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잠을 쉬 이루지 못했다. 무슨 근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반주 한 잔 어정뜨게 해서 각성 효과가 일어난 모양이다. 길게 뒤척거리다가 어느 순간 극적인 서사를 지닌 꿈 세계로 들어간다. 근래 보기 드물게 아주 세밀하고 다양한 장면은 물론 등장인물 용모, 표정, 태도가 생생하게 나타난다. 인과 앞뒤를 뒤섞기도 하고 문맥을 잘라 편집하기도 하면서 대하소설처럼 박진감 넘치게 흘러간다. 또 다른 어떤 순간 나는 자각몽 상태로 접어든다. 당연히 꿈 바깥에서 꿈 서사를 보완하고 완성하는 비몽사몽(非夢似夢), 정확히는 비몽시몽(非夢是夢) 상태가 이어진다. 마침내 그 꿈에 대한 수용·감사까지 마무리된다. 사부자기 일어나 스마트폰을 여니 158분 카이로스가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

 

냉큼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온갖 노폐물을 깔끔하게 내보내고 몸을 씻는다. 내 방으로 돌아와 북쪽 향해 난 창문을 연 뒤 맑은 물 한 종지를 모시고 선다. 한밤중에 일어난 일을 사뢰고 감사를 표한다. 여덟 번 절하고 정좌한다. 가을 아침 햇살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말간 서사를 기록한다. 요즘 화두 삼은 반제국주의 전선, 범주 인류학,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이 지닌 관련성을 중심으로 명쾌한 논리가 흘러간다. 나는 한 찰나에 알아차린다: 꿈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은 뇌가 꾸며대는 허구가 아니다. 소미(小微) 생명들 팡이실이가 펼치는 각성 현실에 대한 비대칭 대칭 반-실재다. 다 기록, 아니 받아 적고 나니 3시 정각이다. 꿈을 꿈답게 꾸기 위해 전과 달리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모든 꿈을 예지몽이라 할 며리도 없고, 모든 꿈을 개꿈이라 멸시할 일도 아니다. 꿈은 의식이 이끄는 낮 삶의 맞은편 삶을 드러내 진실이 지니는 전체상을 구현하는 작용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반드시 꿈을 꾸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꿈을 제대로 꾸기 위해 인간은 잠을 잔다. 꿈 없는 잠은 잠이 아니다. 꿈 잠이 꿀잠이다. 꿀잠 없는 인간은 세계 절반 이상을 잃은 채 살다가 끝내 파멸한다. 그러므로 궁극에서 꿈은 해석 대상이 아니다. 기억하든 못하든, 무슨 얘긴지 알든 모르든 신뢰하고, 의탁하면 된다. 뇌가 모르는 일이 더 많은 삶을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살아지는 생명 세계의 관대함에 엎드려 절하며 살면 된다. 극진히 큰절할 때 선물로서 꿈은 꿀처럼 내 영혼을 찾아온다.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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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방글라데시는 인구 17100만 명, 2022년 기준 GDP 4602억 달러로 남부 아시아의 중요한 나라다. 한국은 인구 5천만의 규모로 같은 해 GDP16740억 달러인 점을 고려하면 방글라데시의 경제는 상당히 낙후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방글라데시는 1인당 GDP20201,888달러로 인도의 1,877달러를 앞서며,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한동안 같은 나라를 이루던 파키스탄의 20221,589달러보다는 상당히 더 많다. 방글라데시의 경제는 2010년대 이후 발전 속도가 빨라져 201119년 사이에 연간 6.5~8.2%의 성장률을 이루었고, 2020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타격을 받았지마는 2022년에는 다시 7.1%의 고성장률을 기록했다. 인구 규모가 큰 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는 상당히 양호한 경제적 발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라 하겠다.

 

최근에 이 나라에 큰 정변이 일어났다. 85일 셰이크 하시다 총리가 사임한 뒤 인도로 망명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하시다는 올해 들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 시위가 일어나자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더니 수백 명이 목숨을 잃어도 소요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최근에는 노동자와 시민들까지 시위에 가담하며 사태가 악화하자 퇴로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방글라데시의 이번 사태는 정권에 맞서 싸운 학생들의 승리,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세계 여러 나라, 특히 서방 언론의 평가가 그렇다. 서방의 언론은 방글라데시가 이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학생들의 뒤에 미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의 이번 정변은 독재에 저항한 민주 혁명의 승리라기에는 미국이 개입하여 색깔 혁명을 일으킨 정황이 너무 분명하다.

 

인도로 망명한 한 뒤 하시다 전 총리는 그곳 유력 경제일간지 더이코노믹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사임한 것은 시체 행렬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의 시체를 넘으며 권력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세인트마틴섬의 주권을 포기하고 미국이 벵골만을 지배하게 했더라면 나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 나라 국민에게 호소한다, ‘제발 과격파에 조종당하지 말라’.” 하시다의 발언은 그녀가 민주주의를 짓밟다가 학생들의 저항에 밀려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전하는 일각의 소식이나 평가와는 사태를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방글라데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서로 정반대되는 관점이 팽팽하게 맞서서 어느 쪽 말이 옳은지 선뜻 결론을 내리기 주저된다. 그래도 상충하는 관련 보도나 분석을 종합해보면 진상을 전혀 모를 바는 아니다. 하시다 정권이 실책을 저질렀고 반민주적 지배를 자행한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기는 해도 지난 1월 총선을 거치며 합법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정권이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무너진 것은 미 제국주의가 개입한 결과임이 분명한 것 같다. 다시 말해 학생 노동자 시민이 하시다 정권에 맞서 거리에 나선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 보이나, 대중 시위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는 폭력 사태로, 그리고 정권 붕괴로까지 이어진 것은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정변을 일으키기로 유명한 미국의 공작 효과로 볼 점이 농후한 것이다.

 

하시다 정권을 붕괴시킨 시위는 방글라데시가 1971년에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할 때 공헌한 유공자들의 후손이 공직 취업 시 받아오던 특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동안 제도개혁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으나 정부가 이를 무시하자 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그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정권의 강경 진압으로 수백 명이 생명을 잃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이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한 학생들은 주로 다카대학의 정치학과 소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시위에 나선 것은 취업 할당제 개혁을 요구한 학생들이었지만 국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노동자계급과 중산층이 참여하며 대규모 봉기로 이어진다.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동력이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을 보고 그동안 정권을 옹호해오던 군부가 하시다 총리에게 불상사를 막아야 한다며 최후통첩을 하면서 사태는 일단 종결되었다. 하시다는 자기의 인척이기도 한 육군참모총장 와케르 우즈 자만 장군의 권고에 따라 총리직을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길에 올랐다고 한다.

 

한편으로 보면 방글라데시 사태는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난 듯하다. 국가의 특정 세력이 누리던 특혜가 불공정하다고 여긴 학생들의 불만과 항의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군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한 모양새다. 방글라데시 군부는 노동자는 배제하고 시민과 학생 대표 등 17명으로 구성된 과도정부를 구성하도록 하고, 그들의 추천을 받아 교수 출신 은행가 무함마드 유누스를 수석 고문으로 인정했다. 과도정부가 떠맡은 임무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폭력을 진압해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차기 선거를 준비하는 것이다. 수석 고문이 된 유누스는 가난한 이들이 자활 사업을 할 수 있게 돈을 빌려주는 소액대출운동을 벌인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하시다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탄압을 받아 외국에서 체류하고 있던 그가 과도정부의 수장이 된 것은 시위를 주도한 다카대학 학생들의 요구가 군부에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한다. 이렇게 이번 사태를 정리하는 것은 독재 정부의 잘못을 물어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는 셈이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사태는 민주항쟁의 승리로만 볼 수 없는 측면들이 많다. 우선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 가운데 다카대학 그것도 정치학과 출신이 많다는 점이 수상하다. 다카대학의 정치학과는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긴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학과는 수상쩍은 방글라데시에서의 역정보 대처(Confronting Misinformation in Bangladesh)’ 집단의 재정지원을 받는 교수들로 가득 차 있다. 그중 두 사람이 아주 후한 NED [미국의 국립 민주주의 기금]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프로젝트를 지휘한다. 그리고 무함마드 유누스를 차기 방글라데시 정부의 수석 고문으로 제안한것도 다름 아닌 이들 정치학과의 항의자/선전-선동 요원들이다.” 페페 에스코바르의 이 발언은 방글라데시의 민주항쟁이 미국의 NED 지원을 받는 다카대학 정치학과의 정치공학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미국이 하시다 정권의 전복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마음에 들지 않는 외국 정권의 전복은 미국이 전매특허로 자행하는 외교전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미국은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색깔 혁명을 일으켜왔다. 남아시아만 놓고 봐도 방글라데시 이외에 최근에 파키스탄에서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여 합법적 정부를 꾸리고 있던 칸을 2022년 퇴출했고, 지금도 최근에 대통령선거가 끝난 인도네시아에서도 색깔 혁명을 진행 중이다(인도네시아의 2월 대선 당선자는 국방부 장관 출신인 프라보워 수비안토로, 1020일 취임할 예정이며, 대선 당선자 신분으로 731일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회담한 바 있다.).

 

인도의 전 터키 주재 대사 M. K. 바드라쿠마르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방글라데시 쿠데타의 배경에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현재 미 국무부의 남중아시아 담당 차관보를 맡은 도널드 루가 개입했을 공산이 높다. 루는 5월 중순에 방글라데시를 방문해 고위 정부 관료, 시민사회 지도자들과 만났고, 그의 방문 뒤 미국은 당시 방글라데시 육군참모총장 아지즈 아마드 장군에 대해 부패 연루를 언급하며 제제를 발표한 바 있다. 바드라쿠마르는 루가 200306년 사이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 주재 대사관의 부대사로 근무하며 거기서 튤립 혁명이 일어나도록 공작했고, 이후에 알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파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색깔 혁명을 지휘했다고 말한다.

 

다음은 루가 방글라데시 방문 직후 미국의 소리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방글라데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는 일은 우리의 우선 사항이다. 우리는 시민사회와 저널리스트들의 중요한 작업을 계속 지원할 것이고 세계 다른 나라에서처럼 방글라데시의 민주적 과정과 제도를 계속 옹호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1월의] 선거 사이클이 폭력으로 훼손된 것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으며, 방글라데시 정부에 폭력 사태를 신뢰성 있게 수사해 가해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들 문제에 계속 관여할 것이다.” 이 발언을 놓고 보면 이달 초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하시다 정권이 무너진 것은 미국이 방글라데시 내정에 계속 관여한것이 성과를 거둔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방글라데시의 이번 정변은 세계사적 변동 과정에서 제국의 역습이 성공한 사례로 보인다. 쫓겨난 하시다 전 총리가 세인트마틴섬의 주권을 양도했더라면 미국이 자신을 축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벵골만에 있는 그 작은 섬은 미국이 오래전부터 비행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눈독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진다. 지리적 요충지에 있는 세인트마틴섬을 장악하면 미국은 중국이 인도양으로 나갈 길목을 막을 수 있고,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인도로 이어지는 통로를 장악해 중국이 진행하는 일대일로 사업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인도와 우호 관계를 맺어온 하시다 정권과는 다른 외교 노선을 펼치면, 최근에 브릭스의 주요 국가로 비서방 편향을 보이기 시작한 인도에 대해 친서방 외교 행보를 하도록 압박할 여지도 생긴다.

 

이번에 과도정부의 수장이 된 유누스는 전형적인 친미 신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했고, 미 대통령이 주는 최고 훈장인 자유 훈장,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황금 훈장을 받은 바도 있다. 그는 소액 은행을 운영한 것으로 미국의 전 대통령 빌 클린턴 등 신자유주의자들의 로비에 힘입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마는 자신이 대출해준 방글라데시 시골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액의 이자를 물려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유누스는 21일에 NED와 함께 세계 전역에서 친미 색깔 혁명에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대표 서맨사 파워와 만나 인권, 거버넌스, 경제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과도정부를 어떻게 가장 잘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서방세계는 최근에 들어와서 과거의 영광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중이다.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 등 서방이 주도한 G7이나 나토에 대항하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져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서방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이제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이 자신이 그동안 누리던 권력을 순순히 내놓을 리는 없다. 제국주의적 제국은 헤게모니의 위기에 봉착하면 할수록 대세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려 든다. 방글라데시의 사태를 보면 그런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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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금요일마다 시 한 수를 보내며 안부 전하는 애제자가 어제 보낸 이성복 작 <그 여름의 끝>이다. 나는 웃자고 이렇게 답했다: 내 인생을 놓고 장난치는 절망에게 도로 장난을 걸면 이기는군하~ 하아! 보낸 직후 내 기억을 타고 초르르 지나가는 필름 하나 있었다.

 

커다란 포식동물이 먹잇감을 잡아 놓고 장난치는 광경이다. 사냥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지만 먹잇감 처지에서 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놀이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할수록 절망은 깊어진다. 살아 나갈 길은 단 하나다. 뒤집어 장난을 치는 거다. 그래, 죽어주마, 하고 힘 턱 뺀 채 축 늘어진다. ? 죽었네, 에이~ 하고 흥미를 잃어 눈길 돌리면 그 틈에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난다. 냉혹한 장난을 이기는 냉철한 장난인 셈이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지는 자세로써 이기는 법을 배운다라는 우치다 타츠루 무도 원리와 맥락이 닿아 있다. 그에 따르면 제자가 스승과 수련할 때 제자는 이기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이 거는 기술에 완벽히 몸을 맡겨 지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이기는 스승의 몸이 제자에게 홀연히 배어든다. 대략 이런 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지나치게 진지 절거나 엄숙 떨면 정신 근육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지기 마련이다. 안다면서도 문제를 어렵게 느낄수록 뻣뻣해지는 쪽으로 기운다. 직면한다는 말을 오해해서 그렇다. 직면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해결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목적의식이나 예기불안을 안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실제로 뻣뻣해지는 사람은 문제 아닌 문제 앞이나 뒤에 시선을 배치한다. 그러면 문제 실재가 왜곡된다; 대부분 증강된다; 너무 크거나 아뜩해 보인다. 그래서 문제에 휘말리거나 휩싸이고 만다.

 

직면은 문제 자체를 평가·해석 없이 말갛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말갛게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있는 그대로 보면 문제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반드시 있다-을 발견한다. 틈은 나를 휘말리거나 휩싸이지 않도록 살며시 잡아준다. 바로 이때 진지와 엄숙, 그 부푼 자루가 훅 까부라진다. 바로 이때 장난기=놀이 감각=유머가 발동한다. 역설을 창조하는 순간이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난 안 죽어, 하면 문제와 내가 엉겨 붙은 거다; 그래 죽어줄게, 하면 문제와 나 사이 틈을 보고 장난이 터져 나온 거다. 나더러 절망하라는 거지? 난 절망 안 해, 하면 문제와 내가 엉겨 붙은 거다; 그래 절망해 줄게, 하면 문제와 나 사이 틈을 보고 장난이 터져 나온 거다. 이 장난, 그러니까 놀이는 감동·감화하는 두 길을 연다. 하나는 골계다. 골계는 하늘빛 웃음을 몰고 온다. 다른 하나는 숭고다. 숭고는 물빛 울음을 몰고 온다. 둘 다 장엄에 가 닿는 질탕하고 거룩한 노래다. 장난 없는 팍팍한 삶은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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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집을 나가면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까닭은 길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돌아볼줄 몰라서다. 아기 시선은 한 방향으로 고정돼 있다. 왜 그럴까? 어떤 고전에도 이에 대한 답은 없다. 내가 고전을 참고는 하되 존숭은 하지 않는 까닭이다.

 

아기 때부터 진실이 지닌 모순성, 그러니까 역설을 본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절대조현병에 걸린다. 살아갈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어떤 고전에도 이에 대한 답은 없다. 내가 고전을 참고는 하되 존숭은 하지 않는 까닭이다. , 죄송, 지송.

 

엄마 배에서 나오자마자 걷는 아기 코끼리를 본 적이 있는가. 아기 코끼리는 아기면서 어른이어야 살 수 있다. 모순이 공존하는 역설 현실을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간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20년가량 아기 상태로 역설 현실에서 보호받아야 산다.

 

본성처럼 보이는 이 차이는 물론 역사 사건이다. 직립 보행이 빚은 저주다. 직립 보행하는 인간 눈은 정면 중심으로 몰려 있다. 이 중심 시각이 집중을 낳고, 집중은 형식논리를 낳고, 형식논리는 투사/전가를 낳고, 투사/전가는 제국주의를 낳았다.

 

제국주의는 모든 인간을 돌아볼줄 모르는 아기 상태로 가둬둔다. 그래야 쉽게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통치되는 제국 신민은 영영 길을 잃은 채 살아간다. 지상 제국 미국 신민, 그 마름 일본 신민, 그 마름의 마름 한국 신민을 보라.


 

자신이 아기인 줄 모르는 아기 둘이 자신이 아기인 줄 모르는 아기 오천만을 끌고 현해탄으로 들어간다. 무슨 짓인 줄 알아도 몰라도 아기인 그 둘은 이 물귀신 놀이에 도취해 있다. 낄낄대는 언론인도 악악대는 정치인도 당최 어른 될 생각이 없다.

 

어른은 돌아볼줄 안다: 내가 혹시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왔다면 돌아가지 못할 길이란 없다.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않으면 방법은 둘뿐이다: 강제로 되돌려지거나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거나. 필경 이렇게 될 양이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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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주 동안 물 걷기를 했다. 한강, 특히 경강(京江) 중심으로 걸으면서 이런저런 서사를 만지작거렸다. 숲에서와 달리 아픈 물 몸 냄새를 맡고 그 매운 기운을 통증으로 감지하면서 한층 더 깊은 지경으로 걸어 들어가는구나, 했다. 그러는 동안 이 문제를 화두 삼을 때 여태까지와는 뭔가 다른 사유를 해야 한다는 통찰이 찾아왔다. 그 이야기 들머리를 열어 볼 때다.

 

몇 번 툭툭 던지고 지나쳤던 질문을 아금박차게 한다: 물은 무엇인가? 아니. 물은 누구인가?

 

먼저 물이 본디 숲이라는 이야기부터 다시 불러온다. , 그러니까 바다 생명이 뭍으로 올라와 이룬 숲은 물이 덜 있는 바다다. 덜 있다는 말은 단순히 양만을 뜻하지 않는다. 질도 그렇다. 이를테면 뭍 속, 껍질, 바깥에 있는 모든 물은 민물이다. 뭍에 사는 생명체 몸속에는 소금물이 들어 있지만, 그들이 몸 밖에서 섭취하는 수분은 특별한 예외를 빼고는 모두 민물이다.

 

인간 몸은 바다를 담고 있다. 하여 민물을 몸속 정맥에 주사하면 죽는다. 입부터 항문까지, 넓은 의미로 말하는 창자, 곧 장()은 엄밀히 말하면 인간 몸이 아니다. 대롱인 몸 안쪽에 있는 바깥이다. 하여 바닷물을 직접 마시면서 살 수는 없다. 이런 이치는 바닷속과 바다 밖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어떤 교언으로도 인간 생명이 물에서 발원했다는 진실을 왜곡할 수 없다.

 

이 진실은 단지 인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이 필수적이다, 뭐 이런 도구 차원하고는 전혀 다르다. 생명체와 물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그 이상으로 완전히 쪼개질 수 없다. 물 자체는 생명체가 아니지만 생명체를 형성하는 계기·기조이므로 비생명이 생명을 창조했다는 표현은 지나친 수사거나 생명 모독일 수 없다. 생명이 비생명에 우선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생명에 관한 한 모든 물이 다 물이지는 않다. 액체 물만 물이다. 액체 물에서만 삼차원 생체 고분자(biopolymer: polynucleotide, polypeptide, polysaccharide)가 형성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명 품은 액체 표층수는 태양계에서 지구에만 존재한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는 근거가 액체 물이므로 이 물 고리를 벗어난 생명은 존재 불가능하다.

 

이 놀라운 사실 말고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물 고리, 그러니까 생명 고리를 존재 가능하게 하고 유지하는 주체가 바로 달이라는 사실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지구 공전 궤도가 생명 공간을 유지할 수 있게 균형 잡는다. 지구 자전축 안정도 달이 좌우한다. 이를테면 달은 태양계 생명 시스템 거대 에너지 전류를 제어하며 조절하는 미세 정보 전류다.

 

내친김에 아금박찬 질문 하나 더한다: 달이 지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데 생명은 어찌 될까?

 

지구 자전 주기가 어떻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어떻고 말하지만, 달이 지구 중력장을 벗어나 우주로 사라진다면 지구 공전 궤도가 태양에서 멀어질지 가까워질지 말하는 이는 없다. 멀어지든 가까워지든 물 고리를 벗어나면 생명은 끝이다. 아직도 인간은 달이 누군지 모른다. 물이 달 물이라는 사실은 더욱 모른다. 여기가 제국과학의 한계다. 범주 인류 과학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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