) 걷기는 강동구 천호동, 암사동, 고덕동, 그리고 강일동 일부를 거쳐 가는 동쪽 마지막 구간이다. 광진교 남단에서 떠나 동북쪽으로 강변을 크게 돌아 고덕천 두물머리까지 간 다음, 거기서 꺾어 고덕천을 따라 들어가 강일동 풍경과 살짝 마주치고는 곧바로 상일동역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경강 일곱 구간 중 다섯을 채운다.

 

광진교 남단 한쪽에는 도미(都彌) 부인 동상이 있다. 백제 개로왕이 권력을 이용해 평범한 백성의 옆지기를 빼앗으려 했으나 슬기로운 여인이 잘 대처해 끝내 사랑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고 하니 허구만은 아닐 테지만 신라계 부역 지식인 김부식이 지닌 편견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볼 만하다. 도미 부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일대는 건국 초기부터 백제와 깊숙이 얽혀 있는 곳이다.


 

광진교를 걸어 조금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이내 강가를 향해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물에 바투 낸 호젓한 길을 따라 얼마 가지 못해 길은 드론 공원에 막힌다. 뭍 쪽으로 한참 나와 미루나무 길을 따라간다. 드론 공원 지나면서는 생태 보존 지역이라 더 한참 물을 보지 못한 채 간다. 이윽고 암사 둔치 생태공원이 숲을 열고 물 가까이 닿을 수 있게도 길을 내준다. 작은 습지가 징검돌처럼 놓인 사잇길을 가면서 제 본성 따라 피어난 푸나무며 버섯, 이끼가 목숨 내음을 자욱하게 풍겨낸다. 큰 낭아초 군락 길을 벗어나자, 고개가 시작된다.


 

고갯마루에 이르러보니 바위절터(巖寺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숲에서 절 건너뛰던 버릇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다 뭔가에 이끌려 되돌아간다. 절터에는 뜻밖에 정자 하나가 떡하니 서 있다. 본디 백제 시대 암사, 또는 백중사(伯仲寺)가 있던 자리에 구암서원을 세웠으며 이를 기려 최근에 구암정을 지었다고 한다. 구암서원은 1667년 건립된 광주군 구천면 최초 서원이다. 이 일대 유생은 여기서 배워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할 수 있었으며 노론 집단에 속했다. 백제 흔적을 지우고 신라계 특권층 부역 집단 후예인 서인 노론 근거지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하니 참으로 검질긴 매판 흑역사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심사가 울적하다.



 

구암정 현액 글씨는 여초 김응현 작품이다. 그 집안도 노론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고개를 내려오는데 온통 어수선하다. 세종포천고속도로라는 뜬금없는 토건 때문이다. 이따위 길 장사가 숲과 물에 무엇을 뜻하는지 아프디아프게 느끼는 나는 마치 무슨 큰 범죄자가 된 듯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상태로 곤두박질친다. 포효하는 자동차 소음까지 덤벼들자 나는 맹렬한 속도로 암사 고개를 벗어난다. 지도로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고덕천 다리 위에 몸이 서 있다. 고덕천 꼬마 두물머리가 얌전하게 콘크리트 단장한 모습으로 내려다보인다. 개울 수준인 시내가 아픈 몸 냄새를 풍기며 끌려 나간다. 양쪽 언덕 위에는 알 수 없는 토건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크게 오른쪽으로 돌자, 내를 건너온 강일동 자락과 마주친다. , 그 강일동···.


 

20여 년 전 나는 강일동에 의료봉사를 온 적이 있다.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1967년 흥인동·서부이촌동 철거민과 1968년 창신동·숭인동 이재민이 쫓겨와 정착한 곳이라 들었다. 좁고 꼬불거리는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은 내가 10대를 살았던 동소문동 산동네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동사무소 공간에 진료소를 차리고 하루에 250명 정도를 무료 진료했다. 정말 가난한 곳이라 계속 봉사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적잖은 부자들이 그랜저를 타고 와 진료받고 약 받아 가는 바람에 분노한 회원들 반대로 전격 중단하고 말았다.

 

그 강일동이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이른바 강남 따라하기”(탈성장 도시와 에너지 전환중 이상헌이 쓴 <한국의 탈성장 도시 이데올로기형성을 위한 개념적 고찰> 197) 전형에 해당한다. 옛 강일동 주민 대부분이 지금 그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마치 구암정에 자리 빼앗겨 암사라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백중사와 같다.

 

강일동 최북단, 한강과 가장 가까운 마을 가래여울은 옛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여기는 백제가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막아 철저한 고립 상태다. 부역·독재 세력이 자주·민주 세력을 빨갱이로 모는 일과 맥락이 같다. 일정을 마무리하러 지하철역 쪽 대로로 들어선다. 물 잡아먹는 불귀신 토건 괴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은 잠실동, 신천동, 풍납동, 천호동을 거치는 한강-탄천 두물머리에서 광나루 건너편, 그러니까 광진교 남단까지 길을 걷는다. 시간과 허리 상태를 살펴 끄트머리 부분은 유연하게 조정한다. 하루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한때 반짝 갠다는 기상정보 이야기를 듣더니 옆지기가 내게 조그만 삼단 접이 우양산을 건네주면서 말한다: 요즘은 남성도 양산 써요.

 

한강-탄천 두물머리로 다시 가보니 지난주보다 제법 수위가 높아진 게 확인된다. 곳곳에 출입 금지 표시가 있다. 가능하면 지킬 테지만 웬만하면 어길 생각이다, 늘 그래왔듯. 세상 이치가 그렇다. 공무원이 해야 할 일과 시민으로서 내가 선택하는 일 사이에 틈은 언제나 존재한다. 액면대로 납죽 엎드릴 필요도 없고 으레 그렇지 하며 톡탁쳐버릴 일도 아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탁 트인 느낌을 받으며 나아갈 때 내 눈은 역시 호젓한 길을 더듬는다. 대부분 사람이 다니는 편리한 큰길 아래, 또는 옆으로 난 콘크리트 소로가 지난주보다 더 연속성 있게 놓여 있어서 안정감을 준다. 얼마쯤 가다 보니 제3의 길이 나타난다. 콘크리트 소로 옆 길섶을 걸어서 낸 구불구불한 더 작은 흙길이다. 사뭇 삽상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 구불길은 물과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끝도 없이 늘어선 버드나무를 계속 마주할 수 있어서 고맙고 고맙다. 그 고마움을 찰나적으로 깨뜨리는 제4의 길이 있다. 한층 더 물 가까이 이끄는 길 아닌 길, 다름 아닌 낚시꾼 길이다. 보행 아닌 탐색 목적으로 걸은 발걸음이 쌓여 제법 도타운 흔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길이 갈 수 없어서 이런 길은 아연 신비롭다.


 

기이하게 생긴 버드나무며 버섯이며 들꽃에 취해 주위를 살피지 못한 채 한참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한강-성내천 두물머리에 닿는다. 그 만나는 풍경을 이리저리 살피며 기리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장소 앞에 우뚝 멈춰 선다. 은빛 철조망으로 둘러막고 적어 놓은 글이 있다: 이 장소는 상수도 취수 지역으로 깨끗한 아리수 생산을 위한 상수원 보호 구역입니다.


 

여기가 취수 지역이라고? 상수도 취수·정수 과정을 잘 알지 못하므로 상식적 판단밖에는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와락 의문이 든다. 아픈 체취를 역력히 풍기는 이곳 물이 내가 먹는 바로 그 물이란 말인데, 정수를 거친다 해도 얼른 수긍하기 어렵다. 수돗물에서 역한 염소(Cl) 냄새가 나는 까닭과 유관하다면 상수원이 팔당 어디쯤이라고 생각한 상식이 몰상식이다.

 

한참을 서성이다 묻는다: 물은 내게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내가 물을 마셔야만 살 수 있다면, 몸속 물 50%가 나갈 때 내가 죽는다면, 그 먼저 내 몸 70%가 물이라면, 더 먼저 생명체 고분자 3차원 구조가 액체 물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물 없이는 내 본성도 없지 않은가? 물은 몸 구성요소 물질” H2O에 지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 목마르다.


준비해 간 따스한 물을 삼가 부어드리고 나도 마신다. 제의와 동지 천명, 그리고 치유 행이다. 역한 냄새가 나더라도 서울 수돗물을 먹는 일이 시민 의식 아니다. 그 물을 정화하는 일도 시민 의무 아니다. 무엇보다 물 본성, 그러니까 생명 본성, 더 그러니까 세계 본성에 경의를 표하는 일이 먼저다. 차마 여기를 떠나면서 나는 물로 곧장 나아갈 길을 쟁인다.

 

아이고, 천추가 쑤신다. 허기가 맹렬하다. 불친절한 미로를 헤맨 끝에 천호동으로 나온다. 가도 가도 공구상뿐이다. 가까스로 천호역 근처 뒷골목에서 허름한 음식점을 발견한다. 광진교와 운명을 함께하면서 쇠락해진 이 마을 꼬불거리는 좁은 길 위에 서서 오늘 내 운명을 헤아린다. 이런 서사를 빚어가면서 는적는적 뭉그러지는 반제국주의자, 그 말로는 어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장마철이지만 비보다 땡볕 걱정하는 물길 걷기다 보니 일기예보를 꼼꼼히 챙긴다. 오전에는 개어 있다가 오후부터 국지성 소나기를 동반한 흐린 날씨가 이어진다는 소식이다. 달리 방도도 없고 해서 느지막이 잠원역으로 향한다. 거기 진입구로 들어가 한강 둔치를 따라 일단 탄천과 경강(京江)이 두물머리를 이루는 곳까지 가기로 한다.

 

잠원역 밖으로 나오면서 하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일기가 예보를 보지 못했나 보구나. 높이 솟은 파란 하늘에 덩달아 높아진 흰 구름은 일기예보와 말 맞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따금 잿빛 큰 구름이 오지랖을 펼쳐주고 바람이 부채질을 해주어 그나마 중도 포기란 말을 떠올리지 않게 만든다. 그래 한번 가보지 뭐.

 

잠원 변전소와 신반포 아파트 16119동 사이로 나 한강에 이르는 길은 본디 나룻길이었다. 이 나루터는 조선 임금들이 헌인릉, 선정릉 행차 때 이용했고, 도성 사람들은 봉은사 오갈 때 이용했단다. 송파 잠실리와 구분하기 위해 잠실리의 과 신원리의 을 따서 잠원이란 이름이 나중에 생겼으므로, 여기가 본디 잠실나루였다.


 

잠은 누에(). 누에를 길러 그 고치에서 비단을 자아내는 조선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이곳에 있었다. 나루로도 잠실로도, 서초구 반포동에서 강남구 개포동에 이르는 이 일대는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오늘날도 여기는 대한민국 최고 중요한 곳으로 군림한다. 땅값·집값으로 말이다.

 

반포동, 잠원동, 압구정동, 개포동은 대한민국에서 땅값·집값으로 1~4위를 차지한다. 여기 그런 아파트에 실제로 살거나 소유하는 부자 대부분은 뿌리 깊은 일제 특권층 부역자 후손 아니면 부역 정권 부동산 투기 광란에 편승해 일약 상류층에 합류한 떼거리다. 저들이 열어젖힌 흑역사를 부둥켜안고 누군가 가슴 칠 뒷날일랑 남아 있을까.

 

한남대교를 지나자 곧바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성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권층 부역자 권력 집단과 토건 집단이 합작해 세운 부동산 왕국은 노회함으로 건재하다. 강 건너 최신 마천루를 쌍것 취급하는 오만이, 한물간 풍광 속에서 오히려 더욱 그 귀기를 증폭해 댄다. 때마침 저들이 사는 곳과 다른 지평선으로 가는 입구를 발견한다.



 

자전거길과 산책로를 붙여 만든 전형적 강변길, 그 아래다. 콘크리트를 깔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강 가까이 붙은 호젓한 길인데 걷는 내내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한다. 길은 이따금 물과 직접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귀띔해 준다. 곡진하게 물 모심을 하고 나면 그 길이 결국 끊어지고 만다는 사실과 마주칠지라도 그다지 섭섭하지 않다.

 

소담한 내 감사와 물을 소외시킨 부역 토건 종자들 행태를 에낄 수는 없다. 뭣에 쓰는지 모르는 시설 또는 인공물은 그렇다 치고 아는 것들조차 거의 예외 없이 유기·방치되어 있는 강변 살풍경이 점점이 펼쳐진다. 대부분 돈을 노리고 만들었으나 실패했다는 넋두리가 수런댄다. 이상한 콘크리트 더미에 홀렸다 빠져나오니 어, 탄천이다.


 

지하철 7호선 청담역에서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탄천-한강 두물머리 풍경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픈 물 몸 냄새가 자욱하다. 안간힘을 쓰며 물과 땅을 치유하는 다옥한 버드나무 숲이 아니었다면 나는 거기를 뛰어서 지나갔으리라. 두물머리를 잠시 살피다가 광나루까지 가려던 본디 여정을 포기한다. 탄천을 조금 더 걷는다.

 

탄천을 따로 걷는 일은 다른 기회에 맡기고 오늘은 양재천과 이루는 꼬마 두물머리를 거쳐 양재천 따라 조금 나아가다가 학여울역에서 마치기로 한다. 하구부터 얼마간 쭉 이어지는 도시 점령군과 마주한 탓에 무심코 꼬마 두물머리를 지나친다. 되돌아가서 찾지만, 모습을 선명히 볼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다음에 맞은편으로 가야겠다.


 

양재천 나머지 구간도 따로 걷는 기회에 맡기고 점점 무거워지는 허리를 추슬러 역으로 향한다. 정색하고 스스로 다시 묻는다: 제대로인 물 걷긴가? 반걸음 더 곱고 촘촘한 진실을 물으면 한 걸음 더 거기를 향해 내디디도록 팡이실이 춤이 초 인과로 약동한다. 혹시 물 본성 자체를 걷는 카이로스가 들이닥치는 찰나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이 목마름 절정긴가 한다. 아마도 머지않아 끝날 테고. 단골 백반집에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허든허든 집으로 간다. 막 씻으려 하는 차에 스마트폰이 부르르 떤다. 심욱보다: 선생님, 고동민이 왔어요! 그래 쌍차 고동민. 가온 아빠. 김정우네 <상도포차>에 있다니 가야지, 하고 서둘러 도로 집 나와 마을버스를 탄다. 떠들썩하다. 들어가니 얼싸안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난다. 모르는 얼굴조차 반가워 이름을 물어보는 찰나 수십 년 동지가 된다. 익히 아는 사람한테 더 가까이 아는 사람 안부를 물으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고동민한테 와락 조은영 안부를 묻고, 주강이와 이창근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왁자한 시간이 살 같이 흐르는가 하더니 나는 이미 내 방에 누워 있다. 숙취가 먼저 일어나 알람 제쳐 놓고 나부터 깨운다. 고동민도 심욱보도 사라진 새벽, 타는 목마름 넘어, 살피재 넘어 나는 한의원으로 향한다.

 

지하철에서 어제 기억을 더듬는다. 잘못 누른 딸랑 한 컷 사진이 불러오는 인연을 올올이 떠올리며 아픈 그리움을 피워낸다. 2009년 일거에 전 노동자 36%3,000명을 해고한 쌍용자동차 협잡, 거기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은 이명박 폭정은 노동 역사에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었다. 30명도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보다 더 많은 공동체적 삶이 파괴당했으나 권력은 여전히 마지막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나는 당시 그들을 돌봤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에게 트위터로 연락해 알량하나마 곁에 있을 자리를 구했다. 집단상담 끝낸 노동자와 가족에게 침 치료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개별 상담을 하며 가장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대한문에 있을 때, 부산 한진 김진숙을 향해 갈 때, 길거리에서 침을 놓으며 서성거렸다. 얼만큼 큰일이 마무리될 즈음 본래도 없던 이름이지만 끝내 이름 없이 그들 곁에서 나는 사라졌다.


 

가끔 그들 가운데 나를 찾는 이가 없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따금 김정우의 <상도포차>나 페이스북 앞을 지나치거나, 김득중·김정욱의 트위터를 만날 뿐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오늘 다시 그들 중 몇 사람, 그들 곁에 있었던 벗들 몇과 재회하면서 정색하고 다시 내 삶 한 자락을 되돌아본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내게 누구였을까. 문득 얼마 전 작고한 홍세화 선생을 떠올린다. 그가 한겨레신문과 마지막 인터뷰한 기사를 읽다가 받은 충격 때문이다. 홍 선생이 진보 또는 좌파의 길에 고결이란 표현을 헌정했다. 정직하게 말한다. 나는 바로 그 대목에서 진보 또는 좌파가 이래서 망하는구나, 탄식했다. 고결이라니. 대체 이 중첩 식민지에 몸 섞어 살면서 차마 누가 고결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고결한 사람은 이미 살해당했다는 프리모 레비의 고백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살아남은 모든 자는 저염(低染)하다.

 

나는 쌍차 해고 노동자가 스스로 고결을 추구했는지 알지 못한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나는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적어도 나는 저염하다, . 물론 내가 쌍차 해고 노동자만큼 탄압받지 않았으며, 홍 선생처럼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저염의 근거다. 그러나 내 저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이 땅에 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이 정직한 고백에서 비롯하지 않는 모든 진보 또는 좌파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 넓게, 이른바 순수를 떠드는 예술, 과학, 문화계 명망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결과 순수는 제국주의, 더군다나 그 식민지에서라면 오직 특권층 부역일 따름이다. 아직 숙취에서 덜 깨어난 탓에 내 말이 과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히 하건대 내가 멀쩡한 정신일 때에도 이 말은 취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도 내 몸에서 배어나는 부역자 악취를 맡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