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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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대문 역시 치고 들어가야 했단 말인가? 왜 그들을 머나먼 곳에서, 무의미한 여행 끝에 폴란드의 가스실 문턱에서 죽게 만들려고 굳이 끌고 가 기차에 태우는 그 고생을 해야 했단 말인가?·······위로부터 강요된 선택은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괴로움, 최대한의 정신적·도덕적 고통을 짜내는 것·······‘적’은 죽어야 할 뿐 아니라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145쪽)

 

중국 유학의 준봉인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명나라 제10대 무종 정덕제의 총애를 받아 전횡을 일삼던 유근劉瑾을 탄핵했다가 도리어 장형 40도와 용장龍場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유근은 왕수인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자객을 보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왕수인이 얻은 깨달음을 용장오도龍場悟道라 하거니와 바로 여기서 그의 심학이 탄생하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조건을 마련해준(?) 유근은 그 뒤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무려 3,357번(4,780번, 심지어 6,000번이라는 기록도 있음)의 칼질을 당하는 형벌에 처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흔히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알고 있는 능지처사陵遲處死라는 형벌입니다. 죄인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도록 조금씩 살을 저며 내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극한의 고통을 가한다, 그러니까 극한의 고통을 가한 끝에 끝내 죽음을 놓는다는 이 절정의 잔학성은 아마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어두운 속성일 것입니다. 존재가 존재 자체를 “최대한의 괴로움, 최대한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기술이 진화의 정점일진대 이 진화는 존재윤리의 역방향으로 진행된 저주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일부러 폭력으로 끌어내어 열차에 태우고, 짐승처럼 싸게 하고, 벌거벗기고, 핥아먹게 하고, 점호를 받게 하고, 침대를 정리하게 하고, 몸에 문신을 새겨 넣음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해 죽이는 것은 오직 그렇게 하는 것 자체만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를 자행하는 자는 이를 즐긴다고밖에 볼 수 없는 정신질환 상태에 놓입니다.

 

개인이 홀로 이런 상태에 놓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집단이 한꺼번에 이런 상태에 놓이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특히 정념적인 성향이 강하여 트라우마에 취약한 집단에게는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목하 우리 앞에 그 어둠이 이미 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마음치유를 천명으로 삼은 의자醫者에게는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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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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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작업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1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문신의 상징적 의미는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즉, 이것은 지워지지 않는 표지標識(번역에는 표식이라 되어 있으나 너무나 흔히 범하는 잘못이라 정색하고 바로잡습니다.)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결코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히는 낙인이다. 너희들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이름이다. 문신의 폭력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고 순전한 모욕이었다. 바지에, 상의에, 겨울용 망토에 천으로 꿰매 붙인 숫자 세 개로 충분치 않았던가?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상이 필요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 속에 새겨진 자신의 형벌을 느끼도록, 말의 형태가 아닌 다른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흔히 젊은이들이 나에게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질문하는데 이는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143-144쪽)

 

중국 사대기서의 하나인「수호전」에는 형벌刑罰 문신이 등장합니다. 양산박 108호걸 가운데 무송, 양지, 임충 등 귀양살이를 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형벌 문신인 자자刺字형을 받았습니다. 죄상을 얼굴 혹은 팔에 새겨 넣어서 범죄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무엇보다도 수치심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명 공개'나 '전자 발찌'와 같은 의미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호전」에는 다른 문신도 등장합니다. 예컨대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은 9마리의 용을, 화화상花和尙 노지심魯智深은 꽃들을 온몸에 새겨 넣었습니다. 호걸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시하기 위해 문신을 새겨 넣는 것입니다. 사실 어찌 보면 형벌 문신에 대한 능동적 역발상의 표현이자 저항이랄 수도 있습니다.

 

옛 중국에는 형벌과는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닌 문신이 또 있었습니다. 노예에게 새기는 낙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증명서였습니다. 타인의 노예라는 것만큼 잔혹한 형벌이 다시 있을까요.

 

아우슈비츠 포로들에게 가해진 문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히는 낙인”이자 “살 속에 새겨진 자신의 형벌”이었습니다. 무고한 이들에게 가한 문신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고 순전한 모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그 마름들은 세월호사건의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에게 “놀러가다 사고로 죽은 애들”이라는 영원한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게다가 유족들에게는 “종북”이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또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희망한다는 말을 한 이효리에게는 “좌효리”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유족들도 이효리도 억울하고 분할 것입니다. 이 때 누군가 이들에게 ‘달리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프리모 레비에게 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단호한 반문을 기억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유족들도 이효리도 쉽사리 이렇게 반문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 그렇습니다. 지금 광기어린 폭력이 해일처럼 우리를 덮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공포와 불안의 노예로 마음에 문신 새겨진 채 형벌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분명히 이 문제는 정치 그 너머, 인간의 인간다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다움 그 너머, 인간 생명 자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내가 숨을 죽이면 내일은 누군가 목을 조이러 들이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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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수용소에서 하루에 한두 번 점호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호명하는 점호는 아니었다.·······점호는 날씨와 상관없이 실시되었고(물론 옥외에서)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다. 셈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탈출이 의심되면 심지어 스물네 시간이나 그 이상까지 이어졌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혹한의 날씨에는 노동 그 자체보다 더 심한 고문이 되었고, 저녁이면 노동의 피로에 고스란히 보태졌다. 점호는 무의미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인식되었다.(138-139쪽)

 

(2) 침대 정리는 일어나자마자 막사 전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모든 침대는 1, 2분 안에 정리되어야 했다. 광란의 순간이었다. 병사의 공기는 뿌연 먼지와 팽팽한 긴장감, 온갖 언어로 주고받는 욕설로 가득했다. ‘침대 정리’·······는 엄격한 철칙에 따라 시행되어야 할 신성한 작업이었다.·······정리와 규율의 상징이었다. 침대 정리를 잘못했거나 잊어버린 사람은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받았다.·······혹시라도 들쑥날쑥한 것들은 센티미터까지 맞춰가며 다시 옮겼다. 고통 이상의 이러한 정리벽은 터무니없고 기괴해보였다.(141-142쪽)

 

아우슈비츠가 독일 군대의 희화戱化라는 사실은 프리모 레비가 이미 밝힌 바입니다. 군대란 전쟁, 그러니까 생사를 건 싸움에 존재의의가 있는 조직입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반복해서 하는 것이니만큼 시공간적 일치, 그러니까 절대통제 아래 명령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는 전쟁을 위한 군대가 아닙니다. 군대가 아닌 포로들에게 이런 식의 통제를 가한다는 것은 오직 통제를 위한 통제, 그러니까 고통을 주기 위한 쓸데없는 폭력을 가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직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이 쓸데없는 폭력의 가닥은 둘입니다.

 

하나는 점호입니다. 점호는 통시적diachronic 일치, 그러니까 동일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어제하고 오늘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통제입니다. 일치가 확인될 때까지 시간을 무제한 사용합니다. 이런 폭력을 우리 현실의 정치공학으로 풀어보면 점호는 이데올로기 조작을 통한 통치의 영속성 추구행위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역사 왜곡입니다. 일본·중국은 가학적으로 하는데 반해서 대한민국 지배집단은 피학적으로 그 짓을 합니다. 독립혁명가들을 깡패·테러리스트로 몰고, 도리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부역한 매판인사들을 영웅·신으로 떠받드는 역사 교과서를 아이들한테 들이미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침대정리입니다. 침대정리는 공시적synchronic 일치, 그러니까 단일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기하고 저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간 통제입니다. 일치가 확인될 때까지 허용된 시간은 딱 1, 2분입니다. 이런 폭력을 우리 현실의 정치공학으로 풀어보면 침대정리는 시스템 조작을 통한 통치의 공고성 추구행위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헌법기관 왜곡입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이 3인, 대법원장이 3인, 국회가 3인을 뽑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여당 몫이 1인이며, 여야합의로 1인을 뽑는다는 데 있습니다. 대통령이 사실상 8인의 임명권을 행사합니다. 민주주의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인가, 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소수의 탐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차선의 장치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민주주의조차 못되는 제도를 유지할 이유는 더욱 없습니다. 복잡하고 이론적인 쟁점과 무관하게 이런 상태로 말미암아 사람이 떼거지로 죽어나가고 있다면 문제는 이미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이른 것입니다. 자살로 위장된, 사고로 은폐된 제노사이드를 정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를 스스로 포기한, 아니 거절한 지배집단은 본질상 범죄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비겁하고 치졸한 공작을 하면서 저들은 언제나 강박적으로 일치를 선동하고 협박했습니다. ‘국론통일’이라는 말이 일세를 풍미하더니 뒤를 이어 ‘국격’이 득세했고 지금은 ‘국기國紀’가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이 일사불란하게 통제되고 있습니다. 우리역사는 지금 점호 중입니다. 우리사회는 여기 침대정리 중입니다. 죽임의 행렬은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죽임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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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생활 첫 며칠 동안 숟가락이 없다는 사실은 이(강요된 나체 상태-인용자)와 똑같은 무력감과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작은 세부사항이지만, 결코 하찮지 않은 문제였다. 숟가락 없이는 매일 죽을 개처럼 핥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아우슈비츠가 해방되었을 때 우리는 창고에서, 막 도착한 강제이송자들의 짐 꾸러미에서 나온 알루미늄, 강철, 심지어 은으로 된 숟가락 수만 개 외에도, 완전히 새것인 투명 플라스틱 숟가락 수천 개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근검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굴욕감을 주려는 정확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137-138쪽)

 

「김선우의 사물들」첫 장 <숟가락, 날마다 어머니를 낳는>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김선우의 사물들」17쪽)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는 일과 먹이는 일에서 숟가락은 매우 결정적인, 그리고 고유한 중요성을 지닙니다. 다시 김선우를 인용합니다.

 

숟가락은 뜬다.·······뜬다는 것은 모신다는 것이다.·······무엇인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속에 넣을 때 우리는 반드시 고개를 숙이게 된다.·······숟가락은 공경을 내포한다.(「김선우의 사물들」13쪽)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는 일에 숟가락은 모심, 그러니까 공경을 더합니다. 먹는 일의 거룩함을 훼손함으로써 인간성을 훼손하려는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나치는 포로들에게 숟가락을 주지 않았습니다. “개처럼 핥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포로들에게 개처럼 먹도록 강요함으로써 저들의 “먹이는 일” 또한 함께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아차렸을 리 없습니다. 포로를 비인간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들도 비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저들이 깨달았을 리 없습니다. 폭력의 살상이 피해자에게만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해자의 착각일 따름입니다. 스스로를 악귀로 만들면서 키들거리고 있습니다.

 

숟가락을 빼앗는 것은 이렇게 함께 죽이는 일입니다. 숟가락을 주는 일은 그러므로 함께 살리는 일입니다. 김선우를 마지막으로 다시 인용합니다.

 

숟가락은 둥글다.·······손가락들을 가지런히 모두 붙이고 손바닥, 손목까지 전체를 사용하는 통합구조물이다.(.(「김선우의 사물들」12-13쪽)

 

오늘은 진료를 조금 일찍 마치고 평택으로 갑니다. 일전 굴뚝 위로 올라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의 아내 자영에게 ‘숟가락’ 하나 건네려 합니다. 비록 반짝이는 좋은 것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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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설에 대한 강압과 비슷한 것이 바로 나체에 대한 강압이다.·······공개적이고 집단적인 나체화는 되풀이되는 전형적 상황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역시 어떤 필요에 뿌리를 둔·······, 그러나 쓸데없는 과도함 때문에 모욕적인 하나의 폭력이었다.·······맨발에 벌거벗은 인간은 온몸의 신경과 힘줄이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속수무책인 먹잇감이다. 비록 배급받는 게 더러운 옷이라 해도, 밑창이 나무로 된 형편없는 신발이라 해도, 의복이란 보잘것없지만 필수불가결한 최소한의 방어다.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136-137쪽)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서 이 글을 읽고 또 읽으며 텅 빈 머리를, 휑한 가슴을 어쩌지 못한 채, 해가 기울도록 그저 멍하게 있습니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전라全裸의생각-몸뚱이가 ‘신경과 힘줄이 잘려나가’고 ‘짓이겨’진 듯합니다. 는적는적 슬프고 아픈 이야기 하나가 기억을 타고 흘러내려 옵니다.

 

오십 년 전 이맘때. 그 시절 겨울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추웠습니다. 밤은 더욱 어두웠습니다. 조그만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앵앵거리며 들려오는 무슨 이야기 소린가 듣고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웃음이 길어지자 소년의 아버지는 멈추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령 한 마디로 딱 멈추기에는 깔깔거림의 관성이 탱탱했습니다. 한 번 더 명령이 떨어지고서도 상황이 종결되지 않자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벽력같은 목소리로 다른 명령을 내렸습니다. “벗어!” 소년은 말의 의미를 미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벗으라니까!” 아버지는 재차 명령했습니다. 소년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습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하나둘씩 옷을 벗어나갔습니다. 몸을 가리는 것이 내의뿐인 상태일 때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 손길을 멈추었습니다. 아버지 말고 누나뻘 나이인 계모와 이복 여동생이 빤히 소년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다 벗어!” 내의를 벗기 전에 이미 들이닥친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소년의 넋은 쏜살같이 허공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허우적거리는 영혼을 꿰뚫고 마지막 명령이 날아듭니다. “나가!”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의 칠흑 속으로 쫓겨나면서 소년은 설핏 웃었습니다. 가뭇없이 사라진 존엄에 대한 역설의 애도일까요. 그 뒤 오십 년 동안 소년은 종종 그래서는 안 되는 자리에서 벌거벗고 있는 자기 몸을 홀연 확인하고 쩔쩔 매다가 깨는 꿈을 꾸고는 합니다. 소년은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어린 아들의 옷을 벗겼는지. 그 때 계모는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표정 없이 지켜보고 있었는지. 한 마리 짐승으로 아이를 내쫓고 따뜻한 방안에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의 생사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에게는 이미 없는 일입니다. 오직 소년에게만은 바로 엊저녁에 일어난 일로 남아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통찰대로 옷은 “필수불가결한 최소한의 방어”입니다. 그것을 박탈당한 채 내몰리는 모멸의 공간과 견뎌야 하는 치욕의 시간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무엇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런 공격을 하고 이런 고통을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히 이 비극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같은 옷을 결코 두 번 입지 않는 어떤 인간의 땅 한편에서 죽음 옷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자기 시신 거두어줄 사람에게 국밥 값 남기고 또 다른 인간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질문을 국화꽃 한 송이 삼아 여기 가만 놓으며 폭력으로 벌거벗겨진 모든 생명에게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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