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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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관심은 거대한 억압기구의 각 층위에서 어쩔 수 없이 죄에 가담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체제 자체의 범죄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갈라낼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억압기구의 범죄에 의해 가담자나 공범자가 되어버리는 메커니즘에 주의를 기울였다.(278쪽)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프랑스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 2013년도에 출제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주화운동의 핵심이 대학생이었음에도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주제넘게 정치에 참견하느냐?’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하니 하물며 고등학생에게 이 무슨 망발일 것입니까.

 

정치라는 용어가 선두에, 표면에 떠 있지만 이 문제를 찬찬히 뜯어보면 내면에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과 분리된 개인 윤리가 가능한가?’ 라는 철학적 질문이 고갱이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전체와 개체의 비대칭적 대칭성에 관한 근원적 질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만 보면 나타나는 알레르기 반응은 그대로 우리사회가 일극으로 쏠려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라는 진실을 숨기고 모든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프로파간다가 일관되게 먹히는 사회라는 이야기입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자들은 당연히 분할통치술을 씁니다. 흑백 대결로 간결하게 전선을 정리한 뒤 서로 물고 뜯게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그중 한편은 자신들의 충견입니다. 검찰·경찰과 같은 공적 집단은 물론 자유총연맹·재향군인회 등 준 공적 집단과 어버이연합·일베·용역 따위의 사적 집단들이 전방위적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 집단에 속한 자들은 반공이라는 독선적·기만적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종북)로 몰아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자들이 공포·탐욕·무지를 적절히 이용해 자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체, 범죄에 가담·방조하고 있습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 이렇게 작동되는 사이 대부분의 회색 ‘소시민’은 살아남기 위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천명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따라 나섭니다. 이 또한 공포·탐욕·무지의 소산입니다. 아니, 이 또한 공포·탐욕·무지를 이용해 상위 0.1%의 곳간을 채우는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은 필경 각자도사各自圖死로 귀결될 것입니다. 죽음은 다만 생물학적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다움·양심·도의들의 죽음도 죽음입니다. 이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 목하 대한민국이라는 형해화한 공동체의 마지막 숨을 끊으려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국정의 메커니즘 자체가 특정집단의 사익추구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써먹고 필요가 충족될 때 언제든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세월호 선원들을 써먹고 버렸습니다. 선장은 36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렇게 세월호에 탄 아이들을 써먹고 버렸습니다. 209일 동안 완벽히 증거를 인멸한 뒤 ‘위헌’ 운운 잡음 섞어 법 쪼가리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이미 숱한 폭력이 자행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움을 최소한으로나마 누리며 살고자 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깨뜨려야 합니다. 깨뜨리려면 메커니즘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알려면 진실을 얻기 위한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첫째, 두려움을 무릅써야 합니다. 우리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둘째, 탐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제 살 궁리만 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셋째, 무지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입니까? 이백 열하루 째, 버려진 넋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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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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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수인들에게 해방이 무조건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치욕감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 강제수용소의 수인들이 해방 후에(종종 해방 직후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프리모 레비의 술회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경험한 심연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한 그 자신이 이 책을 남기고 자살해버렸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의 놀라움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276쪽)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인문의학적인 상담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돌연변이’ 한의사입니다. 임상 경험을 통해 제가 이름 붙인 병이 더러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서울대증후군”입니다. 서울대 학부 또는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일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 힘없음, 의욕 없음, 관심사 없음, 즐거움 못 느낌, 지쳤다는 느낌, 쉽게 피곤해짐·······우울장애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학생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습니다. 사실은 좀 더 일찍, 그러니까 외고나 과고에 입학한 직후부터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뜸 이런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서울대(외/과고)씩이나 갔으면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다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있는 거 아냐?”

 

대체 왜 이런 생각과 감정에 휘말릴까요? 상식적으로는 성공 뒤에 오는 허탈감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모든 성취 뒤에 이런 증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본디 모습을 되찾는 게 맞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항 정도로 심각하다면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이런 문제와 맞닥뜨린 서울대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명문 사립대 두 곳에 합격한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서울대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 감정 상태를 물으니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왜 그랬는지 설명해보라 하니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한없이 머뭇거립니다. 제가 마중물을 조금 부어주었습니다.

 

“무조건 서울대로 가야 해서 그런 것 아닐까?”

 

그가 무릎을 칩니다.

 

“맞습니다. 언제나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 지속되었거든요.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었죠. 그게 절 숨 막히게 했고, 한없이 공허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에서 그 자신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만든 입시제도, 사회적 분위기, 학교와 부모의 집착 등이 일사불란하게 강요하는 편향된 가치가 그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박탈해버린 것입니다. 입시가 끝나고 해방되었을 때 해일처럼 들이닥친 치욕감과 죄책감이 그 생명 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 학생이 이럴진대 하물며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때 그가 그 목숨에 손을 대는 것은 최초이자 최후로 삶에서 스스로의 선택권,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무서운.

 

서경식은 프리모 레비가 “자살해버렸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이 본인의 의중을 정확히 전달한 표현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놀라움과 맞물린 표현이라 하더라도 이 지점에서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치 우발적으로, 또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그마저 그렇게, 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분명히 자신이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의 존엄에 대한 인간적 도의를 모를 리 없는 그가, 40년에 걸쳐 결곡하게 증언하는 삶을 살아온 그가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뢰 정도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요.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프리모 레비는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의 실상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몸으로서 생명이든 마음으로서 생명이든 이미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애도와 헌정은 프리모 레비 이외에 아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최후로 자신의 생명을 저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에게 봉헌奉獻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음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의 숭고한, 그리고 비장한 삶, 딱 여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사족 붙일 까닭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늘 정부가 공식적으로 세월호 수중수색 종료를 발표했습니다. 아홉 주검은 아마도 영원히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 그들을 위해 프리모 레비일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있기나 할까요? 프리모 레비와 유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히 단원의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에 함께하려 애쓰는 일,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일, 작든 크든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일·······실제로 소시민으로서는 막막하기 그지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증언과 봉헌의 삶을 살아낸 프리모 레비가 세월호 사건을 겪은 우리의 공적 양심으로 영원히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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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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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는 ·······매우 투철한 고찰,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이 관통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끝 모를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 책은·······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이라고 할 수 있다.(272쪽)

 

프리모 레비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관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의 피해자이자 ‘인간성 파괴’의 희생자인 당사자”(273쪽)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극히 드문 일, 아니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여태껏 이런 글쓰기는 없었던, 그런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관견으로 볼 때 프리모 레비의 삶과 그 이야기는 붓다 공자 그리스도 무함마드조차 담지 못한 삶이며 이야기입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른 인연을 짓게 마련이지만 거대한 권력집단이 치밀한 기획으로 대량학살, 회자되는 바 6백만 명을 살해한 수용소에서 붓다 공자 그리스도 그 누가 살았으며 팔만대장경 사서삼경 신구약성경 코란 그 무엇이 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까.

 

이것은 심오함이나 방대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이 반드시 인식 주체의 삶의 경험에서만 나오지는 않겠으나 경험에서 나온 인식과 그렇지 않은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붓다 공자 그리스도 무함마드가 만일 프리모 레비와 같은, 아니 (불가능한 가정이니 표현을 바꾸어)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아니, 좀 더 시비조로, 좀 더 진부한, 그러나, 그래서 본질에 육박하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이 그토록 고결하고, 그 분들을 따르는 무리가 지구를 뒤덮고 있었으며, 그 지도자들의 높은 깨달음이 하늘에 닿아 있었는데 어찌하여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우슈비츠 가스실 한복판에서는 어찌하여 저 전능한 신들이, 저 살아 있는 말씀들이 속수무책이었을까요?

 

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님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답은 거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나옵니다. 답은 거기 높은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답은 여기 낮은, 낮디낮은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기필코 사상적 좌표축을, 아래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환희의 높이를 말하지 말고 고통의 깊이를 말해야 합니다. 고결한 깨침에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깊디깊은 고통으로 떨어지지 않고 일상을 보전하는 것에 열반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나라로 들림 받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가스실에서 죽임당해 깊은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는 것이 구원입니다.

 

종교가, 철학이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과 악의 세력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신군부가 광주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 1980년입니다. 그 이듬해 성철은 돈오돈수의 기치를 높이 듭니다. 달마 이래 최고 선사라 하는 성철이 이룬 돈오돈수가 무고히 죽임당한 광주 시민의 목숨에 대해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대승이란 말입니까? 히틀러의 만행을 보다 못해 그를 죽이기 위한 비밀결사에 참여한 목사가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정녕 대승이 아닐까요?

 

이 땅의 언필칭 대승불교가 ‘참 나’를 찾는다며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 때, 개신교가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 때, 불의한 권력은 생떼 같은 아이들을 “가만히 있으라.” 윽박질러 맹골수도 깊은 바다로 데려갔습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그러니까 ‘참 나’를 찾기 위해, ‘천당’과 ‘지옥’의 사이에 선 존재임을 자각하기 위해 과연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요?

 

서경식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드리워진 프리모 레비의 감정 상태를 “끝 모를 깊은 절망감”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것으로는 태부족입니다. 거기에 덧붙입니다.

 

“삼킬 듯이 달려드는 공포, 저미는 슬픔, 가뭇없는 허무,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립감, 짓이겨오는 수치심, 아득한 막막함. 이 모든 것들이 엉겨 붙은, 형언하기 어려운 절멸의 정서.”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열반도 구원도 허망한 말장난이며 잡생각일 따름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절멸의 정서에 휘감겨 가라앉은 지, 오늘 209일 째입니다. 209년, 아니 209겁이 지나도 우리는 이 좌표축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인간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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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는 두 개의 동사가 끈질기게 반복된다.·······‘이해하다’와 ‘용서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 책을 읽기 위한 두 개의 올바른 열쇠인가?

 

‘이해하다’는 네, 맞습니다.·······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제게는 하나 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제게 짐 지워진 말이지요.·······무조건적인 용서는,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뉘우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러나 말로만 뉘우치는 것은 안 됩니다. 저는 말로 하는 뉘우침으로는 만족하지 않아요. 팩트로써 자 신이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물론 너무 늦지 않게 증명해야겠지만 말이죠.(257-258쪽)

 

용서. 인간의 말 가운데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들의 목록 선두에 놓아야 할 이 용서.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서 용서를 함부로, 가볍게, 무책임하게, 주제넘게, 그러니까 ‘개나 소나’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인플레이션 현상의 가장 큰 진원지는 아마도 개신교이지 싶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와 그것을 영화로 만든 이창동의 <밀양>을 기억하면 대뜸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업화 진행과 같은 궤도를 타고 급속히 약진한 개신교의 담론이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고 그에 따라 헐값이 된 두 단어가 다름 아닌 용서와 사랑입니다. 산업화 진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 내용을 담아내기 어려워질수록 두 말은 더 많이 남용되었습니다. 남용될수록 속절없이 그 숭고함은 훼손되었습니다. 이제는 용서가 정치적 수사修辭를 넘어 적반하장의 가십으로까지 타락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사기꾼이나 진배없는 장사치가 ‘호갱님’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지절댑니다.

 

저 프리모 레비에게 수많은 독자들이 용서 여부를 물어왔다고 합니다. 왜 그들에게 용서가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 관심사가 대부분 모종의 당위감에 근거한 것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위감은 모름지기 심각한 허위의식에 터한 것일 테고요. 하지만! 타인에게 용서를 묻거나 권면할, 그러니까 짐 지울 자격을 가진 자 그 누구입니까. 신에게도 없는 그 자격을 심지어 흉내 내는 자 그 누구입니까.

 

프리모 레비는 단호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개나 소나’ 떠드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그야말로 ‘개나 소나’ 하는 것입니다. 피해 당사자는 전인적 변화로써 뉘우치지 않는 범죄자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를 인간으로서 진정 위한다면 그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임을 ‘이해’하는 만큼 뉘우칠 수도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 뒤 비로소 용서는 용서입니다. 무조건적 용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는 이 지점에서 치명적으로 망가졌습니다. 값싼 용서, 쓸개 빠진 용서, 물색없는 용서, 생색내는 용서,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용서가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흘려지면서 정치는 통치로, 도덕은 도적으로, 윤리는 금리로 영락해갔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권력이 만든 폭력의 확대 메커니즘,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작품임은 물론입니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 용서는 철저히 개인 차원에서 교양인의 미덕으로 계발되는 웰 빙 상품이기조차 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개념이 어떻게 마침내 전복되고 마는지 우리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참담하게 목격하였습니다. 죽인 자들이 도리어 ‘지켜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죽는 시늉을 하자 죽임 당한 자들이 그 악어눈물을 덜컥 닦아주고 말았습니다. 그 뒤 가해자들의 태도가 돌변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이 꼴 보기 전에 표표히 떠난 일은 미상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인제 그만 하자고, 들 합니다. 그 말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하기 전에 그 말 하는 사람 면면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과연 누굴까요. 40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프리모 레비를 두고 고작 207일 째인 우리가 어째서 그 말에 대해 마음을 써야 한단 말입니까. 용서, 어림없습니다. 시방 예은 아빠한테 주제넘게 용서를 입에 올리는 자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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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그러한 경험의 역사성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경험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의 두려움을 향하고 있는가?

 

그러한 경험을 현재화한다는 것은 제 희망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제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 제는 우리가 그러한 경험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에요.(256쪽)

 

우리의 삶이 형성되는 시간은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양적·객관적 시간입니다. 흘러가는 연대年代로서 시간입니다. 한 번 가면 그만인 평평한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질적·주관적 시간입니다. 의미를 지닌 특이점을 형성하는, 날카롭게 솟아오르는 시간입니다. 실존의 결단과 기회로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Chronos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맥락으로 드러나는 연대기적 역사를 독일어로 Historie라 합니다. 이 역사는 과거에 묶이는 박제와 같은 역사입니다. 학문적 작업으로 정제된 역사입니다. 카이로스Kairos로 점멸하는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로 소환할 수 있는, 미래로 열어갈 수 있는 실존의 역사입니다. 이를 Geschichte라 합니다.

 

서양 역사철학이나 신학에서 나온 이해방식이라 이원론적·관념론적 냄새가 풍기지만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이런 식으로 문제의 대립각을 첨예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Historie로 흘려버리려 했듯, 끝내 그 흔적조차 지우려 했듯, 이 땅에도 세월호를 단순 교통사고로 규정해 Historie로 흘려버리려는, 끝내 그 흔적조차 지우려는 세력이 준이蠢爾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흘려버린 Historie는 역사로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망각된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도 힘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어둠의 세력은 자신의 폭력 현장을 모조리 Historie로 만들기 위해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를 전천후로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 짓을 저들은 정치라 이름 합니다. 물론 아닙니다. 통치, 그것도 더러운 통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색하고 Geschichte를 구축해낼 책무가 있습니다. 저들의 음모·허위·조작·기만·은폐를 뚫고 망각을 저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그러니까 현존하는 두려움에 직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슈비츠는 지금도 지구촌 도처에서 세워지고 있습니다. 세월호는 지금도 대한민국 도처에서 침몰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들만 죽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시시각각 죽임 당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세월호를 지금 당장 우리 면전에 불러올 수 있는 역사로서 Geschichte를 구축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 다름 아닌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에 입각하면 우리 아이들 250명은 죽었습니다. 진실에 입각하면 우리 아이들 250명은 살아 있습니다. 생물학적 사실의 실재actual reality만 실재가 아닙니다. 엄마 마음의 실재virtual/mindful reality도 실재입니다. 진실의 세계에서는 후자가 더욱 뚜렷한 실재입니다. 이 진실을 지켜내야 합니다. 진실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2014년 4월 16일은 영원한 현재가 됩니다. 오늘은 206번째 4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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