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란 ‘자기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발견·통제하는 정신 작용’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지를 다시 인지하기다. 사유를 다시 사유, 사상을 다시 사상, 삶을 다시 삶, 이런 확장 과정을 열어 놓은 개념이다. 그런데 한 차원 높은 시각이란 표현은 좀 생각해 볼 며리가 있다. 하기 쉬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전에서 사용할 용어로는 적당하지 않다. 차원이란 말 자체가 그렇다. 과학 범주로 들어가면 매우 어렵고, 통속한 의미대로 쓰면 사전에 올리기에는 함의가 거의 없는 허언에 가깝다. 들머리에서 인용한 사전은 안타깝게도 후자다.
메타인지를 거치지 않은 인지는 기본적으로 그 자체와 다른 또는 반대인 인지를 하지 않은 한 방향 인지다. 가능한 인지 전체를 놓고 보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부분은 오류다”라는 유명한 문장은 그래서 나왔다. 인지 오류를 극복하며 나아가는 과정은 반드시 그 인지와 다르거나 반대인 인지와 마주치는 일을 거쳐야 한다. 어떤 사물 또는 사태에 대한 한 인지는 그 사물 또는 사태에 대한 인지라는 점에서 모두가 옳다. 그러나 어떤 사물 또는 사태에 대한 전체 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그르다. 서로 마주치는 일이 필수인 며리다.
이 과정이 메타인지다. 메타인지라는 표현은 최근에 나왔지만 1400년 전 이미 이를 이야기한 위대한 스승이 바로 원효다. 원효는 이를 일러 화쟁이라 했다. 물론 화쟁 사상은 더 깊고 웅혼한 내포를 지니지만 기본에서 메타인지와 다르지 않다. 메타인지는 ‘자람인 사람’에게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메타인지로써 넓은 시야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다만 온전한 인지 획득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메타인지는 다르게 관찰·발견·통제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 팡이실이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더불어 생명 누리는 장엄에 배어들기 위한 거룩한 의식이며 신나는 놀이다.
메타인지는 평생을 관류하는 운동이다. 자람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메타인지를 멈춘 자에게 메타 인생은 없다. 메타 인생 없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허울 인간이 통치하는 국가는 공화국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공화국이 아니다. 최고 헌법기관이 헌정을 무너뜨리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말이다. 참담한 시간이 애통 속에 흘러간다. 국격은 둘째 치고 국민 인격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생존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 오늘 저녁 여의도로 가지 않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국민 이전에 쌀독이 비어가는 생명으로서 나는 촛불을 들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