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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ㅣ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우리는 ‘이웃’이라 하면 흔히 옆집에 사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원래 의미는 좀 다르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레아rea’라는 단어는 ‘친구/동반자’ 또는 몸종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레아는 옆집 사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이나 동물, 민족과 종교,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당시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자신과 같은 종교, 이데올로기, 취미 등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율법교사가 간과한 ‘레아’의 정의를 새롭게 시도한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는 눈물지으면서 말한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한다. “선생님!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80-81쪽)
너무 당연한 진실일수록 상대방이 정색하고 들을 수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무슨 교훈을 품고 있는지도 모를 리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또 다시 누군가에게서 듣는 것은 그다지 설레는 일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지겹도록 반복해서 우리 앞에 목청 높이는 까닭이 있습니다.
“선생님!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몰라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행동하지 않으니 행동할 때까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천만 기독인’이라 하면서 세월호사건 유가족에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니 있기는 합니까. 무관심을 넘어 ‘종북’이라 매도까지 하는 자들이 활개 치는 것을 보면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이 마냥 무례만은 아닌 듯합니다. 설혹 그들 주장대로 ‘종북’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이해한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따른다면 그 ‘종북’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장한 일이냐?”고 묻는 것이 예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논리입니다. 문제는 기본으로 전제되어야 함에도 기독교인에게 이 논리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 가르침의 본말을 전도시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독교인은 대부분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서 이웃이 “누구”냐를 묻는 것이 이웃 문제의 핵심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에게 “무엇”이 이웃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누구’는 정체성의 문제고 ‘무엇’은 실천의 문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마리아인의 실천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민족적·신분적 정체성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여 그들은 자신을 강도 만난 사람의 유대, 이스라엘 정체성에 위치시킵니다. 그렇게 그들은 당당히 고난 받는 의인이 되어 유유히 자비 실천의 의무에서 벗어납니다. 실제로 고통 받는 사람은 이방인, 그러니까 마귀의 정체성, 예컨대 ‘종북’으로 몰고 당연하게도 마귀에게 고통을 가하는 세력을 자신의 의로움에 일치시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겹겹이 왜곡하고 능멸한 현실 위에서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 가시기 바란다.”는 참람한 말이 그리스도 말씀 이상의 권위를 지닌 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한다면 우리사회의 온갖 끼리끼리 사랑을 대체 누가 있어 정화할 것입니까. 영남, 서울대, 육사, 검찰, 경찰, 조중동·······심지어 연예인, 셰프·······예수는 준엄하게 다시 묻습니다.
“패거리끼리 사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