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낯선 번호의 전화 한 통이 왔다. 잠깐 망설이다가 받으니 젊은 여성이 내 이름 뒤에 아저씨를 붙이고 맞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하자 자신을 아무개 큰 딸이라 소개한다. 아무개는 얼마 전 세상 뜬 내 고교 동창이다.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여러 곳에서 내 전화번호가 발견되어 대체 누군가, 궁금했단다. 생애 마지막 무렵 아주 힘들 때 심리상담을 해준 한의사라 하니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만나기를 청한다. 진료를 끝낸 뒤 근처 음식점에서 마주앉았다.

 

죽은 그 친구는 아주 어두운 유년시기를 보냈다. 엄마뻘인 배다른 큰 누이한테서 모질게 학대당했다. 그 원한감정을 끝내 떨치지 못한 채 우울증, 알코올중독, 간암으로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헤매다 쉰여덟 어느 이른 여름날 큰 누이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떠났다. 그 마음 한 자락 붉은 곳에 내 손이 닿았던 인연으로 나는 그의 딸아이 마음까지 다독여야 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딸아이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듣는다. 자주 자주 내 말을 메모해가며.

 

내가 해준 말은 두 가지였다. 좀 더 일찍 아버지 상태를 질병으로 인식하고 치유의 관점을 확보했더라면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가 그 하나다. 사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목까지 아내와 두 딸한테 철저히 외면당했다. 과도한 음주와 폭력으로 가족 모두를 피폐하게 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가족은 한결같게 그의 상황을 인격과 윤리 차원에서 이해하였으므로 치유는 물론이고, 용서도 화해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흔한 살풍경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 모두 특히 어린 막내딸이 필경 입었을 상처 이야기였다. 나는 막내딸이 아버지한테서 관통상을 입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아버지를 똑 닮은 남자친구에게 집착하여 어머니와 언니 속을 태우고 있단다. 상처가 내면화되었다는 증거다. 떠난 사람, 떠난 거 아니다상처로 병으로 엄연히 머물러 있다. 시급히 치유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가능성 높지 않지만 그 막내딸이 걸어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돌아가는 그 큰 딸의 가벼울 리 없는 발걸음을 보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큰 딸에게서도 그 아버지의 모습이 꽤나 많이 어른거리는 것을 본 터라 내 발길 역시 비에 젖은 그 이상으로 무거웠다. 지금 이 시간까지 삶과 죽음, 사랑과 상처, 가족....... 이런 생각으로 가슴이 젖어 있어 진료 중에 자꾸 숨을 몰아쉰다. 어르신 한 분이, 원장 선생 어디 아프우? 하신다. 민망히 웃으며 돌아서는데 설핏 어스름 이내가 마음 살갗에 살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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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이 흩어지는 울음 그만

그대의 어둠을 꿰뚫어 보면서

심연을 향해 비수처럼 울어요

 

온 감정 쓸어 담은 울음 그만

그대의 상처를 낱낱이 살펴서

마음 결 따라 울 때만 울어요

 

생각 줄 끊어 버린 울음 그만

그대의 슬픔을 생생히 담아서

심심한 애도로 곡진히 울어요

 

숨죽이며 흐느끼는 울음 그만

그대의 아픔을 통째로 실어서

심장이 터져 나가게 통곡해요

 

* 오랫동안 상담치료를 해오면서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울지 않는 환자는 치유하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울면 낫습니다. 그런데 치유에 방해가 되는, 나아가 치유와는 거리가 먼 울음이 있습니다. 

 

첫째, 고통울 외면한 채 이리저리 나뒹구는 울음입니다. 고통을 직면한, 고통으로 정향된, 도저한 울음에 치유력이 있습니다.

 

둘째, 다른 감정 표현을 은폐하는 울음입니다. 적재적소에 나타나는 다양한 감정 표현이 정신 건강의 표지인데 다른 모든 감정을 오직 울음으로만 표현하면 그게 불가능해집니다.

 

셋째, 울음에 파묻혀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울음입니다. 이런 경우는 울음의 근거인 감정을 애도할 수 없습니다.

 

넷째, 감정을 억눌러서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울음입니다. 흐느낌은 상처와 고통을 더욱 깊어지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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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경계를 세우고 허무는 대칭 행위의 길항으로 살아간다.

 

경계를 세우는 것은 서로 떨어진 개별자로 살기 위한 밀어 막기다.

밀어 막으면 다름이 생긴다. 다름이 창조하는 가치를 자유라 한다.

자유를 향해 난 길이 홀로 서기다. 정녕 홀로 서면 사랑할 수 있다.

 

경계를 허무는 것은 서로 이어진 보편자로 살기 위한 당겨 열기다.

당겨 열면 같음이 생긴다. 같음이 창조하는 가치를 평등이라 한다.

평등을 향해 난 길이 사랑이다. 오달지게 사랑하면 홀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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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定 - 관점을 바꾸어 쌍방향 진실을 보고 무지를 넘는다

2. 靜 - 전체 속에 자신을 놓아 사적욕망의 경계를 부순다

3. 浧 - 편안히 맡긴 채 거침없이 넘나들며 자유로이 논다

 

* 왕양명의 龍場悟道(定-靜-安)가 다소 불철저하고 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어서, 붓다의 삼독-삼학-삼특상, 원효의 일심-화쟁-무애로 보강하고 녹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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