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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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일, 어제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일, 그래서 내일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일.(390쪽)

 

이렇게 바꿉니다.

 

어제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일: 일심一心, 오늘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일: 화쟁和諍, 그래서 내일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일: 무애無碍.

 

일심은 통속적인 감각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 마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인 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그 사이에 있습니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비대칭의 대칭, 그 구조가 무량무수 자발적으로 부서지면서 새로운 무엇이 창조되는 운동 전체를 일심이라 합니다. 내가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화쟁은 비대칭의 대칭, 그 구조가 무량무수 자발적으로 부서지는 지극한 소요騷擾 과정 그 자체입니다. 소란스러운 동요動搖가 천방지축 날뜁니다. 칼날을 타고 덩실거리는 춤의 굿판이 신명과 경이를 교차적으로 쏟아냅니다. 슬픈 놀이와 웃기는 제의가 한 시공에서 뒤엉킵니다. 대성통곡과 포복절도가 난장을 칩니다. 내가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무애는 화쟁의 소요가 끝난 뒤에 오는 고요입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 소요는 불가피하지만 자유를 찾은 다음 소요는 불필요합니다. 더 이상의 떠들썩한 ‘스캔들’은 도리어 자유를 싸구려로 만들 뿐입니다. 부르지 않아도 잘만 들리는,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음악’이 거침없이, 또한 가없이 번져갑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난 4월 16일 당신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상처를 이해한 것입니까? 당신은 지금 청운동에서 국회에서 팽목항에서 분노와 슬픔에 겨운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까? 침묵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내일을 과연 맞이할 수는 있는 것입니까? 질문에 답변을 차마 할 수 없으니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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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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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소통되지 않고 치유는 점점 병리적인 놀이가 되어간다.·······도대체 이런 놀이들은 왜 필요한 것일까. 상처 때문이다.·······상처는 왜 놀이를 낳는가. “처음에 그는 수동적인상황에 있었다. (···) 놀이로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능동적인역할을 취하게 되었다.” 수동적으로 겪은 상처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다.(382-383: 큰 따옴표 안 문장은 프로이트의 견해임-재인용자)

 

상처는 반응reaction을 낳습니다. 반응은 병리적 상호작용입니다. 병리적 상호작용 가운데 재연이 있습니다. 재연 가운데 놀이가 있습니다. 놀이는, 결곡하고 곡진하면, 감응response으로 갑니다. 감응할 때 상처는 낫습니다.

 

놀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해는 정곡을 찌른 것이 아닙니다. 진실의 핵심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동에서 능동으로 가는 것이 극복의 요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처 입은 사건을 놀이로 전환하는 행동은 자기가 겪은 사건의 접힌 진실을 펴는 옹골참과 그것을 자기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드넓음이 맞물릴 때만이 극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는 그저 병리적 상태에서 머무르고 말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 입은 자의 놀이가 상처 없는 자의 놀이를 흉내 내다 끝나는 것만큼 참담한 비극은 다시없습니다.

 

[접힌 진실을 펴는 옹골참]

 

놀이는 상처의 증상을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술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협소하고 진부하게 느끼고 알아차린 증상을 정확하고, 깨끗하고, 야무지게 펼치고 새로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술적일수록 옹골차고 옹골찰수록 예술적입니다. 미학적일수록 진단의학적이고 진단의학적일수록 미학적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더 아픈 곳을 더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눈에는 연극처럼 과장처럼 보입니다. 억압되어 있는 진실을 해방하려면 앙칼지고도 질탕한 연기가 불가피합니다. 우울이든 분열이든, 꺽꺽이든 깔깔이든, 너울너울 넘나드는.

 

[상처를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드넓음]

 

포개고 쪼개고 울고 웃으며 노는 동안 상처 받은 사람은 알게 됩니다. 그 상처가 내 인생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될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있어도 되고 있을만하다는 진실을. 전혀 상처 없는 인생으로 축복 받은 바도 없고, 온통 상처뿐인 인생으로 저주 받은 바도 없다는 진실을. 상처 받는 것이 인생의 본령이라는 진실을. 내 인생에 실린 상처는 종당 내가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면 아파서 더 애틋한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는 진실을. 애틋한 상처의 영지를 더하면 내 인생은 더욱 드넓은 우주가 된다는 진실을.

 

  

  

본디 놀이가 거룩함의 본진입니다. 이른바 고등종교 제의 따위로 떠올려지는 엄숙주의 거룩함은 상처로 운명 지워진 인간이 그것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인 뒤 쌓아올린 짐짓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짐짓퍼포먼스가 만들어내는 거짓 거룩함의 정체를 밝히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짐짓퍼포먼스보다 더 큰 진실의 전체에 주의해서 다시 짐짓퍼포먼스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스꽝스럽지요. 그 다음, ‘짐짓퍼포먼스의 단위 하나하나를 해체해보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장난이지요. 놀이에 이런 검증방식을 적용하면 어찌 될까요? 이민하의 시를 읽으면 답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사이비가 엄존하듯 놀이에도 사이비가 있습니다. 놀이는 무심코시작해서 유심히진행되다가 무심히종결되어야 참된 놀이입니다. 처음부터 유심히하면 놀이가 아니고, ‘무심코로 시종일관하면 병리증상이고, ‘무심히가 생략되면 노동이 됩니다. 마음의학 어법으로 말하면 놀이는 치료를 향하되 치료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무엇입니다. 치료의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거룩함은 사라집니다.

 

여기까지 오면 향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은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그래, 삶이 놀이로구나. 여기까지 오면 향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은 가슴 아프실 것입니다. 이 이치를 저버리고 엄숙무인지경의 세상을 만든 자들이 권력과 자본과 종교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충성하는 노동 일극집중구조를 강요하는 거로구나. 오늘도, 내일도, 향 맑은 영혼은 거룩한 놀이로 광화문에 좌정합니다. 거기서 고통은 소통되고 상처는 상동相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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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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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자유’를 꿈꾸되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위장된 자유’로 남을 때 시는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시는 ‘자유의 위장’ 그 자체가 아닐까.·······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위장의 방법론과 은폐의 대상을 이해하는 일이다.(377-378쪽)

 

‘완전한 자유’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언어로 표현된 ‘완전한 자유’가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완전한 자유’라면 타인이 결코 그것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타인이 감지해낸 ‘완전한 자유’라면 실제로는 가짜일 것입니다. 적어도 언어에 실려 모습을 드러낼 운명인 한 “대상을 희미하게나마 거느릴 때” 자유는 ‘자유다운 자유’일 수 있습니다. ‘자유다운 자유’이려면 누림이 가능해야 합니다. 누림이 불가능한 분열적 자유는 그 자체로 정신병입니다. 누림이 누림다우려면 함께 누림이어야 합니다. 함께 누리기를 거절한 초월적 자유는 그 자체로 반인간적 범죄입니다.

 

우리 삶의 최후 목표가 자유, 그것도 ‘완전한 자유’라고 하면 시가 할 일은 자명합니다.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끝까지 추구해 ‘완전한 자유’로 육박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대상을 희미하게나마 거느릴” 각오(!)를 다져야만 합니다. 그 각오가 위장의 미학을 옹골차게 닦아세울 것입니다. 위장의 미학이 옹골찰수록 대상은 절묘하게 희미해질, 그러니까 모호해질(김행숙) 것입니다. 희미하고 모호해진 대상이 마치 낫에 베어지는 찰나의 풀처럼 존재의 마지막 향기를 뿜어낼 때 ‘불완전한 완전’은 ‘완전’을 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이라는 말만큼 우리사회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완전 좋다, 완전 예쁘다, 완전 맛있다·······물론 과잉된 느낌과 평가가 수반된 표현입니다. 사회심리적인 근거를 분명히 지니고 있겠지요. 함량미달의 유사품이 광고에 힘입어 대량 유통되는 사회에서 소비자가 겪는 심리적 갈증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광고와 유통의 논리를 내면화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온갖 매체를 연예인이 장악하고 있는 스타시스템 아래서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입에 올리는 순간 공식적이고 국민적인 말이 될 뿐만 아니라 말이 주는 분위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풍조의 최종 배후에는 물론 권력과 자본과 종교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일으키는 정치적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거할 때만 되면, ‘완전’ 공약. ‘신상’ 나올 때만 되면, ‘완전’ 성능. 헌금 걷을 때만 되면 ‘완전’ 축복. 천태만상의 사기 카드를 꺼내들지만 두 달 뒤에 어김없이 오리발 내미는 파렴치 마케팅.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지배층의 존재양식입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드러나고 있는 가짜 ‘완전’의 실체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의 ‘완전’에 대한 자기최면을 더욱 맹렬하게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사회의 슬픈 현주소일 테지요.

 

완전하지 못한 것을 완전하다고 호들갑떨 때 우리는 속임 당하며 또 그 방식으로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루한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참된 자유, 그것도 ‘완전한 자유’를 꿈꾸려면 허접한 말에 중독되지 말아야 합니다. 허접한 말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시를 읽어’야 합니다. 시에 담긴 위장의 방법론과 은폐의 대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를 읽어’ 자유다운 자유를 찾은 시민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슬픔과 어둠 속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나중까지 함께 앉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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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없습니다.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문제작」중에서(강조는 시인-시인은 이민하(재인용자))

 

·······‘지시’는 대상을 전제하고 그것으로 환원되지만, ‘암시’는 무한대의 대상으로 열려 있다. 손가락이 지시하는 것을 찾지 말고 손가락 자체가 암시하는 바를 음미하라는 뜻으로 읽힌다.·······시인의 당부가 이어진다.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그걸 둘러싼 허공을 보세요.”)(372-373쪽)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가르침으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쳐다보느라 정작 가리키는 달은 잊고 있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책입니다. 대승경전 능엄경楞嚴經에 나옵니다. 아마 시인도 저자도 이 가르침에 서려 있는 남성가부장적 일극집중구조를 읽어내어 해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손가락 보지 말고 달 봐라, 도 역시 아니올시다, 란 것이지요. 진실은 손가락을 둘러싼 허공, 그 허공에 펼쳐진 무한한 스펙트럼의 어스름에 있지 휘영청 밝은 빛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여 ‘지시’를 물리치고 ‘암시’를 세운 것입니다.

 

삶의 진실은 빛에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면 삶의 진실이 어둠에는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둠 또한 삶의 소중한 일부, 곧 진실의 한 면입니다. 그 어둠을 직시하지 않으면 진실은 절반 이하로 한정됩니다. 절반 이하로 한정된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이 만나 무량무수 솟아오르는 어스름의 시뮬라크르, 그 점멸하는 사건 속에 진실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밝으면 어둠이 안 보인다.”(302쪽)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떠합니까? 밝은 달은 있고, 그것을 가리키는 스승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리석어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혹 그 달이 가짜는 아니고 스승도 사이비는 아닌 것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겁내는 어둠이 실제로는 가짜 달의 그림자는 아닙니까? 그 어둠 뒤에 숨은 자가 바로 빛의 스승은 아닙니까? 그래서 죽기 살기로 감추려는 것은 아닙니까? 정녕 진실을 알고자 하면 손가락 끝을 둘러싼 허공, 그러니까 빛과 어둠이 맞물리는 특이점을 보아야 합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없습니다.” 우리가 암시받은바 모든 것을 죄다 드러내어 “일치하지 않는 데서 사용”(위 시 8의 일부)함으로써 무한한 스펙트럼의 어스름을 만들어내는 진짜 ‘소통’을 하면 됩니다. 어둠에 쫄지 마세요. 빛에 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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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라는 말은 서글프다. 그 말에는 어딘가 ‘포기’의 냄새가 난다.·······누군가를 포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뿐이다. 결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370쪽)

 

흉고심하지결전간의대시계탕(胸苦心下支結癲癎宜大柴桂湯).

 

이렇게 써놓은 글을 제대로 읽고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500명,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의 0.001% 미만일 것입니다. 이는 한의학 고전 「상한론傷寒論」에 의거한 진단과 처방을 현대적으로 응용한 것입니다. 현직 한의사 가운데서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인 까닭은 大柴桂湯대시계탕이라는 처방 이름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문장 전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전간癲癎epilepsy, 그러니까 간질병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상관없이 이 문장을 읽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반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가지고 있어요 댁들처럼 (당신)이라는 가죽주머니를 나도 가지고 있지요

 

가령 위 시는 황병승의 <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앨리스 부인의 증세>의 처음 두 문장입니다. 시 제목, 어떠십니까? 저 두 문장 어떠십니까? 흉고심하지결전간의대시계탕(胸苦心下支結癲癎宜大柴桂湯)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한의학 문장은 일반인이 최선을 다해 읽지 않아도 되므로 책으로 나올 엄두도 못 내지만, 저 시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4쇄를 찍어낸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려 일반인이 최선을 다해 읽는 대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읽는 일반인 가운데는 저도 있습니다. 제가 혹 저 한의학 문장을 담은 책을 내면 황병승 시인이 최선을 다해 읽을까요?

 

이런 비대칭은 비단 저명한 시인 황병승과 무명의 醫者 강용원만의 차이는 아닐 것입니다. 문학과 한의학의 차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가 인간에게 지니는 의미에서 이런 경사가 비롯하는 것일 테지요. 비록 ‘증후’일뿐일지라도 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하고, 심지어 처방까지 붙어 있을지라도 한의학 문장은 극소수의 사람한테만 그 뜻을 드러내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시는 ‘증후’로서 시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어떤 힘이므로 우리는 안간힘을 써서 난해의 난해를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란 아무래도 그런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발표한 ‘난해시’ <세월호-유민이의 꿈> '포기'할 자격 얻으러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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