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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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육체노동이었던 라거의 노동에서, 일반적으로 교양 있는 사람의 상황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나빴다. 육체적으로 힘이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농부였던 자신의 동료들에게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연장에 대한 친근함과 단련도 부족했다. 반면 날카로운 굴욕감과 박탈감, 바로 그·······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했다.(160쪽)

 

문맥을 살펴보면 마지막 문장 선두에 서 있는 ‘반면’이란 말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앞의 두 문장이 지식인의 육체(노동과 연장)에 대한 둔감함을 말하고 마지막 문장이 존엄의 상실에 대한 민감함을 말한 것이라 하더라도 라거의 극단적인, 그러니까 육체노동 일색이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한 쪽의 둔감함이 다른 한 쪽의 민감함을 가파르게 증가시켰을 것임에 틀림없으므로 ‘반면’보다는 ‘그럴수록 더’가 들어서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식인 아닌 사람들이 비교적 더 잘 견디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인이기 때문에 더욱 “날카로운 굴욕감과 박탈감, 바로 그·······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하는 바로 그 감수성이야말로 지식인의 지식인 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탱맑은 시인 김선우의 표현을 빌어서 말해 보자면 “가장 먼저 슬퍼하고 가장 나중까지 슬퍼하는” 사람이 바로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식인이 아닌 사람들보다 먼저, 더 날카롭게 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하려면 그들이 지닌 통속한 삶의 능력이나 기술에서 뒤진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식인이 타고난 것이 아닌 한 통속한 삶의 성공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에 물들고서야 어찌 잃어버린 존엄에 괴로워할 것입니까. 아니, 존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 성공이란 다름 아닌 권세 있음과 돈 많음입니다.

 

돈이 신이고 권세가 종교인 세상에서 지식인은 한사코 무신론자여야만 합니다. 무신론자의 삶은 등 시리고 배고픈 삶입니다. 제 등 시림으로 제 배고픔으로 새끼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하는 어미처럼 지식인은 세상을, 시대를 키워내는 양육자여야 합니다. 특히 자본과 권력이 대놓고 새끼들 죽이는 이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극진한 어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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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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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지식인이라는 말이 먼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가 제시하는 정의는 전형적이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다.

 

·······지식인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 체계 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연관된 분야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이거나 철학적이다.·······

 

  이러한 정의는 내가 보기에 쓸데없이 제한적인 것 같다.·······‘지식인’이라는 용어 속에, 예컨대 수학자나 동식물 연구가나 과학철학자도 포함시키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이 용어의 범위를 일상의 직업과 상관없이 교양 있는 사람들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교양 있는 사람의 문화는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 때문에 살아 있다.(158-159쪽)

 

프리모 레비는 장 아메리가 쓴 같은 제목의 글에 대한 “개괄이자 주해인 동시에 논의이며 비평”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인문학도로서 스스로의 지식인적 정체성을 의식하고 산 장 아메리의 삶이 아우슈비츠에서 무엇이었는지 살피면서 자신의 삶과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고찰하려는 것입니다.

 

제목만 보면 지식인이 아우슈비츠 안에서 과연 ‘지식인의 책무’를 다했는가를 묻는 것 같지만 실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식인이라는 것이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이 다급하고 단순한 실용적 질문은, 아우슈비츠 상황에서, 우리가 흔히 떠드는 ‘지식인의 책무’라는 말이 얼마나 한가하고 느슨한 것인지 폭로하고 있습니다.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마다 지식인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질은 같으나 급박성과 위험성이 훨씬 덜한 우리 상황에서 과연 지식인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어오는 질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프리모 레비의 표현처럼 “일상의 직업과 상관없이 교양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전공도 대학도 기준이 아닙니다. “교양” 여부가 기준입니다. 교양은 무엇입니까.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

 

이것이 사전적 의미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 사전적 의미를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

 

사전은 품성을 말하지만 프리모 레비는 행위를 말합니다. 둘을 결합하면,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지니게 된다, 거꾸로 하면,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가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 관건으로 다가오는 것은 과연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이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만’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고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부터’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여 사회 전체로 번져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읽겠지요. 그렇습니다. 지식인은 사회의 모자란 상태를 넉넉하게 채우고, 어린 상태를 자라나게 키우고, 잘못된 상태를 옳게 바로잡는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일을 수행하는 사람만이 지식인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이 모자랍니까. 모자 란 것투성이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공존, 그러니까 함께 살고자 하는 기운입니다. 그 무엇보다 상위 0.1%의 매판 과두들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국가의 부를 독점함으로써 기본적 평등이 송두리째 무너졌습니다. 지배층의 이런 행위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사회 전반을 불평등의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이라면 이 모자란 상태를 채우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이 어립니까. 어린 것투성이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사회·역사에 대한 민중의 인식 상태입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지금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사회구조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거의 전혀 모른 채 맹목의 깊은 골짜기로 미끄러져갑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이라면 이 어린 상태를 키우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된 것투성이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국가적 폭력입니다. 사적 폭력에서 공동체 구성원을 지켜야 할 국가가 도리어 앞장서서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용병 집단을 대놓고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공포와 불안, 급기야 우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이라면 이 잘못된 상태를 바로잡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그렇다면 이른바 지식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모자라고 어리고 잘못된 상태가 더욱 격화되는 것을 보면 이른바 지식인들이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아우슈비츠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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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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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다.(152쪽)

 

어린 시절 계모나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그 때마다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둥둥 떠다니기고 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쓸데없는 폭력> 장을 읽으면서 자꾸 그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아니, 또다시, 마음이 몸을 떠나 둥둥 떠다니기고 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낭창낭창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옮기는 일이 힘듭니다. 몇 시간을 그저 망연히 앉아 있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뒤로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어제, 그리고 오늘, 그야말로 바닥을 칩니다.

 

쓸데없는 폭력, 이것은 필경 폭력의 극한일 터입니다. 오직 고통을 줄 목적으로, 그러니까 오직 “인간 이하로 비하”하기 위해 가하는 폭력이니 말입니다. 구태여 유용성을 찾는다면 가해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하는 것인데 사실 이 유용성은 가해자 스스로 “인간 이하로 비하”되기 위한 것이므로 유용성을 획득하는 찰나 그 유용성이 파괴되고 마는 무의미한 개념입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에게 ‘유용함’이 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냥, 쓸데없는 폭력은 그 쓸데없음으로 죄악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폭력일 따름입니다. 거기서는 가하는 자나 당하는 자나 마음이 사라졌으니 사람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사회의 최근 7년, 특히 2년은 쓸데없는 폭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권력과 자본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는’ 복마전이었습니다. 목하 판은 더욱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근본 가치를 모조리 희화戱化하며 저들은 마침내 스스로도 미쳐가고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자기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습니다. 광란의 질주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사이 국밥 값을 남기고 한 독거노인이 죽었습니다. 마지막 월세를 남기고 세 모녀가 죽었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26명이 죽었습니다. 단원 아이들 250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체 어떤 유용성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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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나는, 어리석으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인 폭력의 극단적 예로서 인간의 신체를 마치 물건처럼, 곧 아무 것도 아닌 것인 양 자의적으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다룬 무자비한 사용에 대해 좀 더 언급하고자 한다.·······

  ·······라거나 가스실로 보내진 여성들의 잘린 머리카락·······은 독일의 몇몇 섬유기업이 구입해서 침대 카버나 다른 산업용 직물로 제조하는데 사용 되었다.·······이윤을 얻으려는 동기보다 잔학한 폭력의 동기가 우위에 있었·······다.

  하루에 수톤 씩 화장터에서 나온 인간의 재는 대개 치아나 척추 뼈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습지대를 메우기 위해, 목조 건물의 벽 사이에 넣을 단열재로, 심지어 인산비료로 말이다. 특히 수용소 옆에 위치한 SS군의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자갈 대신 사용되었다(150-151쪽)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 나는 세상에 왔습니다. 존엄한 삶을 살던 어느 날 영문 모른 채 잡혀 기차에 태워졌습니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주먹에 맞으며 형언할 길 없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쭈그려 앉아 용변을 보았습니다. 벌거벗겨진 몸에 문신이 새겨졌습니다. 개처럼 혀로 죽을 핥아먹었습니다.

  마침내 가스실에서 숨이 멎었습니다. 차가운 육신을 빠져나와 떠돌다가 문득 살인자들이 머리카락을 채취해 침대 카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육신을 태우고 남은 재를 살인자들이 노상 밟고 다니는 길바닥에 자갈 대신 뿌리는 것을 봅니다.

  죽어서도 그 밑에 깔리고 밟히는 광경을 보며 통곡합니다. 울고 또 울다 이윽고 칼을 듭니다. 심장을 향해 힘껏 찌릅니다. 칼은 바람소리를 낼 따름입니다. 돌연 칼끝을 돌립니다. 그 형상을 따라 나를 창조했다는 신을 향합니다. 거기도 바람소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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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에서 노동은 순전히 박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 실제로 생산 목적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노동이란 말의 일반적 의미에서 봤을 때 체제의 비천한 적수들은 노동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노동은 고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라거의 SS들은 교묘한 악마라기보다는 둔감한 야수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도록 교육받았다.·······‘적’에게 굴욕감을 주고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것이 날마다 하는 그들의 업무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146-147쪽)

 

나고 죽는 것, 숨 쉬는 것, 성을 나누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하는 것은 인간에게 범주적인categorical 거룩함입니다. 이 가운데 일하는 것, 그러니까 노동은 특별히, 거의 유일하게 인간의 사회적 속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노동의 거룩함이 가장 숭고하고 역동적인 사건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한편, 거대하고 광포한 지속성을 지닌 폭력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기도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생산을 향합니다. 생산은 생명의 연속과 확산을 향합니다. 생명의 연속과 확산은 노동의 거룩함이 번져가는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생명의 연속과 확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노동은 그 자체로 고통이며 폭력입니다. 아우슈비츠의 노동이 그랬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노동이 또한 그렇습니다. 생명을 훼절하고 위축시키는 노동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가장 참람한 거역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참람한 거역으로서 노동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보다 더욱 해괴한 거역이 있습니다. 자칭 거룩함의 본진인 종교가 거룩함을 훼절하고 위축시키는 데 앞장선다는 경악할만한 사실 말입니다. 종교 없이 거룩할 수는 있지만 종교가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거대종교의 노동인 예배·미사·예불과 그 연장에 있는 종교인들의 사회적 실천이 그 어떤 거룩함을 빚어내고 있습니까.

 

 

내일이 이른바 성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이 성탄을 전유하도록 명명한 것 자체가 이미 거룩함의 파훼이거니와 더더구나 이 땅의 교회, 특히 개신교가 세속의 힘과 돈에 무릎 꿇은 상황에서 오늘,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의 흥청거림부터 내일 성탄 축하 의식까지, 거기 거룩함이 깃들 수 있을까요. 거룩함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종교적 노동이 폭력이며 고통이란 사실을 저들이 알고 있기는 한 걸까요.

 

30대에서 40대를 넘어오면서 제게는 삶의 일대전환이 있었습니다. 한의학도로 살기 위해 기독교 성직의 길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직후 제 직업은 우유배달이었습니다. 교회 밖 첫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는 우유 리어카를 점검했습니다. 교회 밖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 저는 우유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배달 끝나 마지막 빈 박스를 리어카에 내려놓는 순간 거기서 저는 아기예수를 보았습니다. 비로소.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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