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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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외면하지 않지만 그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564쪽)

 

상처를 외면하고 쓰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그 시 아닌 시를 읽고 치유로 나아간다 말하는 경우 또한 치유가 아닙니다.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 쓰는 시는 어떠할까요? 더 깊은 시로서 더 깊은 치유의 지도地圖가 될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더 아파하고 더 절망한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덜 아프고 덜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말을 조금 바꾸어보겠습니다. 그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로 파고든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별 것 아닌 상처 때문에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의 진실은 객관적 사실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 둘 잃은 상처는 하나 잃은 상처의 두 배입니까. 둘 잃은 부모에게는 아이가 더 있고 하나 잃은 부모에게는 그 아이가 외동아이였다면 어떤가요. 상처의 더 깊은 곳, 더 깊은 상처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시가 되어 나올 상처라면 상처의 깊고 얕음은 따질 일 아닙니다. 그 상처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옴팡진 진실입니다. 설혹 더 깊은 상처가 더 깊은 깨달음 주어 위대한 삶으로 인도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누구에게 그 길을 권할 안목과 자격이 있을까요.

 

인간의 인간다움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깊은 곳은 당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붓다와 예수의 삶은 깊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지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도 팔 벌려 유민이네를 껴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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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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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미지가 최초로 발화(發火)하는 순간 그것은 독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낯선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이미지들은 낯선 가운데 그 안에 상처를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그 상처가 독자의 상처를 건드려 점화되는 순간 그 이미지는 폭발한다. 폭발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낯선 것이었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뼈아프게 낯익은 어떤 것으로 변한다.·······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이다.(563쪽)

 

번역1-시적 이미지의 점點적 찌르기는 시인의 punctum에서 비롯합니다. punctum은 마치 미분방정식의 특이점 같은 것이므로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낯선 것일수록 서정적입니다. 서정적일수록 선연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상처는 인간의 보편적 숙명입니다. 상처라는 숙명의 보편성이 studium으로서 독자한테 면面적 접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접속하는 찰나 가장 아픈 한 점을 찌르고 들어갑니다. 독자의 봉인된 상처에 구멍, 그러니까 punctum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뼈아픈 낯익음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번역2-시적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낯설다는 것은 난해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고-인용자)·······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367쪽)입니다. 결국 낯설음의 요체는 광활함과 경이로움입니다. 무의식 속에 접어 넣었던 상처를 펴서 드넓게 하고 그래서 새로이 펼쳐지는 진실 때문에 낯선 것입니다. 이미지가 낯설면 낯설수록 상처를 도저하게 드러내므로 아프면 아플수록 상처는 높은 진동수로 공명합니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역해-내가 아플 때 두 가지 생각 속에 갇힙니다. 세상에서 내 아픔 같은 아픔이 다시 있으랴. 내 아픔을 아는 이 그 누구랴. 남이 아프다 할 때 두 가지 생각 속에 갇힙니다. 다들 그러고 사니까 징징댈 필요 없다. 네 아픔 내가 다 이해한다. 협소함과 진부함 때문에 자기 아픔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 밖으로 나가서 맑은 마음으로 보면 적어도 나만큼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아니 나보다 더 아파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사람도 보입니다. 지금 광화문에 청운동에 안산에 팽목항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낯설기만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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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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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하다’와 ‘고통 받다’는 다르다. 전자는 윤리적 능력이고 후자는 감각적 자질이다.(562쪽)

 

이 땅의 역사에서 한창 실천을 화두 삼을 때 유행하던 서구 어법 가운데 doing philosophy나 doing theology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강단에 서서 떠들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의 무력함을 넘어서려는 사회적 각성이 빚어낸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으로 인간에게 영속하는 화두가 아닐까 합니다.

 

고통하다’를 그런 동명사적인 어법으로 바꾸면 doing pain이 될 것입니다. 한 사회의 본질은 가장 아픈, 그러니까 어두운 곳입니다. 2014. 4. 16 이후 우리사회의 본질은 단연코 세월호 학살의 아픔이 서리고 흐르는 곳입니다. 이 아픔을 자기 삶과 일치시키는 윤리적 능력이 갖추어질 때만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입니다.

 

 

고통 받다’는 그 아픔을 느끼고 감응하는 생명적 각성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윤리적 능력에 감각적 자질이 연대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또 하나의 질곡일 것입니다. 아픔을 삶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아픔을 생생히 느껴야 아픔이 건네는 내밀한 진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 소통이 없는 아픔은 고행 또는 학대일 따름입니다.

 

아픔은 인간 생명의 숙명입니다. 아픔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가치의 바다, 의미의 땅이 있습니다. 거기 이르기 위해 인간의 지성·의지적 깨달음과 감성적 느낌이 둘이면서도 쪼개지지 않고, 하나이면서도 포개지지 않는 경계사건의 맥락을 만들어야 전인적 실천의 길을 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어느 때보다 간절히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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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엔 무언가 훼손된 것이 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이곳엔 무언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말해질 수 없는 것 그 자체이다’(551쪽)

 

현대의학과 약학의 가장 치명적인 함정은 증상을 병이라고 전제하고 그 증상을 없애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불편한 증상, 특히 통증은 더 많은 경우에서 병이 아니고 자연치료반응입니다. 그것을 없애는 게 치료가 아니라 그런 반응을 일으키게 한 기전이나 과정을 추적해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치료입니다. 쉬운 예로 월경전증후군은 질병반응이고 월경통은 자연치료반응입니다. 이 사실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월경통 잡는 일에만 매달립니다. 월경전증후군이란 말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월경통 잡는 일이라 해봐야 진통제가 전부입니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진짜 병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병이 더 깊어져야 돈이 되므로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학과 약학은 병을 키우는 시스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 구축해온 의학과 약학이란 이름의 수탈과 살해의 체계입니다.

 

이런 이치를 왜 몰랐을까요? 인간의 지성은 위대한 그 만큼 사소하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가깝고 구체적인 운명은 아픔, 그러니까 통증입니다. 통증은 힘들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이런 감정은 이치에 대한 사유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기 마련입니다. 결과는 아픔을 괴로움과 가차 없이 연결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고통苦痛입니다. 모든 아픔이 다 괴롭지는 않습니다. 괴로움은 이를테면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고통”, 이래버리면 둘은 단단한 하나가 됩니다. 통증 제거가 지상의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통증이 인간생명을 원상으로 복귀시키는 곡진한 노력의 증거임은 진실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통증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아픔을 통해 나온다는 숙명적 진실에 더 이상 주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편향 속에서 우리가 잊어가는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병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병들지 않은 삶을 보여준다.”(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188쪽)

 

 

병은 통증과 같은 불편한 자연치료반응을 통해 인간생명의 끊임없는 복원력, 그러니까 병들지 않은 삶의 힘을 발휘합니다. 이 진실 알아차리는 것을 조건으로 진단과 치료의 의학이 형성됩니다. 알아차림은 ‘이곳엔 무언가 훼손된 것이 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윤리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훼손되어 아픈 무엇은 서둘러 없애야 할 대상으로서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이 바로 주체로서 나라는 진실을 굳세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곳엔 무언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말해질 수 없는 것 그 자체이다’라고 ‘시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훼손되어 아픈 그 무엇은 당최 가 닿을 수 없는 것이어서 ‘공백(침묵)’일수밖에 없다는 서정적 겸손, 그러니까 하찮음의 인정에 올곧게 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문적 요소가 흠결된 의학은 결국 다국적 제약회사의 주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 의학적 함의를 놓친 인문학은 계몽적 서정으로 무장하고 사이비 치료를 대놓고, 또는 암암리에 자행해왔습니다.

 

제노사이드4.16 이후 이 땅에서 무엇이 훼손되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함부로) 말해질 수 없는 무엇인지, 윤리가, 시가, 결곡하고 곡진하게 알아차려야만 할 것입니다. 거기 터하여 의학이, 참 의학을 정립해만 할 것입니다.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윤리학, 시학, 의학을 창안해내야만 할 것입니다. 아픔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픔이 왜, 어떻게 왔는지를 정확하게 밝혀야만 우리사회 고질병이 드러납니다. 그 병을 고치면 아픔은 절로 사라집니다. ‘대통령은 국가’라고 게거품을 무는 자들의 조아림에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의 불안이 가득 차 있습니다. 경제를 들먹이면서 ‘세월호 피로감’을 떠드는 자들의 논리에는 돈에 대한 탐욕이 가득 차 있습니다. ‘종북세력’이라 떠들면서 십자가 휘두르는 자들의 찬송가에는 천국진리에 대한 무지가 가득 차 있습니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겪으면서 훼손과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바로 그 시공간에서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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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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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민자들(the colonized)의 환경은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축소시킬 수 있다. 거기서 추구되는 해결책은 개인적인 차원이나 제한된 가족적 차원의 해결책으로 그치게 된다. 그 결과 집단의 차원에서는 극단적인 무정부 상태나 무질서가 생겨난다. 그 무정부 상태의 희생자는 언제나 개인이다.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그러한 시스템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 즉 식민통치자들(the colonizers)인데, 그들은 피식민자들이 삶의 영역을 축소당하는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의 영역을 확대한다.(477쪽-로베르 졸렝의 글을 재삼 인용함.)

 

 

마치 우리의 현재 상황을 직접 보고 쓴 듯합니다. 소름이 확 끼쳐오는 글입니다. 더욱 더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식민통치자들이 제국주의 본국인들이 아니라 백여 년 전 나라를 팔아먹고 제국에 부역한 자들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피식민자들이 스톡홀름증후군에 빠져들어 그 식민통치자들을 부양자, 심지어 수호자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비겁해지거나 속수무책 공포에 얼어붙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차원이나 제한된 가족적 차원’에 머무르면 모두 죽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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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1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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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9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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