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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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고통이 인간을 “가장 윤리적인 상태”로 데려간다고 말한다.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은 “나의 자족적 세계”가 파괴되는 사태를 경험하게 되고, 이는 인간이 본래 “타인과 상호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필자는 고통의 한 양태인 ‘우울증’이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라는 언명으로 나아간다.·······“이제, 소설은 우울증적 주체에 관한 서사가 되어야 한다.”·······“그대여 세상 밖으로 나가지 말라. (···) 그대는 우울증의 상태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줄 타며 살아가야만 한다.”·······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이라는 ‘상태’가 갖는 윤리적 의의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대여 세상 밖으로 나가지 말라”가 ‘정언명령’의 자리로까지 승격되는 것은 어쩐지 네거티브하다는 느낌이다.·······윤리학은 투쟁의 형식이기를 그만두는 순간 투쟁하지 않기 위한 변명이 되고 만다.(175-177쪽. 여기에 나오는 ‘필자’는 평론가 허윤진을 가리킴.)

 

몰락의 에티카는 문학이 증상이라는 것, 그러니까 증상으로서 문학을 지론으로 삼습니다. 허윤진에 관한 논의는 타당성 여부 차원에서 진행한 게 아닙니다. 소극적이다, 곧 ‘네거티브하다’는 지적이 포인트입니다. ‘네거티브’한 ‘정언명령’이 ‘투쟁의 형식’으로는 아무래도 약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취지에 맞게 바꾼다면 아마도 ‘그대여 세상 경계에 서라’ 쯤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친절하게 한 마디 보태면 ‘그대여 작심하고 세상 경계에 서라’ 쯤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과장되게 수다를 떨면 ‘그대여 두 주먹 불끈 쥐고 세상 경계에 서라’ 쯤이 될 것입니다.^^

 

우울증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해도 될까요? 되고말고요! 이 점을 의학적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아, 이 대목을 쓰는데 허윤진 비평집 「5시 57분」이 도착했습니다. <춤추는 우울증>을 읽고 이어서 쓰겠습니다.

 

 

<춤추는 우울증>을 읽어보니 전체 문맥 상 우울증 그 자체가 먼저 포착되어 논의의, 또는 주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윤진이 정조준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휘감은 조증mania, 그러니까 집단적 광기mania입니다.

 

조증은 매혹적인 별명들을 거느리고 세상을 지배합니다. 행복, 웰 빙, 성공, 대박, 상위 1%, 뜬 사람(celebrity), 청담동, 힐링, 긍정의 힘, 무통無痛, 명품·······이들에게 모든 것은 한 방향으로 서 있습니다. 상대방이 없으니 소통도 없습니다. 시간의 통로에서 빚어지는 성찰이 없으니 변화도 없습니다. 자족 부동의 세상에 윤리란 당치 않습니다. 윤리가 당치 않으니 인간 또한 당치 않습니다. 인간부재의 세상에 조증사회증후군(maniac society syndrome)이 중심으로 좌정하고 있습니다.

 

조증사회증후군에 점령된 세상은 인간답지 못한 세상입니다. 인간인 한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한, 아니 인간이려면 세상의 경계로 가야만 합니다. 경계는 고통이 살아 숨 쉬는 시공입니다. 경계는 조증을 병으로 인정하지 않는 중심과 다릅니다. 우울증을 병으로 인정하고, 그 고통을 받아 안은 사람들이 삽니다. 모순, 아니 역설의 시공인 경계는 우울증적 주체의 운명적 거처입니다.

 

경계에 서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울증 상태를 알아차리고 기꺼이 견디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허윤진은 퇴로를 차단하는 어법을 씁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라, 고 금을 긋는 것입니다. 몰락의 에티카가 ‘네거티브하다’고 한 말의 함축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극적이다, 약하다, 의 그것이라면, 여기서 전체 문맥을 살펴 재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허윤진의 어법이 네거티브하다고 해서 그다지 약해 보이지 않습니다. 몰락의 에티카가 ‘포지티브’를 권하지만 그다지 강해보이지 않습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까닭은 둘 다 우울증 자체에 대해 핍진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학이나 정신분석의 말자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부분은 적이 아쉬운 바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더 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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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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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이 아닌 것은 세계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고통의 절대성만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유일한 것이다.”(아도르노)·······그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물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고통의 유물론이어야 한다.·······(61쪽)

 

무한중첩의 역설이 세계의 진실을 구성합니다. 역설은 대칭, 가령 전자electron와 광자photon의 마주함과 같은 것입니다. 이 대칭의 어름에 온새미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고통, 엄밀히 말해 통痛, 그러니까 아픔입니다. 아픔은 세계의 숙명입니다. 숙명은 절대의 관통력으로 세계를 향해 들이닥칩니다. 세계는 숙명을 자발적으로 흡수해 들여야 합니다. 흡수하면 넘어섭니다. 넘어서면 창조의 지평선이 열립니다. 요컨대 고통은 창조의 전제입니다.

 

결론이 명쾌하다고 거기 쉽게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가 단도직입으로 고통을 흡수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실패합니다. 고통은 본디 자타自他와 상변常變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미끄러짐과 엇나감, 간단히 말하면 접힘의 사건입니다. 이 접힘의 사건을 저와 같은 의자醫者는 병이라고 부릅니다. 병은 고통을 심화·증폭·재생산합니다. 그 심화·증폭·재생산의 갈래는 이렇습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타자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경계가 강화되고 자기 보호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분열형의 병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자기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경계가 붕괴되고 자기 포기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우울형의 병입니다. 세계의 공시적synchronic 지평에서 대칭이 무너져 생긴 경계선의 병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상, 곧 불변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고착이 강화되고 반복적 규칙성으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강박형의 병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변화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지속성이 붕괴되고 변덕으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전환형의 병입니다. 세계의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대칭이 무너져 생긴 변곡점의 병입니다.

 

 

절대 고통, 그러니까 유물론적 고통에서 발원한 이런 구조적인 실패/병에 편승하여 세계를 억압과 착취, 종당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세력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풍요, 그리고 구원의 탈을 뒤집어쓴 권력·자본·종교가 바로 그 저주의 삼두마차입니다. 이들에 맞서려면 단 하나의 대오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몰락의 에티카가 인용한 김훈의 남한산성서문에 있는 표현을 재인용함.)에 서는 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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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의 고통은 윤리적이다.·······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린다·······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히 해부학적이라고 해야 할 시선으로 파고들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유물론적 타자론·······(47-51쪽)

 

세월호 국정조사 자리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이란 자가 “유족보다 더 가슴 아프다”며 허풍떨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리는 경우의 전형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언급은 아무리 천천히 해도 언제나 조급이며, 아무리 알뜰히 해도 언제나 허영입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과 마주할 때 정직한 의자醫者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막막함”입니다. 저 고통에 가 닿을 수 없구나, 가 가장 먼저 들이닥칩니다. 곧 이어, 건넬 말에 비해 고통이 너무 크구나, 가 몰려옵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을 뻘뻘 흘리는 정신 줄을 놓지 않고 하염없이 듣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떤 순간 홀연히 작은 틈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 틈에 깃들고서야 인연 지어갈 길을 보는 것입니다.

 

상담을 하는 중에 모순된 진실을 도처에서 만납니다. 어느 때에는 말이 턱없이 무디고 모자라는구나, 하다가, 또 어느 때에는 말이 지나치게 번다하고 장황하구나, 합니다. 앞의 경우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느낌입니다. 뒤의 경우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느낌입니다. 이 뒤집어짐에서 오는 자책으로 격한 우울감에 빠져들곤 합니다. 마음치유의 길을 걷는 자에게 문학과 명상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치유자의 길을 걷는 자는 시를, 소설을, 비평을 다만 읽지 않습니다. 살과 뼈를 발라내며 읽습니다. 마음치유의 길을 걷는 자는 그저 웰 빙으로 소비하는 고요를 누리지 않습니다. 침묵을 창조하는 고요에 깃듭니다. '조급과 허영으로 세상을 불행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해부와 침묵을 가로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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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윤리학과 진실의 윤리학이 있다. 선의 윤리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진실의 바이러스를 선의 이름으로 퇴치한다. 반면 진실의 윤리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셋 버튼이다. 그것은 때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되는 벼랑 끝에서의 한 걸음이다.(18-19쪽)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2013년 프랑스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 문제입니다. 프랑스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논문 식 답안을 쓸 수 있는 철학을 배우는 동안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국민윤리를 주입식으로 배웁니다. 바로 이 차이가 세월호 참극을 낳은 것입니다.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은 지배이데올로기 아래서 ‘선’한 국민으로 이이들을 길들이기 위해 정당성 없는 정권이 만들어낸 홍보수단입니다. 선이 애당초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사회 현실에서 본다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라고 선을 규정한 것은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하다”는 표현처럼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한” 사람처럼 시스템적인 악에 잘 순응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선의 반대말이 악인데도 이렇게 길들여진 “선한” 사람들은 분연히 악의 편에 섭니다. 사회정치적 스톡홀름증후군이랄 밖에요.

 

선은 길이 아닙니다. 선은 접힌 현실을 펴지 않은 채 “차카게” 머리 조아리는 것입니다. 진실이 길입니다. 진실은 접힌 현실을 펴기 위해 내디디는 벼랑 끝에서의 한 걸음입니다.

 

 

마음치유의 일선에 선 사람의 처지에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한 것은 약한 것이다. 약한 것은 악한 것이다.”

 

무엇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주위에서 언제나 착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착함은 거절하지 못 하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퍼주고, 보살피는 드넓은 오지랖으로 나타납니다. 그 오지랖은 본인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타인에게 ‘봉’으로 각인됩니다. ‘봉’은 착함의 경계를 한참 지나쳐 약함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그 약함은 끝내 자신을 파괴하고 맙니다. 우울증의 본령이자 최후입니다. 제 생명을 이렇게 파괴하는 것이 어찌 악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울증 앓는 사람들에게 우선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를 보냅니다. 이것은 자기 파괴적 선에 빠져 있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하려고 내는 틈입니다. 그 틈을 통해 불편한 진실이 배어들도록 합니다. 그 다음,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할 무엇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모순에 맞닥뜨린 그들이 혼란에 빠져들 때 곁을 지킵니다. 혼란의 소용돌이가 빚어내는 “숭고한 표정”(5쪽)에 함께 물들어 갑니다. 더 이상 ‘봉’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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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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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불가피하다.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기 때문이다.·······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13-14쪽)

 

흔히, 문학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할 때, 그 의미가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불량품입니다. 불량품이 불량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불량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같은 말입니다.

 

조금 더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량품으로서 현실은 거의 대부분 접혀 있습니다. 접혀 있으므로 그를 펴는 것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접힌, 그러니까 반쪽인 상태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재현하는 것입니다.

 

접혀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몰락의 에티카」에서는 말의 미끄러짐, 행동의 엇나감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서로 이탈하여 적중하지 못 함으로써 삶이 이치대로, 바라는 대로 활짝 펼쳐지지 못 하고 구겨지거나 비틀리거나 심지어 뒤엉켜 붙어버리는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간단히 접혔다, 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접히면 전체 진실이 부분으로 축소되고 은폐됩니다. 축소되고 은폐되는 진실은 다만 크기 차원이 아닙니다. 전체 진실의 근본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전체 진실의 근본 성격이란 다름 아닌 대칭성입니다. 대칭성을 드러내지 못 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독단, 그러니까 일극(집중)성이 바로 접힌 상태입니다.

 

문학은 대칭성이라는 진실인 현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일극(집중)성이라는 접힌 현실과 용기 있게 대면, 그러니까 대치(對峙)하는 것입니다. 접힌 현실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허구이며 과장됨입니다. 열린 현실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진실이며 정확함입니다. 문학은 뻥튀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다림질입니다. 문학의 표면이 팽창된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 현실의 표면이 쭈글쭈글한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의자醫者의 처지에서 말씀드리자면 이 접힘이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치유는 당연히 펴는 일입니다. 바로 지금-여기서 단도직입의 질문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면 문학과 치유는 같은 층위의 말이며 행동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가 답입니다. 교집합과 차집합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펴지 않으면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펴지 않은 채 하는 치유는 모두 가짜입니다. 예컨대 긍정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펴기만 하면 치유가 될까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입니다. 세계의 진실, 대칭성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기 때문에 펴만 놓아서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미치거나 죽습니다. 견딜 수 있도록 틈을 마련하고, 모순을 가로지르는 이치를 터득하는 동안 보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자醫者의 구실입니다.

 

시인과 소설가는 펴는 일에 능하나 틈 내고 보살피는 일에 어수룩합니다. 의자醫者는 틈 내고 보살피는 일에 능하나 펴는 일에 어수룩합니다. 문학이 불가피한 저 건너편에서 의학 또한 불가피합니다. 바로 여기가 문학과 의학, 그러니까 인문과 치료가 만나는 어름입니다. 오늘날 접힌 현실에서 문학은 문학대로 허접하고 의학은 의학대로 허접한 까닭은 서로 그 대칭성의 한 축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여, 소설가여, 의자醫者를 그대 삶에 초대하시라. 의자醫者여, 그대 삶에 시인과 소설가를 초대하시라. 연대하시라. 말은 착착 달라붙고, 행동은 딱딱 맞물리는 세계를 창조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도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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