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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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의 망집에서 벗어날 때 현시되는 세계(-인용자)·······실상·······,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떤 비()인칭적인(비인간적인) 에너지(-인용자)·······기운·······을 포착하(-인용자)·······“언제나 삶을, 그것을 가두어놓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혹은 그것을 불확실한 투쟁으로 이끌어내는”·······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보다는 장차 도래할 인간을 향해 말·······합니다.(282)

 

상식과 달리, 사람 뇌에는 만족이라는 개념의 방이 없습니다. 뇌의 개념 방에서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경이감驚異感입니다. 경이감은 삶의 불확실성, 그러니까 비결정성과 맞닥뜨릴 때 일어나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불확실성 또는 비결정성은 삶의 본령입니다. 경이감은, 그러므로 삶을 삶답게 살게 하는 momentum입니다. 경이감의 마비를 강제하는 그 무엇이라도, 가령 자아·인간적임·서정·동일성·진리 따위, 죄다 투쟁 대상입니다. 그런 데 갇힌 경우라면 해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과 투쟁은 뒷문이 활짝 열려 있으니 결국 같은 주파수를 지닙니다.

 

알 수 없는 진실의 난장에서 낯선 것들과 뒤엉키면서 기약 없는 길을 떠날 때 비로소 기운氣運은 생동生動하며 실상實相은 여여如如합니다.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입니다. 무상과 무아가 교직을 이루며 통, 그러니까 아픔을 빚어냅니다. 이 아픔의 증상을 참혹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 시입니다. 시는 아픔을 통해서 장차 도래할 인간에게 바쳐진 경이감 어린 헌사입니다.

 

 

지금-여기 대한민국 살아 있는 자들 앞에 이백쉰 서로 다른 꽃다운 죽음의 극한 통증이 있습니다. 그 아픔의 증상을 참혹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느냐, 여부에 따라 이 나라는 흥망의 갈림길에 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시인, 그것도 참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망집으로서 자아와 탐욕으로서 인간종자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장차 도래할 인간을 피눈물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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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혁명의 상태일 때에만 그것은 혁명이다.(245쪽)

 

그러니까, 가령 이런 것입니다.

 

·······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동안

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는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마지막 부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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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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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줄기들이 그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일·······이질성들이 공존(con-sist)하면서 ‘무질서의 질서’라고나 해야 할 어떤 일관성(consistence)에 도달하는 일·······(244쪽)

 

국보 제169호 청자양각죽절문병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그 때 받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받은 감동은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과는 다르지 싶습니다. 고려청자의 빼어난 비취색이나 그 병의 아름다운 형태미 등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를 사로잡은 것은 말로만 듣던 국보 청자양각죽절문병이 “대충” 만들어졌다는, 그러니까 장인이 낮술 한 잔 걸친 채 손톱으로 죽죽 대나무 사이를 가르고, 되는 대로 쓱쓱 대나무 마디를 그었다는, 느낌이 주는 무량한 친근감과 온기였습니다.

 

월드스타 김윤진을 영화 아닌 실제에서 가까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사뿐사뿐 걷는 배우가 아니고 아파서 옴쭉 달싹하지 못하며 신음을 토해내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맨얼굴 김윤진을 말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건대, 분명히 그 맨얼굴 김윤진이 훨씬 더 아름다웠습니다. 아픔이란 창을 통해 드러나는 무량한 친근감과 온기는 그 어떤 화장과 미용술로도 빚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분자분 병에 대해 이야기하며 때로는 묵묵히 그에게 침을 놓았습니다.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무엇, 무질서의 질서에 도달하는 무엇이 아니라면 실로 예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무엇, 무질서의 질서에 도달하는 무엇이어야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드러내는 게 예술의 본령이라면 이는 사람의 그것과도 같으니 결국 사람은, 그러니까 삶은 예술이어야, 아니 적어도 예술을 향해 부단히 걸어가야 하는 무엇입니다. 이 과정을 인문人文이라고 합니다. 인문의 위기는 삶을 예술 아닌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 아닌 사람’이 판을 치고 있는 사태입니다.

 

 

군대 폭력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문학이 운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실소가 절로 터져 나옵니다. 대체 인문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렇게 인식한 인문학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온 나라를 사업 판으로 만들어 반反인문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고서 인문학을 떠드는 이 적반하장의 코미디. 연대의 맞은편에 날뛰는 자유가, 질서의 맞은편에 질펀한 무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떠드는 인문은 가짜입니다. 가짜가 권력으로 세월호의 진실을 뭉개는 오늘 정녕코 아나키의 미학이 필요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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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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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자면, 시는 외국어로 쓰는 것이다.(239)

 

단도직입, 이렇게 절벽 끝으로 밀어버립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는 외계어로 쓰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듯 인간의 정신상태 중 가장 제대로인 것은 바로 정신분열 상태입니다. 모순의 공존, 그러니까 역설이 현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장 제대로인 그 상태가 그러면, 왜 병일까요? 당사자가 그 진실을 모른 채, “무심코너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진실을 알고, “유심히”, 그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름 아닌 시입니다, 그것도 외계어로 쓴.

 

읽는 이가 함부로, 대뜸, 알아먹으면, 그러므로 당최 시일 수 없습니다. 어렵다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접힌 마음으로 어찌 펴진 마음을 한 눈에 알아보겠느냐, 는 말입니다. 접힌 자의 눈에는 펴진 자가 사람이 아닙니다. 외국인은, 적어도 사람입니다. 외계인은, ‘자가 붙어 있으되 결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아닌, 헛것의 언어로 쓴, 증상으로서 시는, 그러므로 언어를 깨뜨림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시는 손으로 읽습니다. 뜨거운지, 차가운지, 딱딱한지, 무른지·······대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시는 코로 읽습니다. 살과 숨의 냄새를 맡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시는 귀로 읽습니다. 신음 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읽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단診斷으로서 시 읽기입니다. 진단으로서 시 읽기는 제가 의자醫者이기에 지닌 감수성에서 온 것입니다.

 

저는 이런 진단을 -진단이라 합니다. 아픈 이에 기대어 일일이 살피는 겸손한 진단입니다. 한의학에는 이런 진단을 천명한 <상한론傷寒論>이라는 텍스트가 있습니다. 반대로, 한 눈에 척 봐도 다 아는 권위주의적 진단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진단이라 합니다. 이런 진단을 제시한 <황제내경黃帝內徑>이라는 텍스트가 있습니다. 논은 설이고 경은 법입니다. 논은 일리一理를 제시하고 경은 진리眞理를 선언합니다. 논은 서로 다름을 전제하고 경은 서로 같음을 강제합니다. 주류 한의학은 <황제내경>을 추종하므로 당연히 경-진단에 의존합니다. 저는 그저 서로 다른, 일리 있는, 설을 말할 뿐이므로 논-진단을 합니다.

 

-진단으로 다가서야 아픔에, 그러니까 시에 제대로 배어들 수 있습니다. -진단은 끝내 시는 물론, 시인과 독자 모두를 속이고 맙니다. 우리는 이미, 이제 뼈저리게 겪고 있습니다. 이 기만의 시, 그 시가 은폐해온 세상 말입니다. 우리가 누려온 서정의 옥토에서 무럭무럭 자란 매판과 독재, 그리고 썩은 종교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나라에 왔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종교지도자이자 바티칸의 국가수장이지만 전능한 신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나라 어둠은 그가 빛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슬픈 일입니다. , 성호 엄마가 이 나라 대통령이 아닌 교황의 손을 잡고 울어야 하는지요. , 이 나라 대통령은 그 엄마 손 잡은 교황 뒤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어야 하는지요. 그 대답을 대체 누가 해야 하는지요. 바로 이 시공에서, 시는, 시인은, 시 읽는 이는,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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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8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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