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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능력이다.(348쪽)
결혼한 지 스무 해도 넘은 어느 날 문득,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는 한가?” 하는 질문이 들이닥쳐 정좌하고 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내와 딸에게 쏟는 나의 사랑이 과연 충분한지를 묻는 실용적인 반성보다 깊은, 그러니까 근본적인 무엇이라는 사실을 대뜸 알아차렸습니다.
제 내면에, 타인은 고사하고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어떤 어둠이 있지 않은가, 그 날 이후 찬찬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붙잡혔던 우울증에 대해 어느 결엔가 남의 집 대추나무에 대추 달린 이야기하듯 해온 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자醫者라는 직업의 타성일 테지요.
우울증은 기분이 꿀꿀한 정도가 깊어진 병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에 금이 간, 아니 금을 낸 병입니다. 그 결과 타인에게 자기 파괴적인 희생을 하는 병입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함정이 패입니다. 타인에 대한 자기 파괴적 희생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바로 그것. 이 오해 때문에 숱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지하지 못 한 채 살아가고, 그러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기 느낌을 지우고 상대방의 느낌을 부풀려 그 느낌 안에서만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교류’로 흐르는 느낌의 공동체 구성 능력입니다. 주고받을 때에야 비로소 ‘능력’이라 부릅니다. 우울증 환자의 자기 파괴적 희생은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떨어지는, 적어도 미끄러지는 관성입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827/pimg_7816061151060039.jpg)
지금 우리사회는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능력으로서 사랑을 일구어 가려는 ‘능력’ 없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합니다. ‘능력’ 있는 자들의 기획과 외면, 그리고 비아냥거림으로 죽어가면서도 사랑을 낳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 어름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하고자 하는 그대여, 이 죽음의 시대를 뚫고, 우리가 주고받을 느낌, 그 느낌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