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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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층은 그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만큼 외부의 조력자가 더 필요해진다.·······그들을 묶어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범죄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이고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며 가능한 한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이다.(46쪽)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된다·······. 이 회색지대의 구성원들은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지로 서로 결속했다.(48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는 많은 순간 그가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서 쓰지 않았나 하는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그의 통찰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임과 동시에 한국사회가 그만큼 수용소적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사회가 움직이는 시간적 맥락과 공간적 지평을 잘 살펴보면 노골적인 패거리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패거리 짓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간의 본성이려니와,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경우 염치를 몽땅 말아먹은 뻔뻔함으로 대놓고 패거리 판을 짜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TV드라마를 보면 그 이야기 속에는 거의 빠짐없이 연기자가 등장합니다. 연기자가 연기자를 연기하는 구도를 유심히 보면 그게 바로 패거리 짓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복제를 통한 무한증식 버전의 패거리 짓기인 셈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패거리 짓기의 진수는 예능 프로입니다. 여러 갈래의 예능 프로가 있지만 패거리 짓기는 그 다양성의 행간에서 비교적 단순한 동선을 따라갑니다. 패거리적인 친분을 과시하며 패거리적인 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패거리적인 재미를 대중에게 널리 퍼뜨려 패거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연기자를 포함한 각종 대중적 인기 직업인,  심지어 방송을 통해 ‘뜬’ 전문직종의 스타들까지 패거리적인 인연을 통해 출연해 명예와 부를 독점해갑니다. 최근 들어 눈에 띄는 현상은 그들의 가족과 친지가 대거 등장한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걷기조차 못하는 어린 아들·딸에서 늙은 시어머니·장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들까지.

 

프로그램 구상에서 이익 분배까지의 전 과정에 공공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사적 영역에서 사적 채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누구누구 사단’이 무수히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지로 서로 결속”하는 횡적인 패거리 짓기의 전형입니다.

 

대체 이런 현상은 어디서 연유했을까요? 당연히 권력 집단의 패거리 짓기입니다. 폭이 좁은 권력층은 외부 조력자, 특권층 포로 집단을 “범죄의 짐을 지게 하는 것·······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 가능한 한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을 통해 상하관계의 결속, 그러니까 종적 패거리 짓기를 함으로써 억압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지요.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되는 이치를 따라 사회 모든 영역에 이런 횡적 패거리 짓기가 미만彌滿해집니다.

 

조선의 식민화를 주도한 서인 노론의 적자 집단과 식민지 시대 새로이 형성된 적극적 부역 집단이 야합하여 만들어낸 현대 한국의 주류적 통치세력은 기원에서나 정당성에서나 모두 협소한 기반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치밀한 음모와 현란한 술수를 동원하여 다양한 특권층 포로 집단을 양성했습니다. 그들을 범죄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영원한 포로로 묶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연루된 포로들은 그 알량한 특권을 지키기 위해 결속하고 또 결속하며 광대한 마름들의 바다를 만들었습니다. 그 바다가 사람 삼킨 날이 어찌 2014년 4월 16일뿐일 것입니까. 그 바다가 삼킨 사람이 어찌 304명뿐일 것입니까.

 

종횡무진, 패거리의 패거리에 의한 패거리를 위한 세상. 압제자들이 꿈꾸어온 천년왕국입니다. 공포와 탐욕과 무지로 똘똘 뭉친 이 패거리 판을 깨뜨리기 위하여 손을 맞잡은 곡속불망觳觫不忘의 공동체로 우리는 우리의 꿈을 꾸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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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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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권층 포로들을 보자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또한 더 중요해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또는 유사한 시련이 다시 닥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을 방어하고 싶다면,·······이 인물들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권층 포로는 라거의 전체 인구에서 소수였지만 생존자들 가운데서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말로 한 이야기든 글로 쓴 것이든 생환자들의 기억들 중 대부분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즉, 수용소의 현실에 맞닥뜨린 최초의 충격은 예견하지 못하고 이해도 할 수 없었던 누군가의 공격이었는데, 관리자 포로라는 새롭고 이상한 적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자신은 잃어버렸지만 상대는 아마도 아직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을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했다.

  라거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에서 특권층의 부상은 걱정스럽지만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권층은 유토피아에서만 없다. 모든 부당한 특권에 대항해 전쟁을 하는 것은 의로운 인간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수 또는 한 사람이 다수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곳에서 특권은 태어나고, 권력 자체의 의지에 반하면서도 특권은 증식한다. 그러나 한편, 권력이 특권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동시에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과 하인의 두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판단 욕구를 혼란시키기에 충분한 것을 그 안에 품고 있다.(44-46쪽)

 

황석영의 「장길산」에는 최형기라는 특권층 포로가 등장합니다. 양반 권력자의 마름 노릇을 하는 중인中人, 그러니까 혼성 계층 인물입니다. 양반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야비한 언행으로 양반권력을 유지·온존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개짓꺼리를 합니다. 그의 폭력은

 

자신은 잃어버렸지만 상대는 아마도 아직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을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저지르는 추악한 범죄입니다. 인간이려면 최후까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중요한 단서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자신은 잃어버렸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이미 잃어버린, 인간성을 상실한, 형해화한 인간입니다. 인간의 외형이 남아 있는 두억시니夜叉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멸망해가는 양반 나라의 회색지대에 서 있는 양반의 개이면서 양반의 멸절을 재촉하는 존재인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은 불치병에 걸려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병든 영혼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히 트릭스터trickster 구실을 하였을 것입니다. 신화나 민담에 등장하는 트릭스터는 선과 악, 파괴와 생산, 현자와 바보 같은 완전히 다른 대칭성을 갖춘 회색 존재입니다. 트릭스터는 그 대칭성을 가로질러 기존 질서와 체제를 비틀고 흔들며 뒤바꾸는 매개자입니다.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이렇게 건전하지 않은 회색 존재들이 불온을 사회 전반에 번지게 해야 합니다. 최형기는 불온을 번지게 하는 트릭스터가 아니라 자신의 병을 민중에게 감염시켜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관리자 포로였습니다.

 

신화나 민담에 트릭스터가 보편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역사에서 그런 존재에 대한 갈증이 극심하다는 뜻일는지도 모릅니다. 지구가 거대한 수용소로 전락해가고 있는 오늘 인류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잔혹한 세월호로 침몰해가고 있는 여기 우리에게, 어쩌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트릭스터들일는지도 모릅니다. 엄정하게 생각할 때, “모든 부당한 특권에 대항해 끝이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의로운 인간”도 사실은 이 트릭스터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신화나 민담에 나오는 영웅처럼 지나치게(!) 순도 높은 의인은, 현실 세계에서는, 이미 죽임을 당했거나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민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겪은 극단적인 죽음의 수용소는 변화가 원천 봉쇄된 세계입니다. 거기의 관리자 포로는 당최 트릭스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일으키는 불안감은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퍼뜨리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들이 서식하는 회색지대는 포로들한테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판단 욕구를 혼란시키기에 충분한 것을 그 안에 품고 있”을 뿐 압제자들한테는 지극히 간결하고 투명한 공간입니다. 거기 서식하는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아무리 어지러이 날뛰어봐야 양 무리를 collecting하고 driving하는 목양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는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나타난 세계는 어김없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금-여기입니다. 아무리 본질적으로 같다 해도 그대로 아우슈비츠는 아닌 지금-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글 첫머리로 돌아가겠습니다.

 

특권층 포로들을 보자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또한 더 중요해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또는 유사한 시련이 다시 닥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을 방어하고 싶다면,·······이 인물들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문단에서 특권층 포로 대신 트릭스터를 넣어 생각해보면 결곡한 길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의인을 자처하지 말고 불온한 트릭스터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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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소한 수용소에서 목격한 놀라운 광경은·······충격을 던져주었다.·······적은 주변에도 있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우리”라는 말은 그 경계를 잃었고, 대립하는 자들이 두 편으로 나뉜 게 아니었다. 하나의 경계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복잡한 경계선들, 곧 우리들 각자 사이에 하나씩 놓인 수많은 경계선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적어도 불행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면서 수용소에 입소했지만·······바라던 동맹은 없었다. 반면에 수천 개의 봉인된 단자單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이 단자들 사이에는 필사적이고 은밀하고 지속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수용소에 수감된 처음 몇 시간 만에 종종 미래의 동맹군이라 기대되었던 사람들 쪽에서 퍼붓는 집중 공격의 즉각적인 형태로·······나타났다. 이는 저항할 능력을 단박에 무너뜨릴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치명적이었다.

  ·······수용소 세계는 그 기원·······에서부터 상대의 저항 능력을 분쇄하려는 주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SS 군은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주 얼굴에 가해지던 즉각적인 주먹질과 발길질,·······입소자들을 완전히 벌거숭이로 만드는 것, 털이란 털은 모조리 깎는 것, 누더기를 입히는 것 등.·······수용소 입소 시에 수반되었던 모든 불길한 의식들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연출이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명백한.

  그럼에도 입소의식과 그것이 촉발시킨 도덕의 붕괴에는 수용소 세계의 다른 구성원들 역시 거의 의식적으로 기여했다.·······포로들 말이다. 새로 온 사람을 친구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행의 동반자로 맞아주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41-42쪽)

 

글의 흐름을 보면, 먼저 수용소에서 포로 사이에 일어나는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폭력이 수용소 메커니즘 자체, 그러니까 SS 군의 의도와 연출에서 시작되었다는 고찰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그 폭력이 피해자의 의식적 기여로 말미암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합작품임을 밝힙니다. 아마도 프리모 레비는 권력과 타협하여 형성되는 피해자의 자발적 폭력 스펙트럼을 냉정하게 그려낼 요량으로 이 <회색지대>라는 장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역접의 접속어 ‘그럼에도’를 배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수긍할만합니다.

 

그야말로, 그럼에도, 좀 더 면밀히 이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의자醫者인 제 견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피해자들의 이런 마음 작용을 타협이나 의식적 기여라고 말하는 것은 이성적인, 그러니까 정상적인 명료함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구태여 학문으로 엮는다면 사회인문학의 언어입니다. 의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전혀 달라집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후자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포로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나치가 가한 폭력은 돌이킬 수 없는 외상trauma이며,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태들은 일련의 외상후증후군이라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폭력의 외상을 입은 피해자가 병적인 상태에서 폭력을 향해 마음을 작동시킨 것은 가해자의 폭력성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면화를 좀 더 선명하게 표현하면 ‘감염’입니다. 상처 입은 포로들이 주고받는 폭력성은 감염의 확산입니다.

 

감기나 간염 같은 몸의 병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이런 경우를 감염이라 할 수 있는가, 싶지만 상식과 달리 마음의 병도 감염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입니다. 흔히 모방 자살이라 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감염된 마음상태에 이끌려 죽음의 길로 속절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성을 직접 경험한 포로들에게 모방 폭력이라는 표현은 더욱 부당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타협이나 기여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단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관통상을 입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를 제 논지에 의거, 의학어법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그럼에 따라’가 적절할 것입니다. 나치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폭력성이 자연적 인과의 경로를 따라 포로들에게 감염되고 확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면 나치와 타협하고 그들의 범죄에 기여한 것을 고발하기 위한 판단의 언어보다는 치유를 위한 진단의 언어가 적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 와야 비로소 저 압제자들의 차가운 음모를 따스함으로 분쇄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전체주의 지배집단의 의도와 연출로 자행된 폭력 또한 피해자들 사이에 극심한 감염 상태를 야기했습니다. 허울뿐인데도 민주공화국의 국민이라 하니 포로인 줄 모르고 날뛰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 도리어 큰 슬픔을 자아냅니다. 더군다나 ‘어디 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허구적 근거에 입각하여 자신들을 로열패밀리로 착각하는 찌질한 무리가 막무가내로 저지르는 폭력은 그 자체로 블랙코미디입니다. 이른바 ‘일베’ 아이들이 세월호 유족에게 하는 짓은 존더코만도스의 악행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병식病識 없는 저 병자들을 의자의 눈으로 보면 더 측은하거니와 치료의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더더욱 절망적입니다. 225일 째 4월 16일 오후, 포로 주제에 나라 걱정이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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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해하다’의 의미는 ‘단순화시키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심오한 단순화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정의할 수 없고 끝도 없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방향설정 능력과 행동결정 능력을 위협할 것이다. 요컨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식 가능한 것들을 도식적으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낸, 언어나 개념적 사고와 같은 인간 고유의 놀라운 도구들은 모두 이러한 목적에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역사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우리 안에는 ‘우리’와 ‘그들’로 영역을 나누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해서·······‘친구-적’이라는 이분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인간 세계의 넘쳐흐르는 사건들을 갈등으로, 갈등은·······대결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거의 무의식적으로·······승자와 패자를 원했던 것이며, 승자를 선한 자, 패자를 악한 자와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겨야 하는 쪽은 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뒤집힐 것이다.(39-40쪽)

 

夫無不可以無明. 必因於有. 故常於有物之極而必明其所由之宗也.

 

무릇 무한은 무한 (자체로) 밝힐 수 없다. 반드시 유한에서 말미암아야 한다. 그러므로 늘 유한한 사물의 극(점)에서 그들이 연유한 근원을 밝혀야 한다.

 

 

오래 전 도올檮杌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한 구절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미상불 왕필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의 요지와 여기 프리모 레비의 ‘심오한 단순화’는 같은 맥락에 놓일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 자체가 그렇고 언어를 매개로 한 사유의 근간인 환유와 은유가 그러합니다. 단순화이자 유한한 사물의 극(점)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화는 심오해야 합니다. 유한한 사물은 극점에 다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완결적 최종성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여서 얻은 곡진하고 결곡한 유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작으로 열려 있는 마지막 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재를 얻기 위한 23시 59분 59초의 현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진실에 터하여, 그 터함을 전제하고, 프리모 레비가 말한바 ‘그렇지 않으면 뒤집힐 세상’에서라면, 그러니까 악한 자가 이기고 선한 자가 지는 세상이라면, 심오한 단순화와 유한한 사물의 극(점)을 극진한 마음으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대립각을 분명히 세우고 전선을 형성해야만 합니다. 그 전선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기려면 단순화된 극(점)에 무한히 접혀 있는 단순하지 않은 결들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그 복잡한 회색 스펙트럼의 결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갈리는 승패가 결국 풍요로운 진실의 세계를 여느냐, 마느냐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회색 스펙트럼의 결들은 세계의 복잡하고 불투명한 실상을 어지럽게 드러내줍니다. 이것에 말려들어는 안 됩니다. 이것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힘과 정보를 쥐고 있는 압제자들은 영악하게 이 스펙트럼의 명암과 채도를 조종하여 폭력을 구사합니다. 모으고 흩고 줄 세워 정신없이 전선에 휘말리게 합니다. 극단의 대결을 벌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끼리 물고 뜯게 합니다. 극단의 대결을 벌여야 할 사람들끼리 야합하게 합니다.

 

지금-여기는 어떤 전선이 형성되어 있을까요. 저들은 세월호 참사를 ‘사고’라고 규정하여 ‘보상’을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여태까지 내밀었던 오리발의 연장선입니다. 책임은 없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시혜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고’의 맞은편에 ‘사건’이 있습니다. ‘보상’의 맞은편에 ‘배상’이 있습니다. 대립각은 날카롭습니다. 진실을 탈환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단순한 극(점)에서 칼을 빼어들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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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런 기억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아예 기억의 진입을 저지하는 것, 즉, 경계를 따라 방역선防疫線을 치는 것이다. 기억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억이 기록된 뒤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추악한 작업을 담당한 사람들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보호하고, 가장 무감각하고 극악무도한 자들조차 꺼림칙해 할 그들의 작업이 확실히 수행될 수 있도록 나치 사령부가 고안해낸 방책들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목적에 사용된 것이었다. 러시아 전선의 후방에서 민간인들을 공동구덩이(희생자 자신들이 직접 파야 했다)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쏜 아인자츠코만도스Einsatzkommandos에게는 원하는 대로 술이 무한정 배급되었다.(33쪽)

 

曰若寡人者 可以保民乎哉 曰可 曰何由 知吾可也 曰臣聞之胡齕 曰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 曰牛何之 對曰 將以釁鐘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鐘與 曰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 有諸 曰有之 曰是心 足以王矣 百姓皆以王爲愛也 臣固知王之不忍也 王曰然誠有百姓者 齊國雖褊小 吾何愛一牛 卽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故以羊易之也 曰王無異於百姓之以王爲愛也 以小易大 彼惡知之 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則 牛羊何擇焉 王笑曰 是誠何心哉 我非愛其財而易之以羊也 宜乎百姓之謂我愛也 曰無傷也 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 君子之於禽獸也 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 是以君子遠庖廚也

 

(제 선왕이) 묻습니다. “저도 백성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능합니다." 왕이 묻습니다.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신은 호흘胡齕이라는 왕의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 하였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께서 말씀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주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맹자」<곡속장觳觫章> 일부입니다. 제나라 선왕이 흔종 의식에 쓰기 위해 죽을 곳으로 끌려가며 무서워 벌벌 떠는 소를 차마 보지 못하고 풀어주라 명합니다.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 양으로 대신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맹자가 그 왕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무서워 벌벌 떠는 소가 눈에 들어왔을 때 불인지심不忍之心을 낸 것에서 백성을 향한 어진 마음의 단초를 읽어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저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에까지 관심을 기울인다면 패도 아닌 왕도를 널리 펼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나치가 간 길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자신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직접 파도록 하고 희생자를 그 구덩이 가에 세운 다음 술에 만취된, 그러니까 불인지심不忍之心은커녕 기억의 진입조차 저지된 상태의 용역들을 시켜 사살하는 추악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패악이 수없이 자행되는 동안 히틀러를 포함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아예 자기 눈으로 보지 않도록 철저히 겹겹이 에워싸서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사전에 차단하였습니다. 술이 아니어도 이미 그들에게는 기억 형성 자체가 원천 봉쇄된 만큼 일말의 죄책감도 있을 리 없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그렇게 치밀하게 그 메커니즘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어떠합니까?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살려 달라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도 구경만 했습니다. 새끼들 제발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을 보고도 외면했습니다.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혀 달라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도 조롱했습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에랴. 아니, 전 국민한테는 고문하듯 진종일, 몇날며칠을 보여주고 정작 보아야 할 자들은 일부러 딴 짓 하면서 보지 않았을 테니 당최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일으켰을 리 없다, 그러니까 기억의 진입 자체를 저지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보지 않아 없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을 보이지 않는 데까지 확장한다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저들이 어찌 국민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요. 그런 저들이 어찌 국민을 주권자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춘추전국시대만도 못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소 같은 대접이라도 받기를 기대하는 것마저 얼마나 물색없는 꿈인 것인지. 소만도 못 한 우리야말로 기억이 천명 아닐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잊지 못하리觳觫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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