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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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의사소통은 타인의 평화와 자기 자신의 평화에 기여하는 쉽고도 유용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신호의 부재인 침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이지만 모호하고, 모호함은 불안과 의심을 낳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이다. 의사소통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학적으로 의사소통에 대한 성향을, 특히 언어라는 고도로 진화되고 숭고한 형태의 의사소통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105쪽)

 

세계의 구조는 기우뚱한 비대칭의 대칭을 이룹니다. 기우뚱한 비대칭의 대칭은 자발적으로 깨뜨려져 세계의 운동으로 일렁이며 번져갑니다. 자발적 깨뜨려짐을 되풀이하면서 세계는 구조와 운동의 무한 거래去來를 이어갑니다. 이 거래를 인간 척도human scale에서 표현한 것이 바로 의사소통입니다. 의사소통은 그러므로 인간 척도에서 구현해내는 세계의 진실입니다.

 

의사소통은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를 “언어라는 고도로 진화되고 숭고한 형태의 의사소통의 성향”이라 표현합니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한 어법을 이어갑니다.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부정하는 것은 거짓이다”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다

 

존재론적 차원의 “숭고한” 것을 아우슈비츠의 나치가 폭력과 수탈의 메커니즘을 통해 “부정”하고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사소통을 부정하고 거부한 것은 곧바로 포로들의 인간성 부정·거부, 그러니까 살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에 대한 원천적 접근불가능성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의적으로 ‘일상’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바로 그 단절 상황을 살해의 근거로 삼은 그악한 범죄의 문제입니다.

 

의사소통의 부정·거부는 세월호 사건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자행되었습니다. 배가 기울고 물이 들어오는 순간에 아이들의 의사와 행동 표현은 차단되었습니다. 오직 이 말만이 일방적·폭력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니 오직 이 말만이 말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다른 언어를 침묵으로 묶어놓았을 때 “불안과 의심”이 요동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휴대폰을 붙잡고 불안과 의심을 진정시키는 의사소통을 시도했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외로운 소통은 손자국으로 남았습니다. 그 손자국을 지우기 위해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다시 부정과 거부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죽여지고 또 죽여졌습니다.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부정과 거부는 곧바로 살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의사소통의 부정과 거부는 관철되고 있습니다. 침묵이 퍼뜨리는 불안과 의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 전체에 의사소통의 부정과 거부가 강요되고 있습니다. 침묵이 퍼뜨리는 불안과 의심이 마침내 모든 백성의 마음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위 인용문 마지막 문장 뒤에 놓인 이 문장을 꺼내 듭니다. 인간이기 위하여.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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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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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아우슈비츠’가 다시 돌아올 것인지 질문을 받는다.·······다시 말해 일방적이고, 체계적이고, 기계화된 또 다른 대량학살, 정부 수준에서 의도되고,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그리고 경멸이라는 원칙에 의해 합법화되는 또 다른 대량학살이 일어날 수 있겠냐는 것이다.(102쪽)

 

프리모 레비가 2014년 4월 16일을 소름 돋게 예언하였습니다. 구구절절 마치 눈으로 보듯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방적이고,

 

체계적이고,

 

기계화된 또 다른 대량학살

 

정부 수준에서 의도되고,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그리고 경멸이라는 원칙에 의해 합법화되는 또 다른 대량학살

 

아, 이 마지막 구절의 무쌍한 정확함이여!

 

“경멸이라는 원칙에 의해 합법화되는”=“놀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애들한테 배상은 무슨”

 

다시없는 묘사. 그 외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모두 췌언贅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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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이 있다. 곧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인간 종, 곧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고통은 어떤 비용이나 노력도 필요치 않은, 무에서 생겨나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101-102쪽)

 

수치심에 관한 프리모 레비의 고찰은 이제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인간세계,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그 자체, 그러니까 존재론적 수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무에서ex nihilo 고통을 창조해내는 무한한 잠재력, 그러니까 전능omnipotence을 지닌 존재라는 진실이 거부할 길 없는 육중함으로 던져주는 수치심입니다. 가히 숨 멎는 수치심입니다. 인간 존재에 결속된 수치심, 아니 인간 존재 자체인 수치에 관한 절대통찰입니다.

 

인간은 수치의 존재이므로 인간인 한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수치의 존재인 것은 고통 창조력에서 연유합니다. 그렇게 창조한 고통을 악의적으로 타인에게, 다른 종적 생명에게 찔러 넣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필연적으로 고통에게 찔리고 맙니다.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고통에서 전능한 인간이 수치를 알아차리는 수치심마저 잃으면 더는 갈 곳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수치심이므로.

 

마지막 순간을 괄호 치는 인간이 운명을 바꿉니다. 그들은 수치의 존재론을 정치경제학으로 전화시킵니다. 인간의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전화시킵니다. 공존의 문제를 수탈의 문제로 전화시킵니다. 전능한 존재가 자기 수치를 의도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전지omniscience를 거절할 때 악마가 됩니다. 악마의 메커니즘인 이 세상에 대한 수치심, 그 살 떨리는 최후의 수치심으로 프리모 레비는 1987년 4월 11일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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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그런데 아니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95-99쪽)

 

이 리뷰20에서 「맹자」<곡속장觳觫章>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떠는 소를 보며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일으킨 어느 왕의 이야기였습니다. 떠는 소를 보고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눈앞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보는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자기 대신 살해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기가 죽였다고, 그러니까 자기가 그 죽어간 사람에게 카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리모 레비 눈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자신의 용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 완전한 증인들, 원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영원히 기려져야 할 용기가 순간의 덧없음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완전한 증언이 완전한 침묵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워야 할 원칙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범죄는 아니지만 비겁함으로 살아남은 적자適者들이 불완전한 증인으로서 예외의 증언을 할 때, 또 그 증언 덕택에 편안히 살아간다고 느낄 때, 그것은 그대로 괴로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 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의 용기가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그렇게 움직여서 이루어진 원칙들이 증언으로 이어지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의 징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증언한 것일 텐데 그런 징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 아닐는지요. 프리모 레비의 절망이 영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여울목에 놓인 통찰입니다. 마침내 이 절망은 그의 죽음에 가 닿았을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도,

 

·······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최후까지 애써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절대의 벽이 있습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완전한 증언이 원천봉쇄 된 상황에서 역사는 무심히 ‘제 길’을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역사의 ‘제 길’은 최고의 사람들이 침묵 속에 죽어가는 일을 되풀이하는 방향으로 고정됩니다. 그것을 역사의 법칙이라 합니다. 역사의 법칙은 모든 역사적 특이점을 잡아먹습니다. 특이점을 잡아먹힌 역사는 맥락 없이 미끄러집니다. 맥락 없이 미끄러지는 역사는 시간을 공간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공간의 노예가 된 시간 속에서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이 변혁 불가능성과 맞서 싸워온 프리모 레비의 40년, 그 고독의 정점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한 자 한 자가 새겨졌을 것입니다.

 

감히 짐작하지 않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마음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죽음을.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마지막 매듭으로 삼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여기 이 자리, 우리 삶의 마지막 터로 삼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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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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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8월, 아우슈비츠는 아주 무더웠다.·······갈증은 배고픔보다 더 시급한 문제이다.·······갈증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배고픔은 기진맥진하게 만들지만 갈증은 광폭하게 만든다.·······

  카포가 잡동사니들을 치우도록 내게 할당한 곳은 창고의 구석자리였다.······수직의 벽을 따라 2인치짜리 파이프가 있었는데·······수도꼭지가 붙어 있었다. 수도관인가?·······나는 혼자였고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돌을 망치 삼아 수도꼭지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수도곡지에서 물방울이 흘러나왔다.·······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 물을 당장에 몽땅 마셔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니면 내일을 위해 좀 남겨둘 수도 있었다. 또 알베르토와 절반씩 나눌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작업반의 모든 동료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나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다니엘레는 뭔가 의심했고, 결국 짐작했다.·······해방 뒤·······다니엘레는 굳은 목소리로 내게 그 일에 대해 말했다. 왜 너희들은 되고 나는 안 되지? 그것은 다시 떠오른 ‘일반인의’ 도덕률이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인간인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잔인한 카포가 내리는 끔찍한 사형선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뒤늦은 수치심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없을까? 그 당시에도 나는 답하지 못했고 지금도 답하지 못하고 있지만, 수치심은 있었고 여전히 있다. 구체적이고, 무겁고, 영구적인 수치심 말이다. 다니엘레는 이제 죽고 없다. 그러나 우애 있고 애정 어린 우리 생환자 모임에서 하지 못한 그 행동, 나누지 못한 물 한 컵의 장막은 ‘큰 대가’를 요구하며 우리 사이에 투명하게 놓여 있었다.(92-95쪽)

 

프리모 레비를 읽은 뒤부터 제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실존적인 각성과 질문은 다름 아닌 죽음과 자살 문제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30cm 이내 거리에 있다.”

 

“무엇이면 스스로 목숨 거두는 선택을 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순간마다 프리모 레비를 더욱 사무치게 생각합니다. 그가 처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순간들,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 그 무엇보다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마침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섰을 때 명멸했을 상념들을 헤아려보면서 매번 지침 없는 눈물을 쏟습니다. 제 삶이 정화되는 시간들입니다.

 

프리모 레비로 말미암은 시간들 가운데 지금 이 부분은 참으로 아프고 쓰라린 것입니다.

 

다니엘레는 이제 죽고 없다.

 

이 문장을 써놓고 프리모 레비는 한참을 울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 절창이랄 밖에 없는 이 말이 폐부를 찌르며 달려듭니다.

 

물 한 컵의 장막

 

그래, 그렇구나, 물 한 컵이 장막이 되어 생사를 갈랐구나, 그러나 그 장막이 너무나 투명하여 죽음이 다시없이 선명하게 보이는구나, 바로 이게 치러야 할 ‘큰 대가’로구나·······문득 프리모 레비의 폭포 같은 죽음 한 줄기가 설핏 그 진실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물 한 컵으로 알베르토와 다니엘레 사이는 하늘과 땅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니엘레의 질문은 천하의 준엄함으로 다가옵니다.

 

왜 너희들은 되고 나는 안 되지?

 

프리모 레비에게 “구체적이고, 무겁고, 영구적인 수치심”을 안긴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시각각 던져집니다. 저 “너희들”과 “”를 구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리뷰24에서 패거리 문제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권력이 선두에서서 조장하는 패거리가 만연한 우리사회에서 이 질문은 매우 결정적crucial인 것입니다.

 

일천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매판적인 “통일신라 패거리”와 자주적인 의로운 사람들의 연대가 맞서온 과정이 우리 역사의 근간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구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통일신라 패거리”는 이 나라의 주류임을 자처하며 여전히 매판적 협잡을 통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채 의로운 사람들을 분할통치술로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로운 사람들은 누구까지 생명의 연대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프리모 레비처럼 그들에게는 “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인색과 물색없는 오지랖 사이지만 상대방의 처지에서는 선택과 유기 사이여서 더욱 어렵습니다.

 

한의원 털리고 낭인으로 떠돌던 시절, 우리사회의 어둠이 내린 여러 곳 사람들과 아주 적으나마 함께하였습니다. 강정마을, 평택 쌍차, 명동 마리·······해직 언론인, 희망버스 기획자·······함께하지 못한 사람이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습니다. 제 의료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침, 한약, 심리 상담이 대부분 무료로 이루어졌지만 상황에 따라 한약은 비록 원가 수준이었으나 돈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저 또한 “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물’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밀려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정반대의 죄책감과 수치심도 있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지아비로서 기본적인 돈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한약과 침을 싸들고 제주도로 날아가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대체 한의원은 어찌 하고 저렇게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니는지 알 길 없는 어린 딸은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누구도 매 순간 저 죄책감·수치심과 이 죄책감·수치심의 경계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해도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죄책감과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필요한 염치廉恥이기 때문입니다. 치러야 할 ‘큰 대가’는 각자 깜냥에 맞는 몫이 있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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