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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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연대감의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자책 또는 비난은 더욱 현실적이다.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카포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다)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나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힌다.(91쪽)

 

어느 순간 우리사회 전역에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홀연히 떠올라 이제는 요지부동의 진실로 자리 잡았습니다. 의로운,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죄와 벌의 차꼬가 채워집니다. 불의한, 그래서 부유한 자들에게는 승승장구 대박 나는 탄탄대로가 열리고 있습니다. 급기야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아니 저질러야 헌법기관, 심지어 대통령도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야훼와 붓다를 제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천박하게 너무나 참담하게 겪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매판과두정치買辦寡頭政治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대한민국은 다르지 않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다만 외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 그 감정과 이성, 그리고 의지의 결을 따라 들어가 마음 실재를 포착해냅니다. 의도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그 범죄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자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 희희낙락 살아간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나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의로움의 감수성을 파고든다는 진실에 영혼의 촉수가 닿아 있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자책감과 수치심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자기의 악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늘 덜 누린다고 앙앙불락하고 의로운 사람은 늘 더 누린다고 자책합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하고 의인은 자기 손의 것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음모란 없다고 떠들며 늘 음모를 꾸밉니다. 의로운 사람은 음모에 당하면서도 늘 음모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인간답지 못한 현실 세상에서는 의롭지 못한 자가 백전백승합니다. 백전백패하는 의로운 사람이 끝까지 버리지 않은 꿈은 인간다운 실재 세계입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문제가 연일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관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기억을 지운다”며 나대고 있습니다. ‘찌라시’에 흔들리는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찌라시’ 흘리는 정치를 하는 집단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진돗개가 청와대 실세라는 ‘농담’은 다만 농담이 아닙니다. 그 ‘농담’은 무심코 진돗개가 제압하고 있는 ‘똥개’를 은유로 깔아 놓았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의 전형을 이루기 위해 총궐기한 저들의 모습은 가증스럽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자아내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죄책감도 수치심도 사라진 저들의 영혼은 초월적 권위의 망령에 사로잡혀demon possessed 있습니다.

 

정치적 귀신들림political demon possession은 이 땅을 나치와 같이 칠흑의 광기로 덮어가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을 물을 따름입니다. 돈이 모든 광기의 출발이자 귀결입니다. 돈을 위해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덮기 위해 사람을 죽입니다. 살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욱 깊이 귀신들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사악하고 음산한 시대를 꿰뚫는 힘, 그러니까 참된 정치적 영성은 무엇일까요? 의로워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지닌 따스한 죄책감과 수치심, 그러니까 염치가 빚어내는 날카로운 느낌과 맑은 알아차림, 그리고 옹골찬 손잡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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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2-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 사회적 연대가 절실한 시점인데 정치적 무력감이 널리 퍼지는 것 같습니다.

bari_che 2014-12-10 09:23   좋아요 0 | URL
걱정입니다.
외곽을 때려 중심을 무너뜨리는,
다른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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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슨 죄인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가 휩쓸려 들어가 있던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아니면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떠올랐다.·······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다.·······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생환자는 스스로를 피고로, 심판받는 사람으로 느끼며 자신을 해명하고 방어해야 할 것처럼 느끼게 된다.(89-91쪽)

 

“내가 그랬다, 내가 내 아들을 죽였다(I did it, I killed my son.)”

 

나이트클럽에 나가 밤일을 하면서 혼자 어렵게 두 아이를 키워오던 한 여인이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TV와 서랍장이 쓰러진 채 나뒹굴고 큰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평소에 아이들을 재워 놓고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하필 그 날 밤 따라 아이들은 깨어서 함께 서랍을 열고 들어가는 등 놀았고 그 와중에 서랍장이 쓰러지며 그 위에 놓여 있던 TV가 떨어져 큰 아이의 머리를 가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서투른 영어로 자기 잘못을 탓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말을 근거로 법원은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손 씨 성을 가진 한국인 교포였습니다. 이 일은 미국의 잭슨빌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내가 잡았어, 내가 내 새끼를 잡았다고!”

 

그는 분명히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상황이라면 대한민국 어느 엄마라도 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새끼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아니면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에 가슴 치며 절규했을 말이 이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사무치는 죄책감을 단도직입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 그 여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 교민과 어느 변호사의 노력 끝에 몇 년 뒤 주지사의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고 합니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그의 마음에는 “스스로를 피고로, 심판받는 사람으로” 여기는 나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기구하고 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죄인 자의 유죄인 느낌. 체제에 맞서는 대항이든 운명에 맞서는 대항이든 실현 불가능한 자기 의무를 전제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해명하고 방어해야 할 것처럼 느끼는” 의인의 수치심. 이처럼 날카로운 모순, 깊은 감옥이 다시 있을까요. 대항이 곧 죽음이라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도 “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때문에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아우슈비츠 생환자와 손 여인, 그리고 세월호 엄마들은 이런 점에서 하나입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 것에 무한한 죄의식을 지니는 사람들. 자기 책임이 아닌 것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 자기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여 당위를 세우고 수행하지 못한 것,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에 끝없이 마음 쓰는 사람들. 사실 인간세상은 이들의 고통을 통해 공존과 배려의 가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대박난 자들의 대죄를 대속합니다. 이들이 크리스투스입니다. 이들이 237일 째 단원의 아이들을 품어 안고 황천강을 지키는 바리공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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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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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나는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 해석들이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다. 즉, 심사숙고한 행위이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선택이다. 라거에서는 선택의 기회가 별로 없었고 노예가 된 동물들처럼 살았다.·······둘째,·······늘 코앞에 닥쳐온 죽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셋째,·······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형벌이 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므로)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88-89쪽)

 

젊은 사람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을 하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데 우울증은 무슨·······그런 거 비집고 들어올 틈이 어디 있냐? 다 살만하니 그런 소리하는 거야.”

 

우울증에 대한 이런 해석은 프리모 레비의 자살 해석과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정신장애이므로 말 그대로 ‘정신없는’ 상태라면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살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동물 상태라면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이런 해석은 프리모 레비의 자살 해석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삶은 긍정적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동물 같은 삶은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과연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삶은 긍정적일까요? 그것이 건강함일까요? 아닙니다. 인간다움을 잃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상태는 그럼 어떤 것일까요? 살만하니까 걸리는 부자 병 또는 호강 병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삶, 아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인정과 신뢰를 잃은 병입니다. 그 주된 원인이 바로 아우슈비츠 포로들을 자살로 이끄는 죄책감과 수치심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생물학적 생명에 손대기 전에 먼저 마음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이렇게 해서 아직 살아 있음과 이미 죽어버림이 공존하는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사회를 강타한 죄책감과 수치심은 본질에서 아우슈비츠 포로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지금 처한 문제의 심각성과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세계최고의 자살률을 10년째 기록해온 나라의 국가권력이 도리어 국민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을 강요하니 이 땅에 더 이상 자살은 없습니다. 오직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타살만 있을 따름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여전히 인간으로서 한 올의 마음조차 지니지 않은 반인간적 권력에 환호작약하는 무지한 자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 긍정주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 행태가 알량한 탐욕과 조작된 공포의 소산임을 모른 채 「임꺽정」(이두호)의 김달평처럼 잔혹하게 킬킬거리며들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짐승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의 특권층 포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울증도 자살도 공동체 전체의 문제, 그러니까 공공의 어젠다로 인식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깨달음은 준 사건은 너무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 문제에 안일하고 둔감했다는 증거입니다. 먹고살기에, 아니 살아남기에 급급한 삶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세력을 직시하고 그에 맞서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을 알아차리고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찰나마다 혼신의 힘으로 싸워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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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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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우리는 수개월 또는 수년을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았다.·······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는 없어졌다. 우리는 더러움과 사생활의 결핍과 자기 존재의 축소를 정상적인 삶이었을 때보다는 훨씬 덜 괴로워하면서 견뎠다. 우리의 도덕적 잣대가 변했기 때문이었다.·······우리는 우리의 나라와 문화뿐만 아니라 가족과 과거, 우리가 그렸던 미래 또한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물처럼 현재의 순간에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굴곡 없는 바닥상태로부터 우리는 단지 드문 막간 동안에만 벗어날 수 있었다.·······하지만 이것은 고통스런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왜소해진 우리 존재를 외부로부터 측정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종종 해방된 직후에) 일어난 자살의 많은 경우들은 이와 같이 몸을 돌려 “위험한 물”을 바라보는 데서 기인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해방은 어쨌든, 반성과 우울함이라는 해일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87-88쪽)

 

“이제 됐어?”

 

몇 년 전 한 외고 학생이 엄마가 요구한 성적을 낸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유서 전문입니다. 그가 살았던 공간은 ‘성적-아우슈비츠’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간은 ‘성적-동물’로였습니다. 이윽고 “존재를 외부로부터 측정할 기회”가 왔을 때, 그러니까 “어둠에서 나왔을 때” 그는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습니다.

 

마침내 프리모 레비의 준엄한 통찰 지점에 가 닿고 말았습니다.

 

해방 후(종종 해방된 직후에) 일어난 자살의 많은 경우들은 이와 같이 몸을 돌려 “위험한 물”을 바라보는 데서 기인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해방은 어쨌든, 반성과 우울함이라는 해일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세계에서 청소년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나라 대한민국은 누가 보더라도 거대한 수용소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지난 봄 이 국가는 단박에 고등학생 266명을 바다에 빠뜨려 타살하는 기록을 천추만대에 새겨 놓았습니다. 시방은 또 ‘물 수능’으로 수십만 수험생에게 ‘물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요행히 좋은 성적으로 살아남아 명문대학에 가도 이른바 ‘서울대증후군’에 시달리는 아이들한테 대한민국은 20대, 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 말고는 제시할 것이 없습니다. 입만 열면 국격과 국기國紀를 떠드는 자들이 통치하는 나라치고 너무나 형편무인지경입니다.

 

상위 0.1% 매판 과두寡頭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를 빼앗고 대신 “왜소해진 우리 존재를 외부로부터 측정할 기회”를 흘림으로써 우울증과 자살로 국민을 몰아가는 이 사이비국가가 권력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를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야차의 무리를 응징하려면 어떤 질곡에서도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결기를 지켜내야 합니다.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결기가 흔들릴 때마다 죽음의 순간에도 “사랑해!” 톡을 보낸 우리 새끼들의 지극한 마음결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여 그 아이들의 죽음 값을 살아내야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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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5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4-12-05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얼마전 딸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잘함이 더 많아

bari_che 2014-12-05 21:31   좋아요 0 | URL
따님의 오묘한 어법
제가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저 어머니께서 인용하신 뉘앙스 따라
한 말씀만.^^

모름이 더 많아

2014-12-05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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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휴전」(돌베개에서 낸 번역본 19~20쪽 -필자)의 한 부분을 다시 읽는다.·······시신과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우리 수용소 앞에 처음 나타난 러시아 적군들(아우슈비츠는 1945년 1월 이들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필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인사를 하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음울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입을  봉해 버리는, 감히 무어라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동정심과 더불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 았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그 수치심이었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 선발이 끝난 뒤, 그 리고 매번 모욕을 당하거나 당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을 때마다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던 그 수치심, 독일인들은 모르던 수치심,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었다. 그런 잘못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만물이 존재하는 세상 속으로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거나 턱없이 부족했고 또 그것을 막는데 아무 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이 의로운 그를 가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84쪽)

 

흔히들 의자醫者를 좋은 직업으로 생각합니다. 돈 잘 번다는 통속한 인식 탓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병을 치료한다는 가치 판단도 한몫했을 테지만 이 부분에는 제법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임상 현실에서는 치료 효과에 대한 불평을 수없이 듣게 됩니다. 치료 효과가 탁월하다고 해서 감사를 표해오는 사람이 말 한 마디 없이 발길을 끊는 사람보다 많은 것도 결코 아닙니다. 저처럼 마음병 치료하는 경우는 더 어렵습니다. 몸 병처럼 눈에 띄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간에 좋지 않은 감정 상태로 그만두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때마다 의자인 저도 심경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상담치료를 진행하는 중이거나 그만둔 직후 내담자가 스스로 목숨을 거둔 경우에는 실로 형언하기 힘든 감정 상태에 빠져듭니다. 그 감정의 핵심에 놓인 것이 아마도 죄책감과 수치심일 것입니다. 작년 여름 이런 일을 겪으며 쓴 글 하나가 있습니다.

 

*

 

곱고 귀한 사람을 하나 잃었습니다.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 선한 눈매로 환히 웃으며 당장이라도 제 방문을 열고 들어설 듯합니다. 차마 눈조차 뜨지 못한 채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만을 되뇌던 그 아내가 여적 제 앞아 앉아 오열하는 듯합니다.

 

삼년 전 쯤 그는 깊은 우울증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서울과 충청도를 오가며 몇 차례 상담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상담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는 걸 경험했다 하였습니다. 그 뒤 가까운 한의원에서 약도 지어먹고 하면서 기운을 되찾아 건강한 삶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가 그러는 사이 저는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아 고전 중에 있었습니다. 한의원이 결딴나 낭인으로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용마산 발치에 조그만 동네 한의원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맨주먹으로 빚 얻어 시작한 터라 초기 함몰비용을 견디지 못해 매순간이 가시방석이었던 나날의 끄트머리에 홀연히 그가 나타났습니다. 농사꾼인 그에게는 물론 제게도 함부로 못할 거금을 하얀 봉투에 넣어서 말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제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기적이 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것이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벼랑 끝에서 저를 구한 그는 표표히 자신의 삶터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건강함에 작은 힘이나마 보탠 인연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머물던 제 눈길에 한 동안 휴식을 주어도 되겠다며 안심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봄 어느 날 급한 문자 한통이 날아들었습니다. “남편 상태가 심각해요. 선생님께서 전화 한 통 주세요. 그러면 그 사람 움직일 거예요.”

 

저는 지체 없이 전화를 했고 그 길로 올라오라 해서 만났습니다. 차를 마시다가 식사로 이어지고 마침내 낮술로 속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오직 착하고 곧고 맑은 마음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진보정치 일선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진보진영의 파쟁을 온 몸으로 겪게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치명적이었습니다. 그 상처를, 그 억울함을 어디에도 다 털어놓고 말하지 못한 채, 말한 그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속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울며불며, 가슴을 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어둠이 푸르게 내려앉을 때까지. 저는 깊이 경청했고 그의 주장을, 그의 깊은 마음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그가 이 고통의 강을 또 한 번 잘 건너갈 거라 믿었습니다. 전처럼 신뢰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醫者의 믿음은 한낱 안일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아픈 사람에게서 삶의 냄새만 맡고 죽음의 냄새는 짐짓 외면하는 통속한 감수성, 아니 관성이 그 날의 만남을 마지막 만남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저 통속한 신뢰의 알량한 봉인을 뜯지 못하고 어영부영 하다 마침내 다시 한 번 급박한 문자 한통으로 제 영혼은 된서리를 맞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둔해빠진 醫者는 또 허접한 후회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밤을 함께 새줄 걸, 내려간 뒤 수시로 챙길 걸, 그가 왔듯 내가 갈 걸....... 허접한 후회가 어찌 그리 쓰린지요. 뼈의 마디마디가, 살의 갈피갈피가 쑤시고 또 쑤셨습니다. 그의 선한 얼굴이, 그의 웃음이, 그의 눈물이, 그의 언어가 떠오를 때마다 칼에 베이는 듯 아팠습니다. 그 아내의 오열이 떠오를 때마다 온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부끄러웠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여 찰나마다 숨이 멎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오늘 한 깨달음 앞에 무릎 꿇습니다.

 

통속한 이 醫者의 죄책감이 이러할진대 연애 오년 동안 사랑의 편지 이천 통을 주고받았던, 부부로 살면서 그 고통의 고비마다 동참했던,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멀쩡했으나 더 이상 온기를 내지 않는 그 뺨을 부비며 울부짖었던, 그 아내의 심경은 오죽할까....... 오히려 내 죄책감 따위는 시건방 떠는 짓 아니겠는가....... 그래, 이 순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앞의 아픈 사람 하나하나 제대로 살피는 게 醫者의 애도다. 매일매일 하늘의 애인에게 연애편지를 쓰며 온 영혼으로 견디고 있는 그 아내에게 한약 한 제 정성껏 달여 보내는 게 醫者의 애도다.

 

삼가 있는 그대로 그의 삶에 도저한 공감과 지지를 보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제가 지니고 있는 마음을 이제는 더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자칫 그의 죽음을 욕되게 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막걸리에 감자전 놓고 말할 수 없는 말로 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가 오겠지요. 그 때 와서 다시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_

 

*

 

제가 겪은 일이 이 정도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올진대 하물며 아우슈비츠 안에서 옆 자리 있던 사람을 가스실로 떠나보낸 사람은 어떠했겠습니까. 해방시킨다며 아우슈비츠에 들어와 처참한 모습을 목도한 러시아 적군 병사는 또 어떠했겠습니까. 아니, 바로 우리 곁의 저 어미와 아비들, 생떼 같은 새끼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대체 어떠했겠습니까.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었다. 그런 잘못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만물이 존재하는 세상 속으로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거나 턱없이 부족했고 또 그것을 막는데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이 의로운 그를 가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 도저한 고찰은 우리 심장에 서늘한 숙명을 얹어줍니다.

 

“하늘은 2014년 4월 16일 그대를 의인으로 세웠다. 의로움을 증명하라.”

 

의인답게 살고자 할 때, 죄책감은 다만 감정이 아닙니다, 수치심은 다만 심경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의로운 삶을 이끌고 가는 견인차입니다. 그 견인차 뒤를 혼신의 힘으로 따르면 비로소 천명의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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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4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4 1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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