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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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상식은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데 저항했지만, 그 상식의 벽을 허무는 일이 철학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철학자는 괴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데카르트의 논리 옆에 SS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지식인은·······그 속성상 권력의 공범이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권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은·······어떤 국가든 국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정당화한·······다.(174-175쪽)

 

마음병 치유의 요체는 현실 인정입니다. 일어난 것을 일어난 것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인정은 옳다고 여기는 사적 긍정이 아닙니다.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공적 승인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옳든 그르든 정당하든 부당하든 내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감성으로 이성으로 의지로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현실reality 인정은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은 풀이로는 치유의 실재the Real를 일구어낼 수 없습니다. 치유의 실재는 사물(구조)이나 사건(운동)이 지니는 전체성에 터하여 구현되기 때문에 긍정하기 싫은, 승인하기 싫은 어두움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꿰뚫어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정을 거부하거나 허투루 하였을 때 사이비 치유가 준동합니다. 목하 치유 마케팅을 주름잡고 있는 「시크릿」류의 긍정주의 ‘힐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기 연예인, 그에 버금가는 종교인들이 대중매체에 나와 호들갑스럽게 뿌려대는 ‘힐링’ 이야기들은 대부분 부풀린 신변잡담 아니면 금방 들통 나고 말 거짓말 수준의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마음병 치유 문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치 치하의 수많은 지식인이 현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의한 권력을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지식인의 이런 곡학아세曲學阿世 사례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지식인은 그 속성상 권력의 공범이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권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은 어떤 국가든 국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정당화한다.

 

오늘 아침 유명한 승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내용이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 이야기나 하고 남 일에 거품 문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려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풍요로워지는 방법 제시도 가관이거니와 ‘정치’와 ‘남 일’에 대한 천박한 인식은 ‘기도 안 찰’ 정도입니다. 대학교수이기조차 한 이런 백치 부역자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현혹시킵니다.

 

승려 교수에게 정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중생제도를 생애의 의무이자 보람으로 삼은 승려가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중생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이야기를 연예인 이야기와 동급으로 치부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능동적 ‘승인’입니다. 우리사회는 그를 국민멘토라고 부릅니다. 오호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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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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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예술과 시는 그것들이 추방단한 곳을 해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포로 누벼지고 권태로 이루어진 ‘그곳’의 일상생활에서는 집과 가족을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건강에 좋으며, 마찬가지로 이성과 예술과 시를 잊어버리는 것이 건강에 좋다.·······

  이러한 일에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 교양 있는 사람들보다 더 소질이 있었다. 그들은 “이해하려 하지 마라”라는 라거에서 배워야 할 첫 번째 현명한 격언에 먼저 적응했다. 거기 그 현장에서 이해하려 하는 행위는·······쓸데없는 노력이었다.·······논리와 도덕은 비논리적이고 부도덕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했다. 일반적으로 교양 있는 인간을 급속도로 절망으로 이끈 현실 거부는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짐승-인간들은 수없이 많았다. 세련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면 더더욱 그 문화를 던져버리고, 단순화되고 야만적으로 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것을 나는 보았고 또 묘사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은 이유를 묻는 쓸데없는 고문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었다.(172-173쪽)

 

인간은 태초에 인간으로서 존재being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질문으로서 생성becoming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려면 오직 질문하는 인간homo interrogatorius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질문하는 인간과 질문하지 않는 인간. 질문하는 인간만이 참 인간입니다. 이 참 인간이 지식인입니다. 질문하지 않는 인간은 사이비 인간입니다. 사이비 인간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뉩니다. 악마-인간과 짐승-인간.

 

프리모 레비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짐승-인간은 “그 문화를 던져버리고, 단순화되고 야만적으로 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문화란 “이성과 예술과 시”이며 “논리와 도덕”입니다. 바로 질문의 근거이자 소산입니다. 하여 짐승-인간은 재차 이렇게 정의됩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

 

구약 성서에 나오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권리를 넘기듯 이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대가로 질문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의문문 대신 신봉하게 된 것은 다음의 금지명령문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자들이 바로 악마-인간입니다. 악마-인간에게는 폭력 프로그램만이 입력되어 있을 뿐이므로 질문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폭력을 통해 절대소수의 악마와 절대다수의 짐승으로 양극화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상과제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말만을 투명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무리가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적에게 질 것”이라며 더욱 강고하게 모든 질문을 봉쇄할 것임을 재천명하고 나섰습니다. 생명 살릴 골든타임은 말아먹고 경제 살릴 골든타임을 말하는 악마의 입으로 99%에게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에 순응한 자들은 즐겁게 “행복”과 “힐링”을 지절거리며 짐승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용소 안의 행복과 힐링이 마약임을 모르는 한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옆 사람과 공유하는 자만이 인간입니다. 악마-인간과 짐승-인간 사이, 지식-인간, 그 이름이 바로 지식인입니다. 지금-여기서 인간은 오직 지식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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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슈비츠에서 문화가 갖는·······유리한 점들은 정말 없었던가?·······

  내게도 문화는 유용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끔은 아마도 예기치 못한 숨은 방식으로였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었고 어쩌면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실용적인 개념들의 축적과 함께, 화학과 인접학문들로부터 유래하지만 더욱 폭넓게 응용할 수 있는 정신적 습관들의 막연한 자산을 학업으로부터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라거에 가지고 들어갔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직업으로부터 한 가지 습관을 얻었다. 곧 우연히 내 앞에 놓인 대상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대상은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하다.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양식이었다. 몇몇 사람들은·······나의 호기심을 거리를 두는 자세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그 양식은 나의 일부분을 살아있게끔 유지하는데 확실히 도움을 주었고, 또 나중에는 내가 사고하고 책들을 집필할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해주었다.·······‘자연주의적’인 이러한 태도·······는 화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내게 라거는 일종의 대학이었으며 우리에게 주변을 돌아보고 인간을 가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디 냉소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166-171쪽)

 

마음 치료를 할 때 필요에 따라 종종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로 특정 인물에게 받은 상처가 끈질긴 원망과 분노로 남아 있는데 그 상대방은 인식 없이 요지부동일 때입니다.

 

“무심코 운전하고 길을 가던 중 뒤에서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납니다. 돌아보니 어떤 다른 차입니다. 그럼 대뜸 그 운전자에게 화를 냅니다. 그렇지요?”

“예!”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돌입니다. 그럼 그 돌에게 화를 내나요?”

“.......”

 

돌한테 감정이 끼어들 여지란 없습니다. 상처를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의 SS든 카포든 동료 포로든 감정을 교류할 만한 상태의 ‘사람’이 아님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아차린 프리모 레비의 감각 이성은 화학이란 학문이 가져다준 자연주의적 훈습을 통해 마련된 것입니다. 사람이지만 표본일 때, 그것은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므로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느냐 하는 문제는 아우슈비츠 상황에서라면 가히 결정적, 아니 치명적인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어쩌면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두고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설혹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한 사람의 삶에서 운명적으로 생겨나 시시각각 그의 생사와 결합해 들어가는 “습관”의 무게는 어떤 진리와 깨달음보다도 육중합니다.

 

스스로를 아우슈비츠에서 살려낸 이 자연주의 지식인의 삶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살려내고 싶은 지식인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대한 전언傳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연히 내 앞에 놓인 대상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대상은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하다.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양식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대상, 그러니까 국가조직을 이용해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매판독재반통일 세력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 기본자세.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한 저들을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하는 자연주의 호기심. 이 과정에서 발휘되는 도저한 주의 깊음, 냉정함, 결곡함, 곡진함. 바로 이것이 생사를 가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들을 향해 분노와 원망을 짓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 투입은 저들을 ‘표본’ 이상의 존재로 전제했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인간으로서 지닌 생명감각과 윤리의식에 기대어 하는 행위입니다. 이미 저들은 시스템 뒤에 숨었습니다. 더 강한 자들은 시스템 위에서 초월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감정도 상처도 닿지 않는 세계를 향해 소리치고 울부짖은 결과가 스스로의 소진, 개죽음의 공포 이 둘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자연주의 지식인, 끽긴한 필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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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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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도·······언어의 단절 때문에 괴로웠다·······하지만 그의 언어는 독일어여서·······다른 방식으로 괴로움을 겪었다.·······정신적인 괴로움이었다.·······자신의 언어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는 괴로워했다.·······라거의 독일어는·······지식인에게는 알아듣긴 하지만 말하려 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야만적인 은어였다.(163쪽)

 

제법 이른 아침 시간인데 90세 어르신 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 동안 노인성현훈(어지러움)을 치료받으시던 분입니다. 송구영신 인사를 하러 30년 아래인 제게 먼저 오신 것이었습니다.

 

“갑오년 한 해 원장님 후의厚意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오는 을미년 새해 의업 창성을 기원합니다.”

 

90노인의 고색古色 인사를 받다 화들짝 떠오른 말.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 되면 못 가리.”

 

갑오·을미의 언어적 연상이 일으킨 기억작용임에 틀림없습니다. 갑오년에 부패한 내정을 혁파하여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면 이듬 해 을미년을 허송하다가 그 다음 병신년이 되면 나라와 백성 모두가 병신(불구)이 된다는 뜻을 담은 저 갑오년, 그러니까 1894년 농민혁명 당시의 노랫말입니다. 갑오년을 넘기면 안 된다는, 여기서 시간을 멈춰 세우고 기어이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뜻을 이루자는 견결한 의지가 민중적 언어유희에 실려 비장과 골계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120년 전 갑오년의 이 노랫말이 120년 후 갑오년 마지막 날인 오늘 해질녘, 격한 다급함으로, 발끝을 태우는 안타까움으로 생생히 다가옵니다. 저 갑오년 우금치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가 이 갑오년 맹골수도에서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갑오년 불리다 스러진 노래가 이 갑오년 다시 불리다 스러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120년 전 어떤 말이 오늘 우리 혀에 이렇게 착착 감기는데 반하여 오늘 우리 귓전을 맴도는 어떤 말은 우리 입을 얼어붙게 합니다. 세월호사건 이후 260일 동안 이 나라 힘 가진 자들이 쏟아낸 말들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알아듣긴 하지만 말하려 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야만적인 은어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건이므로 당연히 국고에서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힘 가진 자들이 야합하여 “야만적인 은어”를 만들어 본질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사고.

 

국민성금으로 보상.

 

2014년 갑오년에 수용소 국가 권력이 만들어낸 “야만적인 은어”들의 결정판입니다. 이 “언어의 단절”, 그러니까 공동체의 파괴를 그대로 두고서야 우리가 어찌 이 갑오년을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2014년 12월 31일인 사람은 야만인입니다. 2014년 260번째 4월 16일 따름인 사람이 바로 참 지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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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12-3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ri_che님!

2014년 올 한해도 좋은 말씀과 글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을미년 새해에도, 강건하시고 건강하세요!

bari_che 2014-12-31 22:54   좋아요 0 | URL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제나 같은 날 늘 새로워지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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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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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별도로 교양 있는 사람에게는 막사 생활 역시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홉스적 삶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당국으로부터 가해진 폭력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런데 동료들로부터 받은 구타는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불규칙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문명화된 인간은 여기에 좀처럼 대응할 줄 몰랐다.(162쪽)

·······아메리는 또 다른 에세이에서 핵심적인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몸집이 거대한 폴란드인 일반 범죄자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는 동물적 반응에서가 아니라 라거의 뒤틀린 세계에 대한 이성적 저항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되돌려주었다. “나의 존엄은 전부, 그의 턱을 향한 그 주먹에 있었다. 결국에는 상대의 무자비한 구타에 육체적으로 훨씬 약한 내가 굴복했지만, 그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맞아 아팠지만, 나는 나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이러한 선택이 그로 하여금 삶의 기쁨을 발견할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아니 살아갈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그를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온 세상과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순 있지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곧 패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1978년 잘츠부르크에서 있었던 아메리의 자살은 모든 자살이 그렇듯이 분분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면 폴란드인에 맞선 이 일화가 그의 자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준다.(163-165쪽)

 

폭력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마도 인간에게 영원한 아포리아일 것입니다. ‘인간이기 위하여’ 화두로 잡는 문제 가운데 폭력 문제만큼 쉽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폭력을 제압하거나 응징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또 하나의 폭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폭력이 폭력에 맞서는 방법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비폭력으로 대응하다가 맞아서 목숨을 잃었을 경우, 이를 인간이 자기 존엄을 지키는 행위라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완벽한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문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 요청의 진리 빼고, 그 다음은 모두 진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실의 문제입니다.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진심은 객관적 기준이나 방향이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의 진심은 또 다른 어떤 이의 진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어긋남은 인간에게 숙명적인 것입니다. 아메리의 패배를 무릅쓴 혼신의 되돌려주기는 레비의 “절대적인 열등함” “타고난 무능력”(164쪽)과 다른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하여 레비의 아메리 비평은 또 다른 비평을 기다려야 합니다.

 

레비는 아메리의 선택이 “그로 하여금 삶의 기쁨을 발견할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아니 살아갈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그를 이끌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이런 비평은 곧바로 아메리의 자살과 연결됩니다.

 

폴란드인에 맞선 이 일화가 그의 자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준다.

 

결국 그는 아메리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선택이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즉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고찰한 것입니다. 그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듯 이 고찰에서도 최선을 다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그 최선의 연장선에서 아메리의 죽음과 똑같은 죽음이 그 자신에게 들이닥쳤다는 사실입니다. 레비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으므로 의당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지 않았을 터입니다. 어떻게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만일 자살의 의미가 다르다면 레비는 살아갈 능력이 충분히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인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삶을 대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메리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인문학도입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안목은 스스로 밝혔듯 “인문주의적”(158쪽)일 것입니다. 레비는 아시다시피 화학을 공부한 자연과학도입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안목은 스스로 밝혔듯 “자연주의적”(170쪽)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수용소에서의 우리의 기억은 중요한 세부 사항들에서는 대부분 일치하지만, 흥미로운 한 가지 사항에서는 달랐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총체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늘 주장해온 내가 그의 존재를 잊었다는 사실이다. 비록·······유명했던 카를로 레비와 나를 혼동하긴 했지만, 그는 나를 기억한다고 단언했다. 아니 우리가 몇 주 동안 같은 막사에서 지냈다고 했다.(157쪽)

 

레비가 수용소에서 보기 드문 이탈리아인이면서도 화학자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아메리보다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몇 주 동안 같은 막사에서 지낸 동료를 기억하느냐 여부는 아무래도 두 사람의 근본적인 안목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연주의적 안목은 기본적으로 실험적 관찰에 근거를 둡니다. 실험적 관찰은 ‘표본’(171쪽)이 그 대상입니다. 표본에 대한 ‘호기심’(171쪽)은 인과적 알고리즘을 따라갑니다. 인과적 알고리즘을 벗어난 것은 실험자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인문주의적 안목은 기본적으로 통찰에 근거를 둡니다. 통찰은 대상을 사물화하지 않습니다. 사물화하지 않은 대상은 인과적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벗어난 것도 통찰자의 시야에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패배가 확실”한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자연주의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패배가 확실”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뒤틀린 세계에 대한 이성적 저항”을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는 것은 인문주의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둘은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달라서 둘 다 필수불가결합니다.

 

저는 아메리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선택이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즉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한 레비의 고찰에 일부 동의하고 일부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메리의 선택이 자살과 연결된다는 고찰에는 동의하지만 그 선택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이어서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는 고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일 레비의 이 고찰이 옳다면 유연하고 타협적인 선택을 하여 살아갈 능력을 유지한 그 자신은 어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입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과를 놓고 볼 때 아메리가 극단이라면 레비도 극단입니다. 아닙니다. 둘 다 극단이 아닙니다. 서로 자기답게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구태여 표현한다면 아메리는 ‘종합’의 결과 죽음을 택한 것이고 레비는 ‘분석’의 결과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폭력 앞에서 아메리가 되든 레비가 되든 각자 자기 진실에 따라 결단할 것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수용소적 폭력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폭력 앞에서 내가 지식인인가, 묻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지식인이어서 이 폭력 앞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진실에 걸맞은 결단을 내리는 자가 바로 지식인입니다. 그 지식인에게 죽음은 이미 삶 한가운데 들어와 있습니다. 이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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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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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17: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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