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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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그녀는 또 어디론가 떠나려나보다. 사실 그녀는 본래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투명인간은 원본 없는 자유이고 중심 없는 생성이다.·······느낌의 세계에서 느낌의 위력으로 우리는 사랑스러워지고 드디어 모호해진다.(367-368쪽) 행위가 전부다. 코기토는 없다.(358쪽)

 

 

느낌의 공동체에서 행위자, 그러니까 코기토는 모호해지고 또 모호해지다가 마침내 투명한 행위로만 존재, 아니 관계합니다. 관계로서 행위는 무한의 특이점인 자유이고 남김없이 가장자리가 되는 생성입니다. 자유로운 생성, 생성되는 자유를 위해 우리는 점멸함으로 '타자'인 사람들 속으로, '타인'인 사람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여 '자아'는 사라집니다. 이윽고 '타인'이 사라집니다. '주체'와 '타자'의 행위인 느낌의 공동체가 점멸할 때 그것은, 그것만이 사랑입니다. 다만 사랑을 남겨두고 우리 모두 지금-여기 떠납시다, 헛것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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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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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고 충실하고 무구한 시, 그러니까 세계라는 사건의 공간을 위와 아래와 뒤의 도움 없이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시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낯선 것이다.(355쪽)·······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다.·······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이다.(367쪽)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말이야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지만 그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충실하게, 무구하게 느낄 수 없도록 이미 조작된 감각기를 지닌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있는 그대로’의 감각이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조작된 우리의 감각이 난해하게, 혼란스럽게 협소하고 진부한 것입니다.

 

협소함-숙명으로 지니는 공포·탐욕·무지(어리석음) 때문에 인간은 광활함spaciousness의 땅으로 나아가지 못 합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움켜쥐고 있는 알량한 안정·재물·이념 따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알량한 토대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비난합니다. 그럴수록 불투명하게, 허술하게, 영악하게 세계를 파악합니다. 그럴수록 세계는 접히고 접혀 ‘있는 그대로’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진부함-협소함을 유지·온존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경계의 공고화입니다. 이는 공시적synchronic 진부함입니다. 자기 경계를 허물지 않으니 자기 밖의 내용이 들어설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원칙의 영속화입니다. 이는 통시적diachronic 진부함입니다. 자기 원칙을 바꾸지 않으니 새로운 내용이 들어설 수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무리 기다려도 ‘있는 그대로’ 경이로움이 들이닥칠 가능성은 없습니다.

 

 

옆으로, 옆으로 광활하게 번져갈 때만이 경이로운 세계, 그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반갑고도 깔끔한 느낌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광화문과 청운동에 그런 세계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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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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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옆을 본다.(353쪽)

 

이렇게 바꿉니다.

 

“견성見性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권세와 부에 기대지 않고 전능한 신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 구원을 보는가.·······이웃에게서 구원을 본다.”

 

나의 구원이 너에게 있습니다. 아니 너 자체입니다.

 

윤동주의 <병원>을 읽습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가 본 “”은 다름 아닌 “그가 누웠던 자리”입니다. 아픈 네가 햇볕을 쪼이던 자리, 그 사소한 희망, 그 하찮은 온기의 자리가 아픈 내가 누워볼 자리입니다. 유민 아빠가 누웠던 바로 그 자리가 우리 모두 함께 누워볼 자리입니다.

 

가뭇없이 정의 사라진 이 땅에서라면 가없이 옆으로 번져가는 생명의 연대만이 깊음 너머이며, 두터움 너머이며, 높음 너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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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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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 분해되고 ‘나’도 해체된다. 없는 존재가 없는 세계를 노래하는·······것은 가능한가? 느낌의 공동체에서는 가능하다.(351쪽)

 

몇 해 전 어느 저명한 정신과의사가 상습적으로 아내를 폭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정신을 치료한답시고 설치는 것일까,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면 이런 이야기가 우리사회에서 그다지 드문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회의원, 대법원·헌법재판소 재판관, 국무위원들이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그 직에 당선·임명되는 일은 이미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일곱 시간 동안 현직 대통령의 행적에 의문이 일고 있는 판국 아닙니까.

 

 

대체 어쩌다 이런 일들이 ‘대놓고’ 일어나는 사회가 되었을까요? 힘 있는 자들이 ‘나’를 구성하여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구조적 탐욕을 극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쇠락의 길로 이끌어 일제에 팔아넘긴 세력이 35년 만에 국권을 도로 넘겨받은 뒤 자본과 종교를 끌어들여 나라를 더욱 강고한 사적 이익의 창출 체계로 만들어온 역사가 오늘 우리의 모습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저들의 ‘나’를 해체함으로써 저들의 세계를 분해하는 것. 저들이 스스로 하지 않을 터이므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이들이 스스로를 해체하여 그 해체 바이러스가 저들의 세계를 낱낱이 분해하게 하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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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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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능력이다.(348쪽)

 

결혼한 지 스무 해도 넘은 어느 날 문득,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는 한가?” 하는 질문이 들이닥쳐 정좌하고 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내와 딸에게 쏟는 나의 사랑이 과연 충분한지를 묻는 실용적인 반성보다 깊은, 그러니까 근본적인 무엇이라는 사실을 대뜸 알아차렸습니다.

 

제 내면에, 타인은 고사하고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어떤 어둠이 있지 않은가, 그 날 이후 찬찬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붙잡혔던 우울증에 대해 어느 결엔가 남의 집 대추나무에 대추 달린 이야기하듯 해온 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자醫者라는 직업의 타성일 테지요.

 

우울증은 기분이 꿀꿀한 정도가 깊어진 병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에 금이 간, 아니 금을 낸 병입니다. 그 결과 타인에게 자기 파괴적인 희생을 하는 병입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함정이 패입니다. 타인에 대한 자기 파괴적 희생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바로 그것. 이 오해 때문에 숱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지하지 못 한 채 살아가고, 그러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기 느낌을 지우고 상대방의 느낌을 부풀려 그 느낌 안에서만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교류’로 흐르는 느낌의 공동체 구성 능력입니다. 주고받을 때에야 비로소 ‘능력’이라 부릅니다. 우울증 환자의 자기 파괴적 희생은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떨어지는, 적어도 미끄러지는 관성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능력으로서 사랑을 일구어 가려는 ‘능력’ 없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합니다. ‘능력’ 있는 자들의 기획과 외면, 그리고 비아냥거림으로 죽어가면서도 사랑을 낳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 어름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하고자 하는 그대여, 이 죽음의 시대를 뚫고, 우리가 주고받을 느낌, 그 느낌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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