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신약성서 마타이오스(마태)의 복음서1128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동안 이 말에 수많은 기독교도가 위로받았음은 물론이다. 더 많이 배반당했음 또한 물론이다. 왜 배반당했을까?

 

쉬게 한다는 말이 잠깐 쉬다 가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결국은 구원한다는 말일 텐데, 그다음 구절과 부딪친다: 내 짐은 가볍다. 아니, 짐을 내려놓게 한다는 말 아니었나? 세금 감해주는 정도를 가지고 구원이라 한 거야? 우리는 이렇게 배반당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짐이 짐 아니게 하는 길은 무엇일까? 짐을 내려놓게 하는 거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다. 어른 생각은 이렇다: 짐이 으로 여겨질 만큼 지는 거다.

 

생명이란 본성상 열역학제이법칙을 거슬러 가는, 그러니까 짐 지는사건이다. 누구도, 무엇도 이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짐은 꼭 똑 자기가 져야 한다. 꼭 똑 지는 자기 짐은, 그러므로 짐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과도하게 질 때 그게 바로 이다.

 

예수가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한 까닭을 정치적으로 추적해 보자.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지였다. 식민지 백성에게서 종주국 시민이 내는 세금보다 더 많이 착취하는 게 제국 본성이므로 당연히 유대 백성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 짐을 가볍게 해준다는 약속은 결국 독립( 전쟁)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정신적,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영적 해석으로 흘러간다. 어떤 이는 이런 전통을 자칭 사도 파울루스(바울) 영향이라 말한다. 말하자면 특권층 부역자였던 파울루스가 예수 운동을 매판 종교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기독론이 기독교를 왜곡했다는 주장이다. 통속 기독교도는 펄펄 뛰겠지만 우리는 절절하게 듣는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독립 국가라고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로서 전작권을 가진 주한미군 체재 비용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왜놈들이 해양 투기한 원전 오염수 피해를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매국 특권층이 정권을 잡고 자기 패거리한테 깎아준 세금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왜놈들이 창경궁 희화화하듯 청와대 희화화하고 따로 대통령실 만들고 관저 마련하는 데 드는 세금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짐만 지고 싶다. 우리 몸으로 여겨질 만큼만 지고 싶다. 그게 독립 국가며 민주 국가 아닌가. 이 자주·민주 국가를 약속하는 예수는 없는가. 이 소식을 전하는 복음은 없는가.


 

어제 우리는 기독교인 두 사람과 숙의 치료를 했다. 한 사람은 남의 짐까지 짊어지고 애쓰며 산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가 깔려 죽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며 죽을상이다. 앞 사람은 남의 짐 돌려줄 결심을 어렵사리 세웠다. 뒷사람은 가짜 짐 내려놓을 결심을 쉽게 거절했다. 실제 식민 살이 벗어나기는 어렵고, 자작 식민 살이 길들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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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네가 먹는 것을 말하라,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식도락가 사바랭이 한 말이다. 본디 문맥을 이탈해 보편 의미로 번져갔다고 하지만, 틀릴 일이 없는 이야기다.

 

인과에 갇힌 서구 과학 눈으로 보면 먹는 것에 함유된 성분과 그 섭취량을 따져서 끼칠 수 있는 영향 정도를 말해야 한다, 따위로 말하겠지만, 생태학 차원에서 보면 먹는 생명이 먹히는 생명에게서 본성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치에 닿지 않는다. (물론 생태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우리가 말하는 생태학은 서구 과학의 분석 어법을 넘어서 종합 판단으로 나아가는 범주 인류학적 생태학이다.)

 

단도직입으로 문제의식을 꺼낸다: 냅다 고기-특히 네발 달린- 먹어대는 사람과 딥다 푸성귀 먹어대는 사람은 정말 다른가? 당연하다. 특별한 목적에서 육식과 채식을 일시적으로 증강해 먹는 경우가 아닌 한, 오랫동안 영 다른 음식을 섭취해 온 두 부류 사람이 지니는 심신 성향은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 우리 생태학 어법으로 이야기해 보자.

 

우선, 먹는 행위 자체에서 이야기를 비롯한다. 가령 두릅을 먹는다고 할 때, 나는 단순히 영양분을 보충한다거나 좋은 맛을 즐긴다는 도구 차원 너머에 있는 근원 진실과 마주한다. 먹는 행위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과 합일하는 사건이다. 합일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릅의 목숨을 거둔다. “거둔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살육이고 다른 하나는 포용이다. 각각 품은 더 깊은 진실로 다가간다.

 

살육은 대뜸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죽여서 먹든 먹어서 죽이든 살육 행위는 불가피하다. 살육하는 순간 살육자는 경건해야 한다. 생명 하나의 단절이 다른 한 생명에게 연속성으로 전이되는 카이로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육은 제의를 창조한다. 제의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야기는 쉽지 않아진다. 제의는 숭고하다. 그래서 인간은 제의를 포기한다. 포기한 결과를 오늘 우리가 참혹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포용은 알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린 마굴리스 이야기로 출발하자. 단세포 생명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 하나를 먹는다.” 살육 행위다. 그런데 먹힌 생명이 먹은 생명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단순히 살아남기만 한 게 아니라 먹은 생명과 더불어 전혀 다른 생명으로 도약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린 마굴리스는 이 사건을 내부 공생이라 일컫는다. 내부 공생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두 생명의 성적 결합이 된다. 이렇게 포용은 놀이를 창조한다. 놀이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야기가 쉬워진다. 놀이는 질탕하다. 그래서 인간은 놀이만을 탐한다. 탐한 결과를 오늘 우리가 참담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단순히 이렇게 갈라 정리함으로써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인다. 탐식에 빠지는 인간은 어느 쪽인가? 냅다 고기-특히 네발 달린- 먹어대는 인간인가, 딥다 푸성귀 먹어대는 인간인가? 질문 자체가 실없다. 육식을 탐하는 인간이 일군 문명이 오늘날 인류와 지구생태계를 이 모양으로 망가뜨렸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네 발 달린 동물인데 거기다가 또 동물-특히 네 발 달린-을 대고 먹어대니 네 발 달린 동물 본성이 증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네 발 달린 동물 본성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한마디로 자르면 외곬(偏向)”이다. 추우면 따뜻한 곳을 침략하고, 더우면 서늘한 곳을 침략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는 기생 생명체가 동물-특히 네 발 달린-이다. 침략 외곬 본성을 무한 증강한 직립보행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과 행위체계가 형식논리, 수학 기반 과학·기술, 마침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를 사바랭 어법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너는 네가 네 발 달린 고기를 주로 먹는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답한다: 그렇다면 너는 침략 본성을 지닌 제국주의자다.

 

제국주의 역사를 보면 사실임이 드러난다.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이 쓴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적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아이콘 셋 가운데 하나가 고기(肉類)”. 제국주의 종주국이든 변방 부역국이든 제국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은 육식 인간이다. 그들은 분명히 고기를 먹기 위해 산다. 그렇게 고기를 먹어대야 더욱 제국적 체취를 풍길 수 있다. 그 체취가 제국 시민임을 과시하는 훈장이다.

 

우리는, 물론, 이른바 비건이 아니다. 우리가 고기를 삼가고 푸성귀를 먹는 까닭은 동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얼굴 있는 생명은 먹지 않는다는 알량한 종 편견 따위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생명으로서 끝까지 일궈내야 할 팡이실이(hyphaeing)” 흔히 말하는 네트워킹 본성을 따르기 위해서다. 그 본성의 창조자인 곰팡이, 곧 버섯과 그 본성의 현창자인 식물들을 삼가 먹는다. 비건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아주 특별한 경우는 고기를 먹기도 하거니와 그보다는 버섯을 귀히 여겨 받들어 먹기 때문이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제국의 총아인 육식주의를 버린다. 생명 체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머리 숙여 엎드려 식물과 버섯과 말을 거룩하고 질탕한 식탁에 모신다. 먹기 전 한 번 되새긴다: 내게 네가 먹는 것을 말하라,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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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말할 때, 청빈(淸貧)이라 하면 유교, 안빈(安貧)이라 하면 도교, 성빈(聖貧)이라 하면 천주교, 인욕(忍辱)이라 하면 불교가 떠오른다. 그 가운데 맨 나중 인욕은 물론 가난에 국한한 말이 아니지만 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만큼 욕된 일이 없으니 다른 말과 나란히 놓아도 크게 무리는 없겠다.

 

인욕에 관해 나는 진욕(進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찌감치 자기 삶의 적극 능동 좌표로 삼아두지 않으면 이런 비아냥을 듣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가 늘어놓는 자기변명이다. 제국 자본주의 논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주제에 돈 버는 거 관심 없다 하면 위선이 된다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감히 자기변명을 선택했다. 한의사가 우울증을 상담, 곧 숙의(熟議)로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돈을 벌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오은영이 100만 원을 받을 때 나는 15만 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한의사를 대우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나는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만큼 나는 가난을 삶 샅샅이 들여놓았다. 궁상맞은 일을 서슴없이 하고도 쪽팔리지않다. 나는 이런 삶을 청빈·안빈·성빈, 그 어느 말로도 미화하지 않는다. 가난은 항일 무장투쟁 전사 후손으로서 내가 반제 전투에서 쓰는 병기다. 이 병기가 나를 제국적 생활양식에 살해되지 않게 한다.

 

내가 버는 적은 돈, 그 병기 때문에 자원·에너지 집약적인 제국적 생활양식”(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이 내 삶 본진을 공략할 수가 없다. 한평생 나는 내 이름으로 집·자동차를 가진 적도, 육식을 위해 음식점에 들어간 적도, 은행 계좌에 단돈(!) 천만 원을 넣어 놓은 적도 없다. 진심으로 고맙다.

 

가난이 고맙다고 하니 누가 묻는다: 불안하지 않나요? 산속 승려가 아닌 이상 목돈 들어갈 일이 돌발할 수도 있는데 전혀 대책이 없다면 불안은 당연하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정도 일이면 운명입니다. 그런 일을 걱정하는 대신 나는 작디작은 틈새에서 죽은 돈을 산 돈 만드는 기회를 찾아낸다.


 

그동안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쓰지 않았다. 중앙 정부가 한의원에 쓰는 방식과 같은 속임수를 쓰는 게 괘씸해서다. 최근에 생각을 바꿨다. 그래도 거긴 도시철도공사고 나는 극빈 한의사이니 같은 급이 아니다. 절약되는 푼돈이나마 기부/후원해 죽은 돈을 산 돈으로 만드는 일도 반제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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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첫 일과인 빨래를 널며 하늘을 보니 심상치 않다. 이 정도 땡볕이면 경강 지천 걷기는 어렵다. 그래도 본류는 곳곳에 버드나무숲이 있어 그늘을 드리우고 물을 증산해 더위를 피할 수 있다. 잠시 산책이라면 모르되 몇 시간에 걸친 걷기 장소로 지천은 무리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걸어서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관악산으로 간다. 기슭을 따라 돌다가 나오기로 한다.

 

익숙한 바리궁 주산을 가로지르고 살피재 건너 까치 능선을 따라간다. 관악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무렵 홀연히 숲이 물로 다가든다. 그렇다. 강과 바다는 파란(blue)” 물이고, 숲은 푸른(green)” 물이다. 풀과 나무가 뿜어내는 곱디고운 푸른 물방울이 온몸을 휘감는다. 날씨 탓인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마음껏 두 팔 크게 벌리고 기쁜 소리 지르며 푸른 물길을 따라간다.

 

숲이 물 되자 나도 이내 물 클러스터 하나 되어 유유히 흘러간다. 물 행성 지구에서 누가 차마 물이 아닐 수 있는가. 땀도 비 오듯 흘러 살갗과 옷을 적시고 소금 결정을 남긴 다음 증발해 다른 순환에 합류한다. 갈증으로 벌컥벌컥 마신 물도 장 바깥을 타고 흐르다 몸으로 스며들며 또 다른 순환에 합류한다. 사소한 데부터 거대한 데까지 이 물 순환은 지구생태계 전제조건이다.

 

나는 이 평이하고 진부한 숲 걷기에서 찬찬히 작디작은 물과 그 기운을 살핀다. 작은 골짜기 괸 물에 손을 담그고 똘랑똘랑 초르르초르르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샘 자리와 물길에 주의를 기울인다. 장마 끝나 물길은 끊겼으나 촉촉한 습기 머금은 돌과 이끼를 거룩한 카이로스로 모신다. 생명 간 경계와 생명-비생명 간 경계가 물로써 뭉그러진다. 물이 진리다.



 

물에 소나타 양식이 있을 리 없으니 나도 목적성과 의미 부여, 엄숙한 마무리를 뺀다. 골짜기, 능선, 숲 이름을 잊는다. 시조창에서 마지막 한마디를 허공에 달아두듯 흔적 없이 일상으로 배어든다. 빈둥빈둥 시간을 길거리에 놓아주고 시적시적 장 보아 집으로 돌아온다. 땀에 절인 몸을 씻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맑은 물 한 종지를 모셔둔다. 내일 새벽 이 물이 내 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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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맑스주의 철학자 이스트반 메자로스를 알게 된 것은 근년의 일이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헌책방에서 샀음이 분명한 그의 1970년 저작 『맑스의 소외 이론(Marx’s Theory of Alienation』이 서가에 아직도 꽂혀 있지만 내가 그를 좀 더 잘 알게 된 것은 4〜5년밖에 되지 않는다. 메자로스는 헝가리 출신으로, 한국의 지식계에 널리 알려진 게오르규 루카치의 수제자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루카치의 후임 교수가 되었으나, 1956년 소련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 정국에서 신상의 위험을 느껴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겨우 책 몇 권만 챙긴 채 망명길로 올라 이후 이탈리아, 캐나다, 영국 등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영국의 에섹스대학에서 20여 년 봉직한 뒤 퇴임했다.


메자로스는 교단에서 물러난 뒤에도 연구 활동을 왕성하게 벌인 것이 돋보인다. 아이작 도이처 상을 탄 『맑스의 소외 이론』도 중요하지만, 정년을 한 해에 펴낸 『자본을 넘어(Beyond Capital』로 그의 이론적 업적은 더욱 빛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론 작업은 계속되어 2017년 사망 시에 남긴 유고의 일부가 2022년에 『리바이어던을 넘어(Beyond Leviathan)』라는 이름의 저작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말년의 메자로스가 진행한 작업을 출간해온 먼스리 리뷰의 존 벨라미 포스터에 따르면 『리바이어던을 넘어(Beyond Leviathan)』 이후에도 후속 단행본으로 펴낼 원고 분량이 더 남아있다고 한다. 메자로스의 ‘넘어’ 연작은 내가 볼 때 인류를 절멸로 이끌고 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극복하고 인류의 지구상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나 지금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자연적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재생산을 새롭게 구축하려면 어떤 문제의식과 과제설정이 필요한지 알고자 하는 사람, 진정한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저작이다. 아직 완독하지는 않았으나 시간 날 때 읽으며 느낀 감상으로는 그렇다.

메자로스는 생전에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지도자 우고 차베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메자로스는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에서 추진한 사회주의 혁명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궁구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의 현실태를 발견했고, 차베스는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 체계도 넘고 국가 체계도 넘어야만 달성될 수 있다는 메자로스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알려진다. 차베스는 2013년 59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고, 메자로스는 87세인 2017년에 뇌출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들이 추구하던 볼리바르 혁명 또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전통은 베네수엘라에서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세계 다른 지역에서 여전히 추진되고 중시되고 있다. 나는 메자로스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와 어떤 식으로 넘어서야 할는지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차베스가 사망한 뒤 베네수엘라는 미 제국주의의 교사를 받는 우파 세력의 끈질긴 훼방에도 불구하고 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아 21세기 사회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버스 기사에서 노조 지도자로 또 정치인으로 성장해 차베스의 후계자가 된 니콜라스 마두로가 2013년 4월에 치러진 대선에 당선해 지금까지 대통령을 지내고 있지만, 그동안 베네수엘라에서는 선거를 둘러싸고 우파의 방해 공작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7월 28일 마두로가 3선에 성공한 대선을 놓고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베네수엘라 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선거 과정을 참관한 1,000명 남짓한 국제 선거감시단에 의해 별 탈 없이 공평하게 치러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선거 직후 우파 야당의 흑색선전이 시작되었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이 일제히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나서 베네수엘라 정국은 지금 매우 뒤숭숭하다.

사실 이런 일은 차베스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이길 때마다 계속 벌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1998년 차베스의 대선 승리 이후 베네수엘라는 특히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는 우파 세력의 쿠데타 기도를 계속 겪어왔고, 차베스 사망 이후 마두로가 정권을 잡게 되는 2013년대 중반 이후에도 그런 흐름은 중단되지 않는다. 특히 2018년에 마두로가 재선에 성공한 뒤 미국은 경제제재, 더 정확히는 일방적 강제 조치로 베네수엘라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내몰아, 베네수엘라가 이후에 사회적 안정을 되찾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가 베네수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2012〜18년 사이 유엔의 국제질서 독립전문가로 근무한 바 있는 알프레드 데 자야스 교수는 8월 30일 카운터펀치(CounterPunch)에 올린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베네수엘라는 엄청나게 풍요로운 나라로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지니고 있고, 금과 다른 주요 광물이 풍부하다. 마두로 정부가 전복되면 미국 기업들에 경제적 기회가 열리게 된다. 베네수엘라의 사회 개혁은 모두 바로 폐지되고 차베스와 마두로의 역사는 지워질 것이다. 쿠데타는 사회적 권리의 후퇴를 낳고 미국에 의한 베네수엘라의 재-식민화로 이어질 것이다.” 데 자야스 교수는 2017년 말 베네수엘라의 선거 관리 상황을 현지에서 점검한 뒤 당시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다는 보고서를 2018년에 낸 것 때문에 온갖 협박과 시달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올해 선거 결과에 대해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문제 삼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28일의 대선 이후 국제사회의 여론은 대체로 미국과 그 영향권 아래 있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 갈리고 있다. 비서방의 경우 아메리카에서는 쿠바, 볼리비아, 혼두라스, 니카라과 등이 바로 마두로의 승리를 축하했고, 아메리카 외부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세르비아, 시리아 등이 베네수엘라의 선거관리위원회(CNE)의 마두로 승리 발표를 인정했다. 반면에 미국과 그에 종속된 다수의 나라는 마두로의 승리가 조작되었다는 우파 야당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세다. 최근에는 그동안 비서방 행보를 해온 콜롬비아와 브라질까지 미국 편을 들며 마두로에게 재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하고 나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실망하게 했다. 두 나라의 이상한 행보에 대해 베네수엘라 정부가 그냥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마두로는 베네수엘라는 독립 국가로서 독자적인 선거 관리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며 내정간섭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올해 대선 결과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쉬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은 8월 28일에 EU가 마두로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선 것으로도 확인된다.

우고 차베스가 집권한 뒤로 가동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또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은 계속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차베스와 마두로의 선거 승리를 놓고 우파 세력의 불인정과 저항, 그리고 미국의 우파 지원, 나아가서 베네수엘라 경제에 대한 일방적 강압 조치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를 구출해낸 것은 민중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4월 차베스를 축출하려던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을 몰아낸 것도 그들이었고, 2018년 연 13만%의 인플레 속에서도 마두로 정권을 지지한 것도 그들이었으며, 7월 28일의 선거 직후 우파 세력이 기도한 쿠데타를 막은 것도 그들이었다. 차베스의 집권 이후 차베스주의에 대한 인민대중의 지지는 그만큼 확고했던 셈이다.

차베스주의에 대한 지지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차베스주의가 실현하고자 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전형인,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이 실천한 국가사회주의, 오늘날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 특색사회주의와는 달리 사회 전반의 재생산과 관련한 주요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하려 한다. 메자로스에 따르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의 명령구조를 장악해온 국가를 소멸시키려는 보기 드문 현실적 시도다. 그동안 어떤 현실사회주의도 국가 소멸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면, 베네수엘라에서 시도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국가의 소멸’을 주장한 맑스 이래 레닌 등을 통해 이어져온 자본주의 생산양식 극복의 진정한 변혁 전통을 계승하는 셈이라 할 수 있다.

8월 28일 피플스 디스패치(Peoples Dispatch)에 눈길 끄는 글이 하나 실렸었다. 대선이 있은 7월 28일부터 4주 뒤인 8월 25일에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언론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국내적으로는 대선 못지않게 중요한 선거가 치러졌다고 한다. 이날 선거에서 “4,500개 코뮌이 제2차 전국인민평의회(Second National Popular Consultation)를 통해 도로, 전기, 스포츠, 식수, 가스, 주거, 건강, 교육, 환경, 생산 단위, 공공 운수, 그 밖의 많은 다른 사회 개발 계획과 관련한 24,000개 프로젝트 가운데”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을 대상을 “뽑는 투표장에 나갔다.” 이 투표 과정에서 선정되는 프로젝트는 각 코뮌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결정한 것으로 그들 자신이 모든 의사 결정 과정의 주체가 된다. 이런 자치권을 발동하는 코뮌 단위가 베네수엘라에는 4,500개 이상 조직되어 있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 코뮌 체계가 존재함에 따라 베네수엘라에서는 수천여 사회 생산 단위가 전국에 걸쳐 지역별로 어떤 유형의 사회 프로젝트를 협력 속에 수행할 것인지 민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을 좌절시키기 위해 쿠데타와 선거 마타도어 등 엄청난 외압을 행사하고 있는데도 차베스주의가 그에 맞서 버티고 있는 것은 베네수엘라 인민이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주요 사안에 대해 자율적으로 민주적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경험을 쌓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에 대해 미국 등 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은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를 근절하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실현하려는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은 그래서 필시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부터의 혁명을 직접 경험해온 인민대중이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으로 믿고 싶다. 험난한 볼리바르 혁명의 길을 걷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여, 승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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