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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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런 책이 나와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이런 책을 내준 「문학동네」가 고맙다. 고마워서 낙망하는 심정의 실재를 해량할 테니 이에 관해 길게 주절대지 않겠다.

 

1. 이 책의 이름이 「눈먼 자들의 국가」인 게 다행이다. 불행이다.

 

2. 「문학동네」특집도 어깨를 추어올리고 얼굴을 묻어가며 읽었고 「눈먼 자들의 국가」에 실린 다른 글들도 안경을 벗고 마른 침을 삼켜가며 읽었다. 읽어 나아가면서 어깨는 내려왔고 얼굴은 들어 올려졌다. 안경은 다시 눈앞에 자리 잡았고 침은 더 이상 마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읽는다. 또 다시 읽는다. 지금도 읽기를 반복하면서 이 글을 더듬더듬 쓴다. 왜 이러나. 여러 번 읽는다고 해서 그 곡절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부 작은 내용을 빼고는 모든 글들이 한 방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방향은 이미 기울어진 길을 따라 “안 돼! 안 돼!” 하면서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는 바로 그런 방향이다. 그러니까 여기 정치의 이름으로 자행된 제노사이드 앞에서 묘비명 이야기를 최선 다해 하자, 뭐 그런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3. 물론 「문학동네」가 합의한 사회정치적 견해가 느슨하게나마 있을 것이다. 거기에 터하여 원고 청탁을 했을 테다. 물론 「문학동네」동네 인사들이 저마다 지닌 상처의 상황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터하여 원고 청탁을 받아들였을 테다. 모든 정황을 감안하고서도 의아해마지 않는 것은 왜 열두 편의 글들이 일제히 어떤 지점에서 멈추어 서느냐, 하는 점이다. 정치집단의 공식 입장도 아니고, 제도언론의 보도·논평도 아니건만, 날카롭든 날렵하든 엄중하든 둔중하든 진실의 불투명성 속으로 단도직입하는 섬뜩한 미학적 윤리적 기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두어 사람의 글, 두어 부분에서 톡 쏘는 맛을 낼 뿐. 심지어 어떤 글들은 마지막에 너무나 당연한 몇 마디 하기 위해 장황한 서구 레퍼런스를 방패막이 삼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글들은 동어반복으로 일관한다. ‘공공公共의 상상력’이 이렇게까지 결딴난 사회인가. 참담하다.

 

4. 처음에는 열두 편의 글 하나하나 정성스레 덧손질 해 볼 요량이었다. 그만둔다. 무명의 변방 의자醫者로서 두어 마디만 말하려 한다.

 

열두 편의 글을 관류하는 개념 둘은 무능과 부재다. 이는 사고가 사건으로 전화되었다는 대전제 아래 형성된 개념이다. 만일 처음부터 사건이었다면 무능은 전능이며, 부재는 편재다. ‘공공公共의 상상력’은 이 쟁점을 유언비어로 유기해서는 안 된다.

 

사적 소회는 치지도외하고라도 공적 분석을 가한 사람들에게서조차 역사의 문제를 곡진·결곡하게 거론한 경우가 거의 없다. 공시적synchronic 프레임만큼, 아니 보다 더, 잔혹하며 집요한 악의 에너지는 통시적diachronic 내러티브에서 나온다.

 

0. 우리는 모두 명확하고도 모호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 모순된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고 어떻게 극복할지 묻는 질문은 대체 무슨 질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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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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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실패에 대해서 무엇을 아느냐,·······맞다. 피 끓는 증오도 애타는 동경도 없는 삶이다. 그런 삶에 그 무슨 성공과 실패가 있겠는가. 나는 인간을 모른다.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나의 문학은 너무 편안하다.(720쪽)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을 세계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해는 오해의 일종이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이성복이 한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뒤집습니다.

 

“우리의 안도安堵는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 가운데 세계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해는 이해의 일종이다.”

 

모든 생각이 틀리고(皆非) 모든 생각이 맞습니다(皆是). ‘틀렸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열면 맞는 것이고, ‘맞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닫으면 틀린 것입니다. ‘모른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열면 아는 것이고, ‘안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닫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인간을 다 알겠습니까. 어느 누가 인간을 다 모르겠습니까. 모순이 공존하는 이 진실은 인연의 결 다름에 있습니다. 내가 내 인연에 곡진하게 마음을 포개면 다만 나를 알 뿐입니다. 남의 인연은 원천적으로 접속 불가능합니다. 접속 불가능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로, 미상불 그저 귀 기울이기로 할 때 전체 진실을 향해 가는 끝없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700쪽 훨씬 넘는 방대한 ‘말하기’인 「몰락의 에티카」 마지막 글의 부제가 김소진에 대해 ‘말하지 않기’입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김소진을 기린다고 말합니다. 실패를, 좀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편안한 문학의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실패로서 인간은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같은 존재(718쪽)이며,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열리든 간에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할 군상”(718쪽)입니다. 이런 존재에 대한 무지를 안은 채 어찌 이런 존재에 대한 옹호로서 문학을 말하는 문학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는 자기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몰락의 에티카」는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를 ‘밥풀떼기’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명명에는 점 하나의 무지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밥풀‘때’기라고 해야 할 것을 밥풀‘떼’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무지는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를 (비록 낮잡아 부르기는 것이기는 해도) 위관계급 장교로 명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정확히 여기에 가 닿습니다.

 

관념적 조작은 무구한 ‘있음’들 앞에서 언제나 무력한 것이다.(718쪽)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락의 에티카」가 하는 반성과 유보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기로 하고 읽는 김소진은 그러면 무엇일까요? 7년 뒤인 2014년 「몰락의 에티카」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한정되어 있으니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제한되어 있다. 그때·······이야기가 아니면 그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 없다.·······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눈먼 자들의 국가」230쪽)

 

김소진을 읽으면 실패로서 인간이 지니는 슬픔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 공부야말로 “한낱 비평의 수사학에 불과한”(720쪽) 말로 실패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편안’하게 말하지 않는 길을 여는 수행일 것입니다. 김소진은 실패를 실패 아니게 하는 ‘선택’, 그 당위의 세계를 열어젖힘으로써 ‘매료’에 담긴 ‘편안’을 들추어내어 염치를 자극합니다. 이제 「몰락의 에티카」초심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5쪽)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 같은 존재,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열리든 간에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할 군상을 옹호하는 문학을 통해 김소진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뀝니다. 그리고 질문하게 합니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매료된 자는 이 흔들림과 질문에 감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감응하면 편안 그 너머로 가야 합니다. 문학도 바뀌고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지금-여기로 돌아옵니다. 「몰락의 에티카」의 말하지 않기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이 말하기로 도약해야 합니다.

 

 

요컨대 진실에 대해서는 응답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눈먼 자들의 국가」230쪽)

 

2014년 4월 16일은 「몰락의 에티카」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사흘 뒤 빈 무덤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몰락의 에티카」에 대한 처음의 신뢰를 지키고 싶습니다. 더불어 그렇게 신뢰하는 제 자신과 제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도 지키고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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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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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5: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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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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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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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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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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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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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기실 욕망의 긍정이란 싸우는 자의 윤리가 아닌가.(708쪽)

 

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질문이 옹골차게 성립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뜨겁게 불타야 합니다. 자기 삶이 활활 불타는 것이 아니면 타인에게 뜨거움이 되기는커녕 자기 자신에게조차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것이 되고 맙니다.

 

오래 전 애제자 한 녀석이 술좌석에서 정색하고 제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의 삶에 냉소적인 분이십니다.”

 

방향이 슬쩍 빗나간 베기였지만 입은 자상刺傷은 매우 깊었습니다. 저는 그 뒤 줄곧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너는 너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 때마다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너는 네 인생의 장작개비이기보다는 남의 인생의 부지깽이였다.”

 

 

제 자신의 삶에 극진히 임하지 못하고 남의 삶을 기웃거리는 알량한 오지랖으로 60년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회한이 엄습해올 때마다 가슴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 연기의 뿌리 부분에 입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신의 삶에 극진한 마음, 글쎄 명상이라면 명상이고 기도라면 기도인 것을 가만가만 올려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알 수 없는 한 순간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를 빌면서 후욱후욱 조심스레 불어넣는 것입니다. 성직의 길을 버린 지 실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진정으로 광활함the Spaciousness에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느린, 늘인 삶입니다. 새로운 이 시작은 전과 전혀 다른 시작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다시 새로운 뜨거움을 일으켜 남은 생을 가차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가차 없는 삶은 필경 싸움이 될 터입니다. 이 싸움은 치료를 포함하면서 치료를 넘어선 인문운동, 아니 “인문전쟁”이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의 인연에서 만나는 욕망의 실재를 인정한 터 위에 타자의 욕망과 마주하며 어떻게 해야 건강한, 그러니까 건전하지 않은 싸움을 싸울 수 있는지 찰나마다 곡진·결곡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이것이 싸우는 자의 윤리이며 스피노자가 찬미한 것이라면 그 또한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근본적으로 삶을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태아기부터 청소년기 까지 일방적으로 부모의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공격력은커녕 수비력조차 갖출 겨를이 없었습니다. 노다지 당하는 것이 단 하나의 생존전략이었습니다. 십대 끄트머리에 홀연히 찾아든 대칭성의 사유 틀 덕분에 성인기의 삶은 어느 정도 관통과 흡수의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생애 초기에 입은 트라우마 때문에 관통보다는 흡수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거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스한 시선으로 지키면서 열정을 다해 달리는 데 서투릅니다. 정당한 분노를 유지하면서 전략적으로 싸움을 이끌어가는 힘이 약합니다.

 

제 삶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제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진실 말입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공격과 수탈을 자행하는 거대하게 기울어진 싸움판이 바로 우리사회입니다. 매판행위로 돈과 힘을 거머쥔 자들이 삿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도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찾고 의로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저들에 맞서는 싸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진실하고 의로운 욕망에서 나옵니다. 욕망이 어떻게 진실하고 의로울 수 있을까요? 슬픔이라는 수동적 정념passio을 자비慈라는 능동적 정서affectus로 전화해냄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이 싸움은 기쁨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슬픔을 담금질하는 힘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생떼 같은 새끼를 잃은 슬픔에 감응하는 힘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싸워서 우울증에 빠져들지 않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바야흐로 남의 인생 불 뒤적거리는 부지깽이 너머 장작개비로서 제 인생을 훨훨 태울 때가 왔습니다. 제 주위로 의로움의 열기와 진실함의 온기를 번지게 하는, 사람다움의 밝은 기운을 퍼지게 하는 삶을 시작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여기는 겨울 사막이 막 끝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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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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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 ‘기쁨’이라면,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 ‘슬픔’이다.(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142쪽.)·······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지배당하여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어떤 정념에 수동적으로 빠져들 때, 그 정념은 모두 슬픔이다. 슬퍼하는 자는 모두 노예다. 그래서 ‘명랑해져라’는·······정언명령이다. 슬픔이라는 정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상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694쪽)

 

첫 문장으로 인용된 내용이 기쁨과 슬픔에 대한 스피노자 해석의 진면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몰락의 에티카」진술이 스피노자의 견해를 온전히 수용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163-178에 있는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내용을 보면 한정 수용이라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이 또한 그냥 여기 있는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스피노자를 둘러싼 시공의 STUDIUM을 담고 스피노자 자신의 PUNCTUM을 품은 것입니다. 오늘 서구 사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는 지젝의 발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럴, 그래야 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해석은 서구세계가 장구한 세월 유지해온 빛과 어둠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신성의 빛을 향해 확산되어 가는 것이고,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죽음을 향해 어둠 속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둠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슬픔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A와 non A가 대칭되어 있을 때, 하나가 진리이면 맞은편은 반드시 비-진리이어야 하는 형식논리학의 일극집중구조입니다. 둘 다 진리인 경우는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해서는 안 되고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상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묻겠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과연 노예일까요? 기뻐하는, 그러니까 명랑한 자는 자유인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 그 자체는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기준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갈 때 슬퍼하는 게 왜 노예일까요?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갈 때 명랑해야 자유인이란 말인가요? 이 질문이 당연한 진실을 겨냥한 것이지만 어쩐지 억지스러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너무 맞는 말이기는 한데 설마 스피노자나 「몰락의 에티카」가 그런 정도도 모르고 말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럴까요, 과연?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문제는 슬퍼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고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슬픔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함은 물론 일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오늘날 우리는 우울증이라고 표현합니다. 우울증은 더 작은 완전성, 그러니까 소멸, 그러니까 죽음으로 이행하는 수동, 그러니까 노예, 맞습니다.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본격적인 질문이 둘 생겨납니다.

 

첫째,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면 고착된 슬픔(우울증)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은 압니다. ‘힘내라’는 말이 격려가 아니고 ‘염장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물며 ‘명랑해져라’는 명령이야 어떻겠습니까. 힘낼 수 없는, 명랑해질 수 없는 조건 아래서 우울증에 빠져버린 사람에게 그것들을 주문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됩니다. 명랑해지는 것이 일종의 정신력 문제라면 정신력 강한 사람은 처음부터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정신력 약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력 약한 사람에게 정신력 강해져라 명령하는 것은 ‘돈 있으면 빵 사먹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이 명랑해지기를 바란다면 명랑해지라고 명령하기 전에 명랑해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어야만 합니다. 그 조건이 바로 지금 그가 빠져 있는 명랑하지 못한, 그러니까 우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명랑이라는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울증이라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이것을 건너뛴 명랑은 실제로 또 하나의 증상, 그러니까 가면일 따름입니다. 가면을 참 얼굴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 고착된 슬픔(우울증)에서 헤어나 기쁨을 늘 유지하면 자유인이 되는가?

 

고착된 슬픔을 우울증이라 한다는 사실 쯤 누구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면 고착된 기쁨은 무엇이라 할까요? 우선 이 질문 자체가 거북하실 것입니다. 늘 기쁘면 행복하지 뭘 그것을 가지고 고착이라 하는가? 바로 여기가 함정입니다. 빛과 어둠을 선악 구도에서 보고 악은 없애야 하고 선만 남겨야 한다는 함정 말입니다. 선만 남겨졌을 때 그것을 과연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선이란 악을 전제하고서야 성립하는 개념 아니던가요. 이런 이치를 따라 보자면 고착된 기쁨은 더 이상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할까요? 슬픔이 고착되어 허구한 날 울고 앉아 있는 것을 (우)울증이라 하니 기쁨이 고착되어 허구한 날 웃고 돌아다니는 것은 조증이라 해야겠지만 조증만 나타나는 경우를 따로 조증이라 하지 않고 현대의학에서는 정신분열증, 최근에 바꾼 이름으로는 ‘조현병’이라고 합니다. 순 우리말로 하면 아마 ‘미쳤다’가 가장 근사한 표현일 것입니다. 미친 사람을 자유인이라 하나요?

 

고착된 슬픔의 대안은 고착된 기쁨이 아닙니다.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착된 슬픔이 사람과 삶에 해가 되는 것과 똑같이, 아니 훨씬 더, 고착된 기쁨도 해가 됩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우울증은 인격적인 차원으로까지 침륜되었어도 장애 수준이므로 정신분열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착의 양극단은 모두 취할 바 아닙니다. 답은 중도입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중도는 중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양극단을 떠나 서로 마주한 경계에서 일어나는 관통-흡수 운동입니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일리一理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을 서로 관통하고 흡수해서 삶의 전체 진리를 형성해가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고착된 기쁨은 열반으로 담금질 되고 고착된 슬픔은 자비慈로 담금질 됩니다. 열반은 자리自利로, 자비는 이타利他로 나아갑니다. 기쁨과 슬픔은 서로 밀고 당기며 함께 사람과 삶의 진실을 열어갑니다.

 

기쁨으로 상처를 다스리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기쁨만으로는 상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상처는 다스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상처는 감응의 대상입니다. 상처 없는 영혼은 영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일극집중구조인 기독교와 형식논리학에서 시작한 서구문명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면서 오늘날 이기적 개인, 그러니까 영혼 없는 성공기계만을 양산하여 인류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가는 과정에는 긍정주의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긍정주의가 바로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의 충실한 개입니다. 이 개의 목줄을 따라가 보면 어디쯤엔가 스피노자의 굳센 손이 있습니다. 그런 스피노자라면 저는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4월 16일 이후 우리 곁에 슬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그들에게 ‘명랑해져라’ 해야 할까요. 대체 그들이 어찌 명랑하면 되겠습니까. 그 명랑이 어떻게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명랑의 명령은 슬픔의 진실을 덮기 위한 음모이며 공작이 아닐까요. 명랑의 투명함 대신 슬픔의 결들이 겹쳐 있는 불투명함을 끈덕지게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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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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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결핍인 것들은 타자에 의존해야만 기만적인 자기 확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타자를 ‘제물’로 삼거나 ‘장식물’로 걸치려 한다.(685-686쪽)

 

이 두 문장은 전후 문맥을 전혀 전제하지 않고 읽어도 어디를 향한 글인지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 수 있는 STUDIUM을 지닙니다. 그런가 하면, 뒤 문장 생략 부분에 ‘~이라는’ 구체적 단어만 집어넣으면 어떤 PUNCTUM과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보편타당하되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각별하게 돋을새김되는 진실을 잘 맞물려 놓은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제 경우 대뜸 떠오르는 것은 끊임없이 제물 또는 장식물을 찾아 헤매는 환우들 모습입니다. 오직 자신의 결핍에만 집착할 뿐 타자와 정서적 상호교류를 거절한 채 떠돌고 있는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실과 이치를 외면하고 자신이 느끼는 호감 여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여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아서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아주 기민하게 사유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우리사회와 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특별한 알레고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속에서 ‘결핍인 것들’이 준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결핍인 것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제물로 삼았는지, 장식물로 걸쳤는지 신물 나게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역사적, 그러니까 정치적 시공에서 결핍인 것들은 아픈 개인과 달리 윤리적·법적 정당성이 결핍된 것들입니다. 그 결핍을 덮으려고 제물을 만들어냅니다. 방법은 매카시즘과 ‘사고’입니다. 그 결핍을 감추려고 장식물을 만들어냅니다. 방법은 신비와 연민입니다. 전지전능함으로 제물은 제거하고 장식물은 장려합니다. 당연히 백전백승입니다.

 

 

백전백승으로 자기기만은 목하 구약성서 급 내러티브를 쓰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양 99마리 가진 1%의 사유가 되고 손해는 양 1마리 가진 99%의 공유가 되는 기적이 더욱 기괴하고 섬뜩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의 종말이 뭘까, 자기기만은 생각 않기로 머리를 비웠습니다. 그 생각하는 순간, 기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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