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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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 가운데에는 포로생활 중에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17쪽)

 

아우슈비츠 가스실에 누군가 바친 꽃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용모만 그때그때 다를 뿐 내용이 한결같은 우리나라 TV드라마에는 온갖 막장 에피소드를 돌파하고 기어이 살아남아 용서와 성공의 화신이 되는 선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런 해피엔딩의 속임수는 시청자들에게 애먼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악의 세력에 부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는 주인공이 반드시 존재한다, 라는 헛꿈 말입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대부분 죽거나 고통과 몰이해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처합니다. 이회영이 그랬고, 유관순이 그랬고, 김구가 그랬고, 장준하가 그랬고, 수없이 조작된 시국사건의 희생자들이 그랬습니다. 단원의 이백예순여섯 아이들 또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왔다, 장보리!’는 없습니다. 영원히 가버린 ‘바리’들로 넘쳐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남은 자the Remnant’들이 쓰는 역사만이 우리를 인간일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어떤 특권은 돌이켜 이제 분명한 의무를 부여해줍니다. 그 의무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진실은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자가 바닥까지 가본 사람에게 바치는 헌정입니다. 자기 경계 너머 푸른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무릎 꿇는 눈물입니다.

 

팽목 바다 위에 누군가 띄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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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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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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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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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 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의심할 여지없이, 끔찍한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기(또는 있었기) 때문에 그 진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침묵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악행을 알고 있었던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특히 전쟁 마지막 몇 해 동안 라거들은 복합적이고 확장된, 지역사회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체계를 구축했다.·······실제로 그곳은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다.(14-15쪽)

 

통이지지痛而知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픔으로써 이르게 되는 어떤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에게서 우리가 ‘고요히’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는 붓다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지만, 아무도 그에게 종교적 흠숭지례欽崇之禮를 표하지 않지만, 그의 깨달음은 가히 성인 반열입니다. 이 길지 않은 인용문에는 인간이 지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죄업의 근원이 죄다 담겨져 있습니다.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 그리고 이윤. 이윤은 곧 탐욕입니다. 이게 바로 삼독三毒입니다. (통속 불교는 두려움 대신 성냄, 그러니까 진瞋을 넣어 삼독이라 하지만 이는 붓다의 원음이 아닙니다. 통찰이 모자란 후대後代의 생각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지닐 수밖에 없는 무지, 공포(불안), 탐욕을 공적으로 조절하여 공동체 구성원의 공존과 번영을 꾀하는 것이 정치이며 이를 위해 권력을 특정 집단에게 위임하는 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국가 개념입니다. 이 상식적 합의를 깨고 자기 국민을 삼독에 중독되게 하여 제노사이드의 공범으로 만듦으로써 광범위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나치의 치밀한 전략이었습니다.

 

많은 독일 국민들은 나치의 범죄에 작위·부작위로 가담하였습니다. 구태여 ‘의도적인무지와 두려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지와 두려움은 수동적·소극적 인지·정서 상태라는 일반적 이해를 뒤집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아우슈비츠와 관련한 무지와 두려움의 진실은 탐욕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카펫이나 옷을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벌었습니다. 또 떤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그 카펫이나 옷을 사고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마냥 수동적·소극적 인지·정서 상태로 판단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은 침묵했습니다. 그들의 침묵으로 진실은 은폐되었습니다. 아마도 더 이상 세워낼 진실은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이것이 인간, 인간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프리모 레비가 40년에 걸쳐 애써 걷어내려 한 현실이라는 막이었습니다.

 

 

독가스 때문에 탈색된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모발. 카펫과 옷 원료로 쓰였다고 함.  

 

우리사회 또한 독일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때 적극적·능동적으로 가담하여 탐욕을 채운 무리가 있습니다. 식민지 상태가 35년 동안 진행되고 있을 때도 역시 적극적·능동적으로 일제에 부역하여 탐욕을 채운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동족을 ‘정신대’로, 731부대로, 탄광으로, 전쟁터로 내모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른바 광복이 되고난 뒤에도 일제를 대신한 점령 세력인 미군정의 비호 아래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 자손들 역시 매판의 정치를 계승하여 역사를 비틀어가며 지금도 권력의 중심에서 당당 무쌍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의 개가 되어 자기 민족을 착취한 이 집단이 나치와 그 부역자 집단인 독일인보다 훨씬 더 잔학함에도 뉘우침은커녕 도리어 애국의 개념은 물론 심지어 영웅과 신의 이미지까지 전유하며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지평에서 저들이 일으킨 대담한 폭력적·수탈적 토건사업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월호의 단원고 아이들은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초월적 권위에서 미친개까지 일제히 거짓말과 조롱으로 일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몰아 죽임으로써 돌아올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위해 저들은 전방위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저들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재난 시스템에 구멍이 ‘난’ 것이 아니라 토건적인 유능함으로 구멍을 ‘낸’ 것입니다. 의도된 무지와 두려움, 그리고 이윤을 철저하게 계산한 프로젝트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여기에서 대한민국 국민, 평범한 그대와 나는 대체 누구입니까. 프리모 레비가 독일 국민에게 추궁하고 있는 비겁함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우리는 과연 세월호 사건의 진실에서 무엇을 왜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의도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돌아올 알량한 이윤, 우리가 충족시킬 탐욕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독일 국민한테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프리모 레비가 준엄한 질문을 하고 있지만 우리한테는 같은 민족 내 백성이 더욱 준엄한 질문을 해올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부끄러움으로 결코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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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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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chutz-staffel, 나치 친위대) 군인들이 냉소적으로 포로들에게 마음과 같이 경고하면서 즐거워했다·······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걸. 아마 의심도 일고 토론도 붙고 역사가들의 연구도 있을 테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왜 냐하면 우리가 그 증거들을 너희와 함께 없애버릴 테니까. 그리고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 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 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과장된 선전이라고 할 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 거야.(9-10쪽)

 

이 섬쩍지근한 말들을 시 형태로 바꾸어봅니다.

 

<역사는 우리가 쓴다>

 

슈츠-스타펠Schutz-staffel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걸.

아마 의심도 일고 토론도 붙고 역사가들의 연구도 있을 테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그 증거들을 너희와 함께 없애버릴 테니까.

그리고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

·······과장된 선전이라고 할 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 거야.

 

이 섬쩍지근한 시를 우리 현실로 옮겨봅니다.

 

<역사는 우리가 쓴다>

 

정 매판 政 買辦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걸.

아마 의심도 일고 토론도 붙고 역사가들의 연구도 있을 테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그 증거들을 너희와 함께 없애버릴 테니까.

그리고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

·······과장된 선전이라고 할 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 거야.

 

살려달라 울부짖는 아이들 모습을 CCTV로 감상하면서, ‘인증 샷’을 찍으면서, 라면을 훌훌 불어 먹어가면서,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예순 아홉 시인의 시들을 쓱쓱 읽어가면서, 함께 단식하는 시민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하면서 저들은 이런 시를 썼을 법하지 않습니까. 이제 예순 아홉 시 가운데 하나를 마주 놓아보겠습니다.

 

 

<한 울음이 한 울음에게>

 

이재무

 

함 울음의 손이 한 울음의 손을 잡는다.

한 슬픔의 어깨가 한 슬픔의 어깨와 스크럼을 짠다.

울음이 울음을 불러 모으고

슬픔이 슬픔을 불러 모아

파랑 일렁이는 파도가 된다.

울음이 울음에 번지고

슬픔이 슬픔으로 번져

굽이치는 격랑의 물결이 된다.

쓸어버려라, 무너뜨려라,

한입 아우성이 된 울음과 슬픔이여!

하나의 울음은 가냘프지만

하나의 슬픔은 연약하지만

보아라,

한 슬픔이 한 슬픔의 손을 잡고

한 울음이 한 울음을 껴안는 것을!

우린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오늘 2014년 11월 15일 문화예술인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세월호, 연장전”을 벌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디 이들의 애씀을 통해 역사가, 진실이 저 매판 정권의 손으로 송두리째 넘어가는 일일랑 일어나지 않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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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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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n, at an uncertain hour,

That agony returns,

And till my ghostly tale is told

This heart within me burns.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내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느닷없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내게 들이닥쳤다. 언제나 의식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내가 찾아내기를 바라왔던 것처럼.·······”

 

프리모 레비가 권두시로 올린 저 시의 ‘불확실한 시간’이란 표현은 조금 피상적인 번역으로 보입니다. 물론 uncertain에 ‘불확실한’이란 뜻이 있지만 문맥을 바르게 짚으면 ‘불확정인’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묘사한 바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을 말합니다. 정해진 때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때에 수시로 엄습해오는 극심한 통증agony의 재현, 그러니까 기억의 재-점화를 의미합니다.

 

임상에서는 이런 경우 트라우마가 마음에 ‘길을 냈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기차가 자동적으로 달려가도록 되어 있는 레일처럼 아픈 상처의 사건은 마음에 회로를 개설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떤 요인이 작용하면 기억의, 통증의 기차는 기적조차 울릴 틈 없이 태고의 에피소드를 향해 돌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지금도 앓고 있는 사람은 벼락 같이 이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아침나절에 일어난 일을 점심나절에 기억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럼에도! 프리모 레비의 저작에는 이런 정서적 상황을 직접 드러내어 말하고 있는 부분이 거의 전혀 없습니다. 만일 격심한 통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아니 들어주지도 않는·······상대방이 몸을 돌리고 침묵 속으로 가버린”(10쪽) 독백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통증이 격심할수록 그의 문장은 냉정해지고, 냉정할수록 명징해집니다. 하여 섬뜩한 이야기ghostly tale일 수밖에 없습니다.

 

섬뜩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치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을 덜어내고 정색하며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통증을 거세하고 말하기까지 각고의 시간을 지나면서 심장은 다만 불타는 burn 것이 아니라 불타 없어지는burn out 것입니다. 참혹한 소진燒盡의 미학. 이는 극한의 통증을 지닌 자들의 숙명, 아니 천명天命입니다. 천명은 당위가 아닙니다. 당위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자유가 찾아 듭니다. 자유는 생사를 가로지릅니다. 용무생사用無生死.

 

우리 모두는 두 눈 똑바로 뜬 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고통에 찬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고통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소리 높여 외칠수록 가해지는 경멸은 더 야비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이려면, 사람다운 사람이고자 하면, 극한의 통증을, 그 천명을 끌어안고 심장에서 타는 불을 소진되는 그 날까지 극진히 보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오직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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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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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이 책을 남긴 까닭은 단지 타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남을 설득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증언을 사람들을 향해 외쳐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그는 과학자 같은 솜씨로 깊은 절망의 양상을 해부하여 자기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서는 가치(이 경우 ‘진실’이라 부르는 수밖에 없다.)를 위해 이 책을 남긴 것이다.(279쪽)

 

“아빠는 왜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요?”

 

세상을 읽는 방식이나 사회적 실천에서도, 생업인 한의사 노릇에서도 ‘주류’적이지 않은 모습을 나름 주의 깊게 지켜봐왔을 뿐만 아니라 중학생 시절 아비 손을 잡고 촛불집회에 여러 차례 나갔던 스무 살짜리 딸이 묻습니다. 제게 이 질문은 두 방향에서 들려옵니다. 육십 나이에 이른 아비가 더는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한편, 아이 아닌 어른으로서 아비의 삶이 지닌 곡절을 극진한 마음으로 들어보겠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아비의 인생관과 사회관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왔는지 간결하게 설명해준 다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때 매판행위를 한 자들과 일제에 부역하여 독립군을 포함한 동족에 총부리를 겨누던 자들의 후손이 권력을 쥐고 그 조상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오늘, 항일의병장의 후손인 아빠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니?”

 

개인의 인생이 가업은 아닙니다. 조상의 삶이 곧 후손의 의무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매판세력은 백여 년 전 조선의 멸망에서 오늘의 세월호사건에 이르기까지 온갖 불의를 정의로 전복시켜가며 국가의 이름으로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이치만을 따지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다움을 굳건히 지키는 일일까요? 인간으로서, 조국·독립·민족·정의·자유·평등·윤리·공존 등의 개념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무엇은 계승하고 무엇과는 단절할 것인가, 판단하고 그에 따라 평생을 건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다만 “생물학적 생명”일 뿐이라 단언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도둑질을 하건 사기를 치건, 나 하나, 그 연장선에 있는 일차집단만 잘 살면 그뿐인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 당연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인간의 인간인 소이의 전부라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리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그러니까 악귀나 다름없는 짐승일 뿐입니다. 진화가 어느 순간부터 윤리의 역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사태를 응시하며 프리모 레비는 한 글자 한 글자 뼈에 새겨 넣듯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써내려갔을 것입니다. 그 프리모 레비 영혼이 팽목항 부두에 앉아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왜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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