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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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반발의 감정은 어떤 무지에 힘입어 생겨난다. 주체의 앎을 벗어나는 잉여를 품고 있는 대상만이 주체에게 매혹과 반발을 선사할 수 있다.·······다 알고 있는 자의 시선은 매혹과 반발에 휩쓸리기보다는 차라리 조롱과 공포 사이를 오간다. 대상의 치부를 알고 있어서 우습고 대상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무섭다.(461-462쪽)

 

 

치부를 들켜 우스워진 자가 비밀까지 들키면 이판사판 무슨 짓이든 저지르므로 무서워집니다. 그 자가 힘과 돈을 모두 가지고 있을 때, 공포는 극에 달할 것입니다. 극에 달한 공포는 숨 멈춘 고요를 낳습니다. 당신, 지금 이 순간 혹시 숨을 멈추고 있지 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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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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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으나 죽었다 하기 어렵고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 하기 어려운 것들 앞에서 느끼는 곤혹과 절망 앞에서 생겨나는 모순·······삶을 죽음으로 성찰하고 죽음을 삶으로 껴안는 일·······비명(非命)에 간 자들의 비명(悲鳴)을 비명(碑銘)에 기록하는 장엄한 일·······(453쪽)

 

제노사이드4.16 이후 매일 아침 제가 치르는 의식이 둘 있습니다. 먼저 영령들을 살아 있는 신으로 받아들여 제 하루 삶을 의탁하고 함께하기를 극진히 청하는 일입니다. 지향명상이랄까. 내향기도랄까. 그 다음에는 신문을 펴서 매일 한 명씩 박재동 화백의 그림과 함께 올라오는 단원의 아이 이름을 확인하고 불러주는 일입니다.

 

제게 살아 있는 신은 생사불문의 버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리데기들입니다. 바리데기들은 ‘죽었으나 죽었다 하기 어렵고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 하기 어려운’ ‘모순’된 존재, 아니 모순 그 자체입니다. 그들과 함께 느끼는 ‘곤혹과 절망’을 통해 ‘삶을 죽음으로 성찰하고 죽음을 삶으로 껴안는 일’로부터 저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 이름을 확인하고 불러주는 것은 ‘비명(非命)에 간 자들의 비명(悲鳴)을 비명(碑銘)에 기록하는 장엄한 일’임과 동시에 제 삶, 아니 이 민중의 삶에 아이들이 여전히, 영원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장엄한 일입니다. 애도의 시편이자 애정의 편지입니다. 모순을 달여 역설의 탕약을 지어내는 일입니다.

 

어떤 순간 저는 한 아이가, 또는 아이들이 제 곁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화장실 수돗물도 틀어주고, 전기 스위치도 켜주고, 심지어 인터넷에 들어가 회원정보 변경도 해줍니다. 앞으로는 더 큰 일도 함께 할 것입니다. 아, 물론 웃을 일 결코 아닙니다. 정색하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극진한 한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하나하나 아프디아프지만 두 아이를 떠올립니다. 한의사가 꿈이었던 해화. 찰나마다 깨어 있어 해화와 대화함으로써 곡진하게 아픈 사람의 마음 어루만지는 길을 함께 갈 것입니다. 평범한 남편, 아빠가 꿈이었던 건우. 평범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 위해 인문운동을 건우와 함께 할 것입니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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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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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모든 욕망은 A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A 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A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말하지 않았던가.(419쪽) 비밀이 없는 시는 단 한 번 읽히고 버려진다. 투명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420쪽) “시는 감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드러내야 하며,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잘 감추어야 한다.”(431쪽)

 

문제는 A 이상의 어떤 것, 그러니까 비밀, 그러니까 감추고 있는 무엇, 그러니까 ‘영혼’(369쪽)입니다. 현실에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는 거의 없’(369쪽)는데 모두 그것을 욕망하므로 결국 인간의 문제는 죄다 여기에 있습니다. 감추고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간 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인간 이상의 영혼, 그 비밀에 대한 동경과 갈망, 아니 소유욕 때문에 인간은 서로 속이고, 상처주고, 죽이는 짓을 수만 년 동안 집요하게 되풀이해왔던 것입니다.

 

영혼, 그것은 영성의 거처입니다. 영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가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감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드러내·······며,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잘 감추어야’ 기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상처를 지니는 사람만이 영성을 가집니다. 영성에 깃들 수 있는 사람 또한 그 상처의 틈에 찰나적으로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상처와 공현共絃을 일으킬 때 그 영성의 이름은 드넓음spaciousness입니다. 편재遍在ubiquity입니다. 신입니다.

 

상처를 외면한 욕망으로 영혼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신을 부리는 통속종교가 영성 없는 가짜 구원을 가지고 속임수 장사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은 도리어 속이고, 상처주고, 죽이는 짓을 일삼는 권력과 자본의 후견인 노릇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영혼을 권력과 자본에 팔아먹을 때, 가장 잘 써먹는 상술은 다름 아닌 무지無知. 무지로 스스로 무장하고 그 무지로 타인을 감염시키는 무지무쌍의 마케팅입니다.

 

 

생때같은 자식들이 왜 죽어가야 했는지 밝혀달라며 곡기를 끊은 단원고 부모와 그 슬픔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 앞에서 폭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대학생이나 아줌마도 소름끼치지만 ‘종북세력 북한 가라’며 찬송가 부르고 고래고래 외치는 개신교도들을 보니 대체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까지 처절히 무지할 수 있을까, 아뜩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들이 살아 있는 사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들 안에 저들 이상의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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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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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의 오(誤)작동을 수락하는 이의 평정(416쪽)-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다. 헤어짐을 ‘짓는’ 일이다.(411-412쪽)

 

철학자 김영민의 어법으로 바꿉니다.

 

“이별은 ‘어긋나는’ 것이고 작별은 ‘어긋내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사과하라.’ 육십갑자 가까이 살면서 이렇게 당황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만큼 젊은이의 요구는 느닷없고 거침없었습니다. 꽤나 긴 기간 동안 뒤졌지만 저는 제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젊은이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게도 그 젊은이에게도 잘못은 없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듯 두 사람 사이가 어긋나거나 오작동 될 때, 어느 한 사람에게 반드시 잘못이 있거나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잘못하지 않아도 오작동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아예 그것이 오작동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작동이라고 생각하고 잘라내는 순간 진짜 오작동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설혹 오작동이라 하더라도 ‘수락’하면 오작동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 ‘평정’이 깃듭니다.

 

A도 진실이고 non A도 진실인 경우를 서양철학에서는 이율배반이라고 합니다. 형식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그래서 칸트도 풀지 못한 난제입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일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수없이 이런 상황과 마주칩니다. 우리 또한 대부분 못 풀고 넘어갑니다. 모순이 공존하는 역설, 그 대칭성의 진실에 낯을 가리도록 교육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 아래 극단적 승패 문제로 처리하도록 강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가 된 게 아니라 거꾸로 승자가 정의를 전유하고 그 전리품을 독식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권력, 자본, 종교를 거머쥔 승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빨갱이, 종북, 미개인, 시체장사, 근본 없는 종자로 몰아 죽이고 있는 현실을 고통 속에서 ‘겪는’ 우리가 아닙니까.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요. 정의를 당연한 존재로 놓고 사악을 그것의 부재로 이해하는 관념적 오류 때문입니다. 인간에 관한 한, 사악함이야말로 당연한 존재입니다. 정의는 애써 ‘짓지’ 않으면 존재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요청이며 소망입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애써 정의를 ‘인정, 선택, 결단’으로 지어야 할까요. 권력, 자본, 종교를 거머쥔 승자가 과연 애써 정의를 지을까요.

 

버림받은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 매 맞은 사람들은 애써 정의를 지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저 사악한 권력, 자본, 종교 집단을 응징하려는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 추상같이 벌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처벌은 멸절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저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벌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버리고 빼앗고 때린 사람들이 먼저 깨달은 진실을 나중에라도 깨닫게 하려 함입니다.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생에는 오작동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수락하여 평정에 이르는 저 대동大同의 길로 가야 한다는 진실 말입니다. 벌까지 받아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자, 제 무덤을 파는 것일 테지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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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창안하는·······삶은 존재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아니라) 힘을 갖는가,·······과연 윤리적으로 (선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인가. 말하자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촉발(affection)의 텍스트는 몸을 자극하고 삶의 좌표를 흔든다.(403쪽)

 

당신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을 때, 그 ‘의미’의 지평은 과거, 그러니까 기존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선한가, 물을 때, 그 ‘선’의 지평 또한 과거, 그러니까 기존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묻기 위해 창안된 텍스트라면 그것을 구태여 문학이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국민윤리’ 교과서만으로 충분하기에 말입니다.

 

삶의 힘에 대한 물음은 ‘의미’를 허물어뜨리는 에너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아니 의미 이전의 생명력, 그 진동수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삶의 좌표를 흔듭니다. 촉발입니다. 삶의 좋음에 대한 물음은 ‘선’을 허물어뜨리는 도발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아니 선 이전의 생명감각, 그 쾌감을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몸을 자극합니다. 촉발입니다.

 

촉발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문학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텍스트를 향해 공감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연 짓는 모습은 각기 다릅니다. 물론 임상의臨床醫인 제 처지로 보면 이 경계는 루비콘 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촉발은 치료의 영지에서 불어오는 향기를 맡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임상의는 시인이 아니지만 시의 미학을 체현해야 합니다. 임상의는 비평가가 아니지만 비평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마음병 앓는 이와 함께 증상을 옹골차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드러냄을 결곡하고 넉넉하게 만져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촉발이야말로 분수령입니다. 치료는 결국 자극하고 흔들어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담 또는 대화로 우울증을 치료해오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이른바 항우울제 따위의 약물로 뇌만 조절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울증을 앓으면 기분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인간다움의 근본 조건인 생명력과 생명감각도 손상됩니다. 자극하고 흔들어 삶의 전반을 바꾸는 인문치료가 필수적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노사이드4.16 이후 유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침륜되어 사회가 거대한 우울증 병동으로 변해갑니다. 여태까지 진행되어온 개별적·부분적 치료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혜신 선생을 중심으로 펼치는 치료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 인문치료, 사회치료, 정치치료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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