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회룡 계곡 사건은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몸은 아직 여러 군데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 길 없는 숲으로 들어가는 찰나에는 어떻게 그리 서슴없어지는지, 바위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순간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그런 행로를 밟아가는지, 직진 불가 절벽 끝에 섰을 때 들이닥치는 아뜩한 순간을 어떻게 가로지르는지, 지금도 ‘내가 죽으려고 용을 썼지’ 하며 살 떨곤 한다.
2023년 8월 20일 일요일 아침, 나는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생각하며 지난주 사건을 짊어진 채인 심신과 포옹한다. 아내와 딸이 나간 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광화문 교보를 향한다. 광화문 교보는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음 모신 지성소다. 책만 보지는 않는다. 버드나무 책과 의자 조각, 그리고 5만 살 나무 책상과 인사하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를 사 들고 도심 나무 순례를 거친 다음 북촌으로 향한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정독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몇 차례 대강 둘러본 기억 위에 샅샅이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얹어져서다.
느닷없는 생각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내가 본 측백나무 중 가장 큰 측백이 입구 비탈길에 서 있었다. 수백 살 회화나무도 거기 있었다. 80살 등나무도 있었다. 안쪽에 보호수로 지정된 4백 살 이상 된 회화나무가 또 있었는데 커다란 벌집을 거느렸다. 서쪽 끄트머리쯤에는 처음 본 수양벚나무도 가지를 늘어뜨린 채 무성히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뒤로 더 깊이 들어가니 우물 돌이 있는데 그 옆 안내판은 이 땅이 김옥균, 서재필 소유였다가 나중에는 매국노 박제순 손에 넘어갔다는 내력을 담아 놓았다. 읽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테지만 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사사 쓰기를 하는 내게는 아리고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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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느 이름 없는 장소를 찾아가야 제국주의와 부역 역사에서 자유로운 내력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관립 한성중학교가 화동 이 자리에 세워진 1900년 박제순이 우물 돌에 제 글을 새겨 넣었는데 전후 관계, 소유권 이전 과정도 알 수 없다. 그저 그런 내력이 뒤엉키며 흘러온 역사를 생각할 때 식민지 오욕은 결결이 겹겹이 육중해진다는 진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개인사가 포개지면 잔혹으로 번진다.
나는 박정희가 제 아들을 위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바람에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힌 장본인 중 하나다. 여기 경기중학교가 1971년에 폐교된 원인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전격 실시된 데 있다. 경기중학교 들어가 가난과 소외를 극복할 꿈에 부풀어 있던 최상위우등생은 이렇게 독재자 한 사람 사욕에 희생돼 험하디험한 인생 경사로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연히 서서 만일 그때 경기중학교에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가정은 부질없다. 다만 특권층 부역 집단이 어떻게 내 인생에 직접 개입했는지 확인함으로써 진실에 더욱 통렬히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북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정릉으로 향했다.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곳이다.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총애해 본디 사대문 안 정동에 있었으나, 신덕왕후와 심하게 척을 졌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곳으로 쫓아냈다. 능을 묘로 낮추고 석물을 가져다 청계천 다리 공사에 씀으로써 사실상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광통교나 인근 벽돌에 그 석물들이 지금도 증거로 남아 있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청으로 복권·봉안했다. 이런 우여곡절에 아랑곳없이 능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방원 아닌 토건 부역 후손들이 야비하게 밀고 들어와 지금 능 숲은 눌려서 숨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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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어딘들 다른 풍경이랴.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자랑하지만, 막상 그 숲은 국적 없는 토건 바다에 떠 있는 섬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 과거는 현재와 연속을 이루면서 자부심에 찬 풍경을 과시하지만, 중첩 식민지 허울 대한민국 과거는 현재 삶과 유리된 예능 역사 담론에 불과하다. 무슨 출입 금지 푯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내 역사와 더불어 호흡하지 못하게 한다. 박제 고가품 취급한다.
나는 1965년 서울 와 돈암동 산동네에서 10대를 보냈다. 집에서 작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 정릉 원찰인 흥천사, 다시 하나를 넘으면 정릉이다. 강원도 월정사 입구 마을에서 태어나 시생대를 살아온 내게 두 장소는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웠고, 그 풍경은 안온했다. 도시 빈민으로서 겪는 가난과 소외를 견디게 해주는 너른 품이었다. 요즘처럼 무슨 놀이기구나 먹을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재잘거리며 오가고, 숲속을 쏘다니고, 먼 듯 가까운 옛 향기를 맡는 일만으로 유소년의 시간은 탱탱해졌다. 정릉 품은 백악산 자락은 그렇게 60년 가까이 내 생애 내력과 곡절에 엮이며 함께 서사를 구성해왔다.
나는 오늘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따라 걸었다. 부작위 휴식이 아니라 작정하고 ‘길 잃지 않는’ 정도에서 길 잃어도 되는 저난도 일상을 살아 낸 셈이다. 사실 회룡 계곡 사건도 나를 피곤으로 몰아넣지는 않는다. 피곤하지 않으면 주파수를 낮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 이런 흐름에 나를 놓아둘 뿐이다. 어찌 살든 걷고 머문 장소, 그 내력에 주의하며, 내가 걷고 머문 풍경, 그 곡절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인간이며 남성이며 이성애자며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껏 실컷 생을 맡길 따름이다. 나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불확실하게 확실한 도상에 있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