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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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가까이에, 우리 주위에 있어요. 그리고 폭력이 낳은 폭력도 있습니다.·······폭력 사이에는 숨어 있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미디어를 통해·······폭력을 보급합니다. 폭력을 확대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거죠.(256쪽)

 

변호사인 한 친구와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보수적 정치 경향을 지닌 그의 입에서 법에 대한 정의가 나왔습니다.

 

“자네는 법학도에서 멈춘 다음 성직자와 의료인의 삶을 살아왔으니 여전히 법에 대해 이상적인 생각을 유지하고 있을 걸세. 현실 법조인인 내 견지에서 보면 법이란 다만 기득권 집단의 곳간을 더 채우는 일에 봉사하는 장치일 뿐이야.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보장도 결국은 혁명을 막기 위한 전략의 산물이지.”

 

그의 말은 의외인 측면도 있고 당연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의 솔직함이 이 대칭성을 가로지르게 해줍니다. 우리사회의 실상을 감안할 때 부득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입니다. 행정부 소속인 검찰은 차치하고 사법부인 지방법원부터 헌법재판소까지 최근 나오는 판결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 있습니다. 거대 로펌으로 상징되는 변호사 집단 또한 법의 이러한 정의를 뒷받침해줍니다.

 

이런 사회 상황을 설명할 핵심 개념이 권력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권력은 정치를 통해 형성되고 정치는 법을 통해 정당화됩니다. 결국 권력은 법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폭력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아(생산) 양육(보급)하는 확대재생산의 메커니즘 그 자체가 바로 권력인 것입니다.

 

폭력으로서 권력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폭력으로서 권력이 세월호를 만들었습니다. 이 권력과 저 권력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탐욕. 그 보편적 탐욕. 제약 불가능의 탐욕. 권력의 탐욕을 지탱해주는 힘은 다시 폭력을 당하는 자들의 알량한 탐욕, 그러니까 권력이 떨어뜨려주는 추악한 미끼에서 나옵니다. 그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는 곡절은 공포와 무지에 있습니다. 권력은 미디어를 통해 공포를 증폭시키고 지식을 통제합니다. 우리는 205일 째 이 미디어를 통해 세월호에 대한 공포와 무지를 원 없이 공급받고 있습니다.

 

겨울은 가차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 차가운 팽목 바다 어찌 하려고 우리가 이렇게 맥없이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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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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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대가 지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의 시대를 포함해서요. 해가 감에 따라 제게는 이 기억들이 이해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표류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어요.” 레비는 종종 학교에서 젊은이들과 만남을 갖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감정적인 참여가 있어요. 격렬하지만, 역사적인 동참은 아니에요.·······(255쪽)

 

이성복이 말합니다.

 

“구원이 온다면 망각과 함께 오리라.”(「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192쪽)

 

그러니 구원 받기 위해 잊자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억함으로 죽임 당할지언정 그런 구원이라면 거절한다는 기상을 담았을 터.

 

프리모 레비가 정곡을 찔러옵니다.

 

표류.

 

기억이 진실을 붙잡고 있는 한 그것은 표류, 그러니까 떠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시대는 지나갈 지라도 진실의 기억은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 당위를 무심코 밀어내면서 기억이 지나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프리모 레비가 의표를 찌릅니다.

 

감정적 참여.

 

대체 감정적 참여가 어쨌기에? 이 또한 프리모 레비로 돌아가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동참은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감정과 역사를 대칭으로 구성하여 이해한다면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 다시 그 내면에서 스러진다는, 그러니까 흘러가버린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역사는 흐른다.’ 뭐 이런 역사가 아니라, 진실을 길이 담아두는 실재로서 역사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배 밖으로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자기가 검을 떨어뜨린 곳, 그러니까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다음에 거기서 찾으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자신이 탄 배가 계속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이야기입니다.

 

흔히 이 이야기를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것만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진실을 놓치고 떠내려가면서도 그런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역사적인 동참이 아니기 때문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감정적 참여입니다. 역사적인 동참을 하는 사람은 뱃전에 표시를 하는 대신 검을 떨어뜨린 순간의 전체 좌표를 기억해두고 가급적 빨리 그 배에서 내립니다. 그 기억을 잃으면 안 됩니다. 검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배를 타고 끝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검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멀어지고 확률은 점점 더 낮아집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시간과 공간 사용을 구체화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함께 살아내는, 그러니까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기억을 흩트리려는 세력의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 행위를 우리는 그 동안 공포에 떨면서 지켜보았습니다. 기억이 흩어진 채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구원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안일한 이기심을 우리는 그 동안 서럽게 지켜보았습니다. 가능한 한 배가 멀리 떠내려가도록 시간을 끄는 세력의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 행위를 우리는 그 동안 공포에 떨면서 지켜보았습니다. 가능한 한 멀리 떠내려가는 게 행복한 삶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안일한 이기심을 우리는 그 동안 서럽게 지켜보았습니다. 204일 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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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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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의 의도대로였다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자신의 첫 작품의 제목이 되었어야 했다.·······그러나 1947년 레비의 책을 처음 출판한 편집장 프랑코 안토니첼리는 책 첫머리의 서시에 들어 있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문장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레비에게 제목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최초의 제목은 표지 위로 올라오기까지 39년을 기다리게 되었다.·······왜 프리모 레비는 문학적 경험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경험을 한 뒤에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진실에 대한 필요 때문이라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수사修辭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일종의 카운터 멜로디, 그러니까 수사에 맞서는 산문으로 된 논평이 필요합니다.(254-255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출간한 그 이듬해 프리모 레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누가 봐도 유서인 이 책의 제목을 39년 전 그것으로 다시 잡은 까닭은 수사에 맞서 진실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수긍이 가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그러면 수사에 맞선 진실 세우기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답은 프리모 레비가 직접 말한 부분에 있습니다.

 

논평.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성격을 분명하게 해주는 한 마디입니다. 논평이란 사건 또는 그에 관한 말이나 글의 시비·가치·영향 들을 따져 평가하는 행위 또는 그 글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이것이 인간인가」는 view이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review 인 셈입니다. 좀 더 분명히 하자면「이것이 인간인가」는 descriptive view이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prescriptive review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구태여, 아니 필연적으로 이렇게 변형된 수미상응을 취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인간인가」이후 39년 동안 살아온 삶에서 거듭 깨닫고 확인한 어떤 이치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being이 아니라 인간의 곡진·결곡한 실천으로 형성되는 것becoming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descriptive view와 prescriptive review 사이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간절한 당위 의식의 틈이 있습니다. 수사 놀이에 빠진 인간답지 못한 자는 이 틈을 넓히려 하고 진실 세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인간다운 자는 이 틈을 좁히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후 「이것이 인간인가」의 증언에도 아랑곳없이 프리모 레비가 목격한 세계는 이 틈을 결코 좁히지 못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descriptive view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prescriptive review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술에다 논평의 죽비를 날릴 때 실천의 화두가 화들짝 깨어나는 것입니다.

 

서술도 논평도 끝낸 뒤 무엇을 해야 할까, 프리모 레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 무엇을 염두에 두고 논평을 써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수사의 덫에 걸려 책임도 느끼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한 채 키들거리는 인류에게 날릴 마지막 죽비. 논평의 완성.

 

자살.

 

남은 자의 침묵. 침묵으로 애도하고 침묵으로 실천해야 프리모 레비의 자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떠드는 자 모두 수사의 떼거지입니다. ‘아름다운’ 수사에 휘말려 범죄에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향한 프리모 레비의 완전한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직시해야 합니다. 진실을 세우고 기억하고 전하고 실천하고 기려야 합니다. 오늘, 203번 째 4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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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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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육중하고 날카롭게 찔러오는 무엇이 있습니다. 결코 은유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눈앞에서 누구는 가라앉았고, 누구는 구조되었습니다.

 

게르만민족주의 기치 아래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자를 대량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모일숭미 기치 아래 매판정권이 단원고 아이들을 학살한 세월호의 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정치적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수백만과 수백의 차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므로 무한대와 만분의 일 무한대의 차이가 없는 수학적 진실을 원용해야 합니다. 오히려 자국 정권이 자국 국민을 살해한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죄질이 더 무겁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기 우리는 슬픔을 넘고 분노를 지나 냉철함으로 세월호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프리모 레비가 있으면 다시없는 행운이겠지만 프리모 레비 존재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곡진히 읽어 그의 이해 지평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면서 우리 진실의 결을 더듬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부록으로 붙여진 프리모 레비와 <라 스탐파> 지의 인터뷰(조르조 칼카뇨 정리)와 작품 해설(서경식 씀)부터 읽어 나아가겠습니다. 작품에 대하여 프리모 레비가 직접 들려주는 말과 누구보다 프리모 레비 이해에 탁월한 서경식의 안내를 통해 좀 더 핍진한 독서로 다다가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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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

 

  김행숙

 

  악몽이란 생생한 법입니다

  몇몇 악몽들이 암시했고 별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저녁노을의 빛과 새벽노을의 빛 사이에 별이 못처럼 꽝꽝 박히고 새파란 초승달이 돋아나 가장 어려운 각도로 서 있습니다

  휘청하는 순간처럼 달빛이 검은 천막을 찢고 있었습니다

  별이 못이라면 길이를 잴 수 없이 긴 못, 누구의 가슴에도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못입니다

  오늘 밤하늘은 밤바다처럼 빛을 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같습니다

  꿈이 아니라면 이제부터 진짜 악몽이라는 듯이 동쪽에서 번지는 새벽노을이 얼룩을 일그러뜨리며 뒤척입니다, 어디에 닿아도

  빛을 비추며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서로서로 빛을 비추며 죽은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어디서 날이 밝아온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             *             *

 

  김행숙을 읽기에 

  제 서정은 여전히 통속합니다

  이 통속함이 끌어안는 여기 아이, 그러니까

  죽은 아이

  아무래도 제게는 은유가 아닙니다

  참으로 죽은 아이입니다

  이백쉰 개의 이름을 지닌

 

  이백쉰 개의 이름은

  이백쉰 날

  엄마 마음 속에 살다가

  진실, 꼭 하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이백쉰 달

  이백쉰 해...

  길이길이

  살아갈 것입니다

  살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 <빛>은 「에코의 초상」(2014, 문지)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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