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풀을 염두에 두고 숲이라 표현해도 산은 산이고, 산은 마을 뒷산일망정 숨 몰아쉬며 올라야 할 곳이 있게 마련이다. 관악은 어디서든 쉽지 않다. 주말이면 늦은 저녁 라이트를 켠 구조 헬리콥터가 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관악에 들려 하면 일단 기본 긴장감으로 준비해야 한다.

 

오늘은 과천 관문천 계곡에서 들어가 서울대 저수지가 있는 계곡으로 나올 계획이다. 과천역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와보니 아파트가 모두 고층으로 바뀌어 있다. 길이야 바꿀 수 없었을 테니 내 발걸음은 편안했다. 과천 향교에 이르러서는 지도를 보며 계곡 길로 들어섰다.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입구에는 벌써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로 왁자할 만큼 도심처럼 붐비고 있었다.

 

언제나 풍경은 새롭고 경이롭다. 연신 걸음 멈추고 보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들어간다. 마침내 그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지점에 이르렀다. 지도에 점선으로 나타나는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 참 좋다.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 네 사람 만났을 뿐이다. 그중 둘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다소 겁먹은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오고 있었다. “잘못 온 거 아니야? 길이 맞기는 해?” 가까이 다가와 눈이 마주치길래 내가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지만 길 맞습니다. 안심하고 가세요. 곧 큰길과 만납니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연거푸 하면서 표정을 환하게 풀었다. 산에서 주고받는 이런 선물은 아연 유쾌하다.

 

능선을 넘어 내려갈 길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계곡 길이다. 진입로를 쉽게 찾지 못해 다른 길로 가다가 아무래도 지나왔지 싶어 되돌아가는데 마침 가고자 하는 방향에 빽빽한 수풀 사이로 얼핏 사람 모습이 보였다. 길은 거기 있었다. 초입이 거의 가려져 있고 경사가 가팔라 대부분 길이 아닌가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조심스레 내려가니 지난주 갔던 관악산 속 지리산이라던 그 계곡이 떠올랐다. 이런 길, 참 좋다. 드문드문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반갑게 인사 나눌 만했다.



반쯤 내려와 계곡 물가 넓적한 바위에 앉아 어제 간호사가 사다 준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이 끼었지만 파래만 보였다. 도시 소음이 멀리서 잉잉거리며 들려오는 곳에 이르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가에 앉아 눈을 감았다. 물소리에 실려 상념이 사라진다. 그 많은 숲에서 오늘처럼 이렇게 오래도록 멈춰 있기는 처음이다. 숲이 내게 하는 말을 듣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망연히 머무른다. 숲과 나 사이 간극이 흐릿해질 즈음 조용히 일어나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 숲을 나왔다.

 

서울대 교정 안팎에 숨은 숲길이 많다. 학생도 교수도 그리 다닐 일 없는지 모르지만 걷는 재미가 쫄깃하다. 학생 생활관 옆으로 갸름하게 난 작은 숲길을 걸어 큰길에 이르면 건너편, 그러니까 관악로와 낙성대길 사이에 관악 마지막 줄기로 보이는 숲이 봉긋 솟아 있다. 포장된 큰 도로를 피할 단순한 목적으로 쑥 들어간 숲인데 한참이나 옹글게 걸었다. 언제나 숲은 생각보다 크다. 언제나 인간은 숲에 폭 둘러싸인다. 가차 없이 파고들어 없애가지만 결국 숲이 없어지면 인간도 없어진다. 거대 자살극으로 질주하는 제국주의 부역 거리와 다시 마주하면서 나는 순식간에 길을 잃는다. 어디로 갈까? 결국 나는 대취한 사람처럼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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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학문 부역 서사만큼 깊고 방대한 이야기는 다시 없다. 그 이야기를 다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내 인생사와 엮어 말할 수 있을 만큼 하고 멈추겠다. 내가 처음 대학에서 공부한 학문은 법학이었다.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5년은 박정희 유신헌법, 아니 유신헌법이 보장하는 긴급조치 체제가 서슬푸르게 작동하던 시기였다. 유신이란 말 자체가 일본 제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서 나왔다는 상징적 사실 넘어 그 시대 풍경 전체가 일제 식민지와 다름없었다, 신입생 시절부터 내가 불가피하게 들어선 영역은 이른바 수험 법학”, 그러니까 사법고시를 위한 정답 찾기 법학(?)이었다.

 

공부가 진행될수록 크게는 법 이념에서 작게는 법조문 문장 표현 방법에 이르기까지 두텁게 맡아지는 일본 냄새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판례 대부분은 일제 메이지(明治·1867~1912), 다이쇼(大正·1912~1926), 쇼와(韶和·1926~1989) 연간 쌓인 제국 법리로서 필수 불가결한 기억 대상이었다.

 

학자로서 법대 교수와 실무자로서 법조인 사이에 갈등이나 알력이 존재할망정 법학 근저와 근간에 놓인 식민지적 모순을 통렬하게 자각한 사람은 거의 전혀 없었다. 이미 견고한 전제로 자리 잡은 부역 정서는 독일, 프랑스, 미국 유학파에게서도 단일하게 나타났다. 거기 이론, 특히 새로운 이론을 번역해 팔아먹기 바빴을 뿐,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여기 정서에 맞는 창조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법 교수 한 사람이 정직하게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귓전을 맴돈다. “독일에서 새 책이 나오면 한국 다른 교수가 사기 전에 아도(あと)’ . 잽싸게 번역해서 내 이름 내건 뒤 책을 풀어 놓지.”

 

나는 지금 거의 반세기 전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 흐르면 변화가 일어나는가. 30년 가까이 지난 뒤 다른 차원 이야기를 해본다. 2003년 한국법제연구원장이 법제처장에게 제출한 연구 보고서 <일본의 법령체계와 입법절차상 법령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1장 서론 제1절 연구의 목적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역사적인 이유가 주된 요인이겠지만 우리의 법령이 일본의 법령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그 잔재가 현행법령 속에 아직 적잖이 남아 있으며, 현재에 있어서도 법제업무와 관련해서 외국 입법례를 참조함에 있어서는 일본의 경우를 거의 예외 없이 살펴보고 있는 것이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일본의 입법제도 내지 법제업무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작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면, 필요한 작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중립적이고 점잖으며 모호한, 그리고 일본식 어법에 절어 있는 세 문장을 조금 수정, 아니 다시 번역해본다.

 

과거에 일본 제국 식민지였던 이유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 법령은 일본 법령에 절대적 영향을 받아왔고, 현재도 식민지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실재가 현행법령 속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법제 업무와 관련해 외국 입법례를 참조할 때도 일본 사례를 거의 빠짐없이 살펴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고려할 때, 일본 입법제도 또는 법제업무를 살펴보는 일은 유익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면, 필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은폐된 의도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 눈으로 20년 지난 오늘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자들이 과연 어디를 향하는지 볼 수 있다. 사회 온 분야가 식민지로 퇴행하고 있는 이때 하필 법학 분야만 다르다고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부역 검찰이 나라를 장악하고 노골적으로 일본과 미국 앞에 엎드린 상황은 우리 기대를 배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학문하는 교수들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법학전문대학원이 왜 생겼는지, 뭐 하는 곳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법학도였던 시절, 법학은 사회과학의 수학이라 믿었던 치기가 그립다. 그리운 만큼 슬프다. 슬픈 만큼 망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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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북한산 둘레길 중에 평창동을 통과하는 구간이 있다. 처음 북한산 둘레길을 걸을 때 그 구간 많은 부분을 일부러 생략했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숲이 아니라는 점이 하나였고, 평창동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다른 하나였다. 내 어릴 적 기억에 평창동은 도둑촌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유서 깊은 부자가 사는 동네인데, 그 육중한 부가 죄다 도둑질에서 왔다는 고발을 담은 표현이었다. 유서 깊다는 말은 전혀 빈말이 아니다. 신라 김춘추 집단부터 시작된 매판 부역 집단이 천오백 년 가깝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면 명실상부한 표현 맞다.

 


제국주의 공부를 막 시작할 무렵 나는 반대로 일부러 평창동 길을 걸었다. 눈이 아프도록 그 으리으리한 집들을 보고 또 보았다. 거기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특권층 부역자 체취를 통렬하게 맡았다. 평창동을 떠나면서 생각한다. 아베의 저주는 아무래도 누군가 날조한 저주가 아니지 싶다. 적어도 식민지 노예 교육에 관한 한 실재에 너무나 잘 부합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베의 축원이 결국 이렇게 영검한 저주로 돌아오는 이치를 꿰뚫어 본 네트워킹 웅얼거림이 아닐까.

 

축원과 저주가 동의어인 식민지 대한민국에서 교육 서사는 그 무엇보다, 그 누구에게나 날 선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교육이 현재에 미래를 말하는 행위며 구조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권층 부역 집단이 모조리 장악한 교육체제, 교육기관, 교육당사자, 어디에서도 이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럴 리 없으니 그럴 수 없다. 변방에서 각성한 부역자가 그 문제의식을 네트워킹으로 공유하는 길이 유일한 길이다. 네트워킹은 패자 공동체다. 패자 의식을 호혜적 삶으로 구현한 작은 존재가 빚어내는 나지막한 연대만이 교육 혁명 서사를 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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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시사저널은 현재(2020) 국내 30대 그룹(자산총액 기준)에서 오너가 있는 기업 총수와 후계자 등의 최종 학력을 전수조사했다. 24개 그룹 중 63%15곳의 총수가 미국 대학 출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체감되는 비율은 훨씬 높다. 국내파 총수들은 대부분 70세 이상 고령의 1~2세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 3~4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비율은 향후 100% 가까이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후계 구도에 있는 예비 총수들은 물론 그 자녀들에게도 미국 유학은 필수로 여겨진다. 미국 유학파 총수·후계자 중 경영학 석사 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학교는 겹치는 곳 없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 어느 대학이냐보다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풀이된다.···

 

재벌 총수와 후계자들이 너도나도 미국 유학길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과거와 달라진 환경에서 경영 수업을 제대로 받으려다 보니 비즈니스 스쿨 쪽으로 특화된 미국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본부장은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예전처럼 하면 된다정신이나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 큰 기업을 운영하는 미국의 흐름을 배우고 오려는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한국 특유의) 오너 경영의 장점은 어느 정도 가져가면서 미국식 선진 경영을 접목하는 과정에 있다고 덧붙였다.···

 

유학은 재벌가 교육의 오래된 특징이다. 해방 전후 극심한 혼란기에 대기업을 일군 창업주들은 외국과의 교류, 선진 문물 도입 등을 강조 또 강조했다.···이는 자녀 교육에도 적용됐다. 2세대부터 상당수가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 미국, 일본 등에서 수학했다.

 

오너 2세대 시대가 저물어가고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지금도 재벌가 자제들의 유학은 활발하다. 아예 선택이 아닌 필수 요건이 됐다. 일본 유학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미국으로 집중됐다. 더 나아가 요즘 트렌드는 조기 도미(渡美). 3세까지 주로 한국에서 중·고등·대학교 과정을 마친 후 미국으로 나갔다면 4세 이후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한국을 떠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팀장은 “(유학을 통해) 재벌 체제의 장점과 미국의 선진 경영 시스템을 접목하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며 대기업의 행태를 보면 정작 미국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의 본질, 자본주의 원칙 등을 배워 오는 총수는 없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홍성추 재벌 3저자도 3세 이후의 재벌가 자제들을 가리켜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살기만 했고 기업 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유학 등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의 사회·경제 전반에 대해 익숙지 않다입사 후 바로 임원이 되고 차후에 오너가 될 이들에게 바른말을 해 줄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미국 유학생 서사 결정판이다. 김종영을 다시 인용한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이와 다른 어떤 말로 대한민국 교육 부역 서사 고갱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내 경우 김종영식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 또한 제국 논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본질주의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팽개치지 말고 우리 공동체 생태적 실재를 옹글게 담을 고유성을 어떻게 찾아 보전하고 육성할지 곡진하게 고민해야 한다. 미국에 있다면 한국엔들 왜 없겠는가 말이다. 현재는 물론 미래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 그 교육 서사를 새로이 써 나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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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실 경성제국대학과 일(본토) 제국대학 출신자보다 긴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집단은 미(제국) 대학 출신자다. 구한말 개화기에 이미 시작되어 식민지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압도적 대세를 형성했다. 대한민국 시대 미국 유학파는 본디 미국 유학파 후손에 일본 유학파 후손이 더해져서 특권층 부역자로 동일 정체성을 구축했다. 오늘날에는 친일·친미 구별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이들 손아귀에 있는 대한민국 현재와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김종영(경희대 사회학과 교수)은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 박사 1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래 미국 박사 학위는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보증수표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 박사는 미국 박사를 알아보고, 서로 챙겨주며 네트워크를 이룩한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에게 미국 학위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상징자본이 되고 있다.미국 학위는 한국 엘리트 집단의 배타적인 지위재이며, 이것이 없으면이너 서클에 들어가기 어렵고 배제되거나 소외되기 쉽다.즉 미국 학위는 한국 기업에서 엘리트와 비엘리트를 분할하는 상징적인 징표가 되고 있다.”

 

한국적 학벌주의(한국 학부 학위)와 미국 학위(명성 높은 미국 연구중심대학 박사 학위) 선호 현상이 만난 글로컬 학벌 체제가 미국 유학파에게 한국 사회 패권을 장악하는 힘으로 작동하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저자는 미국 유학파를 지배받는 지배자또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으로 규정한다. 문화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은 스스로 지배계급에 속하면서도 경제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에게 지배당하는 모순 속에 있다는 말이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트랜스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미국 유학파가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입신출세에 이용만 할 뿐 지식과 실천에서 실질적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요식적 학위만 노리고 유학 가는 경우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부 목적으로 가도 현실에서 저들이 탁월한 연구 결과를 생산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원천적으로 식민지 지식인이 맞닥뜨리는 한계 탓이다. 이 결정적 어둠이 낳는 결론은 무엇인가?

 

요컨대 미국 유학파는 지적 식민지 상태인 대한민국에서 선한 얼굴과 악한 심장을 동시에 지닌 트릭스터(trickster) 위상을 점하나, 궁극적으로는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주의를 추수하는 특권층 부역 집단이다.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인 대학과 지식을 비판하거나 혁파할 어떤 이성도 의지도 없이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미국 대학에 충성한다. “미국에 쏠린 한국 사회 체제와 그에 기생하는 지배계급 재생산 구조”(한겨레 이재성 지자)를 맹렬히 떠받친다. 어찌 이렇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돌아본다.

 

개화기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은 1905년까지 수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이미 어떤 경향성을 띠고 있었다. 김우재(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논문 <식민지 미국 유학생의 오리엔탈리즘과 한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갑오개혁으로 일본에서 공부 중이던 유학생들은, 아관파천 이후 역적의 손에 의해 파견된 유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히자, 상당수가 미국으로 도주 유학을 떠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헌식, 이범수, 임병구, 여병현, 이하영, 안정식, 박희병, 이희철 등으로 미국 유학생 대부분은 선교사의 지원을 통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기독교계를 통한 미국 유학은 망국 시기에도 활발해져 바로 이 시기에 이승만을 비롯해 윤병구, 신흥우, 박용만, 민찬호, 정한경, 유일한 등이 유학길에 오른다.···

 

이들 제2기 미국 유학생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은, 그들 대부분이 결국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갑오개혁의 실패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은 신분적 주변성과 사상적 이단성으로 인해 유교전통을 비롯한 전제군주제와 양반 지배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즉 전통의 질곡에 항거해 근대적 가치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혁명적 지식인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는 없었다. 이들은 분명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벗어나 있었지만, 관료로의 출세를 원하는 면에선 일본 유학생과 대동소이했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인문과학 또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정규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의 문화에 적응했던 미국식 사고와 가치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통해 갖게 된 꿈은 한국적 기독교 국가의 건설이었다.···

 

메이지 시대···일본 근대적 지식인 대부분은 종교를 교육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기독교보다 과학에 더 친화된 입장을 견지했다.···자유 민권 사상에 친화적이었으며, 영미식 민주주의에 천착했다. , 2기 조선의 미국 유학생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았던 일본 지식인 집단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선택했다면, 향후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 나아가야 했던 창조적 소수자였던 제2기 미국 유학생 집단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선택한 셈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종교가 전제된 학문은 결국 거기에 종속된다. 종교가 전제된 정치는 결국 거기에 종속된다. 모든 제도 종교는 수구적이다. 종교에 볼모 잡힌 학문도 정치도 수구로 빠져든다. 대한민국은 이 진리를 너무도 확실하게 역사와 사회에 새겨넣고 있지 않은가. 김우재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본다.

 

“1919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해외유학에 대한 개방책으로 선회했고, 당시 향학열에 불타던 국내의 학생들은 앞다퉈 사비유학을 떠나게 된다. 1920년대 일본을 제외한 해외유학생은 약 436명으로 나타나는데 이 중 대부분인 332명이 미국 유학생이었다.

 

미국 유학은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에 밀려 이등 시민으로 전락한 한국인들에겐 출세의 기회이자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겨졌다. 이 당시 유학생들의 전공 분포를 보면 드디어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925년의 조사표에선 여전히 사회과학 분야가 대다수이지만, 공학과 자연과학 유학생이 유의미한 숫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이런 비율은 1929년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1910년대 대부분 유학생이 신학과 의학에 집중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점차 실용 학문으로 유학생들의 관심이 확대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이 시기의 미국 유학은 학위나 명예를 위한 유학에서 벗어나 실력양성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문학을 비롯한 신학과 의학 분야에 대한 선호도가 많은 것은, 식민지 조선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성 때문이다. 이렇게 1900년 전후에 태어나 일본 혹은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인물 중에서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라고 불릴만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유학생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순수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도미 이전에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과학 그 자체의 역사와 의의보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를 통해 과학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당시 동아시아와 미국까지 휩쓸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력 속에서 유학생 대부분은 진화론을 민족의 실력양성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다루었다.···나라를 빼앗긴 이들 유학생에게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는 너무나 먼 기대였다.

 

장차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될,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가 될 이들 미국 유학생들은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와 과학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동의하는 새로운 근대화된 인종이었다. 이들보다 먼저 미국에 유학했던 윤치호의 문명관 또한 문명개화 의식, 민주주의 인식, 기독교 의식, 그리고 황인종 의식으로 집약되어 있었다. 사회진화론을 근거로 결국 친일협력의 논리로 이어지는 윤치호의 모습이 이 시기 미국 유학생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동시에 이들은 사회주의에 강한 비판의식을 보였다. 1920년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사조가 급속도로 확산될 때, 미국 유학생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했고 그 근거로 내세운 논거들 역시 실용주의적 과학 정신과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옹호론, 기독교의 종교 도덕과 자유주의였다.

 

이승만의 반공 논리 또한 미국 유학생 집단에겐 당연한 귀결이었다.···미국 유학생들은 향후 남한 자본주의국가 건설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공유하던 자유주의에 기초한 반공 논리는 향후 한국에서 펼쳐질 역사적 전개에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앞에서 다시 묻는다: 이 미국 유학파 손아귀에 있는 대한민국 현재와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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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7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