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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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H. 박사의 편지> ·······물론 당신은 왜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나, 왜 그 후 우리는 그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했나?, 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시겠지요.·······히틀러가 우리에게 수상쩍어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가장 덜한 악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모든 아름다운 말들이 기만이고 배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처음에 깨닫지 못했습니다.·······우리가 범죄자이자 배신자를 타고 가고 있다고·······그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배신당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죄도 돌릴 수 없지요. 오로지 배신한 사람만이 유죄지요.

이제, 더 어려운 문제인 유대인들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의 문제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러한 증오는 결코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전 세계의 유대인들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나라로서 마땅히 간주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리고 책에서 읽은 한에서는 히틀러 통치 기간 내내, 또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에 대한 자발적 모욕이나 공격은 결코 단 한 건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216-217)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본문 반박 글> 히틀러·······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이 남자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극도로 명확한 생각을 가진, 일관성 있는 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 생각들을 바꾸지도 않았고 결코 숨기지도 않았다. 그에게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당연히 그의 생각들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219)

 

<프리모 레비의 답장 편지> 당신이 단언한 것 중 가장 대담한 것은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인기가 없었다는 대목입니다. 반유대주의는 애초부터 나치 신조의 근간이었습니다.·······히틀러의 그 어떤 글, 어떤 연설 속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유대인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민족이 어떻게 유대인을 독일의 첫 번째 적으로 정의하고유대의 히드라를 목 졸라 죽이는 일을 정책의 첫 번째 목표로 삼은 당에 투표하고 그 사람을 칭송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발적 공격과 모욕에 대한 당신의 말 자체가 모욕적입니다. 수백만의 죽음 앞에서 자발적인 학대에 대한 문제였는지 아닌지를 논한다는 것이 제게는 한가롭고 혐오스러운 일로 보입니다.(220)

 

T. H. 박사, 당시 독일 지식인의 대표단수일 법한 이 사람의 편지는 부역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배신에 모든 죄악을 뒤집어씌우는 비겁한 억지. 수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들에게 가장 우호적이었으며 자발적 모욕이나 공격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의도적 무지. 이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통렬한 반박은 사실 불필요한 친절이었습니다. T. H. 박사가 정말 몰랐었다면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고 이런 식의 편지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알면서도 이런 편지를 쓴 것이므로 답장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을 리 없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진실은 프리모 레비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라는 이름 대신 대한민국 매판 과두나 마름 이름 써 넣고 유대인 대신 단원고등학교 아이 이름 써 넣으면 이 편지들은 그대로 우리사회 부역지식인 아무개와 유민 아빠 김영오씨 간의 편지가 됩니다. 처음부터 배신자 따위는 없었습니다. 매판 세력의 다양하고 현란한 야합이 있었습니다. 우연한, 그러니까 비자발적인 교통사고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인 대량학살사건이었습니다. 죽이고도 그 뒤에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모욕하고 공격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발적으로 모욕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신당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죄도 돌릴 수 없다고 억지를 쓰며 자발적 모욕이나 공격은 결코 단 한 건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무지를 우깁니다. 프리모 레비의 진실이 다시 한 번 프리모 레비 자신에게 되돌아왔듯 김영오씨의 진실이 다시 한 번 김영오씨 자신에게 되돌아올지라도 끝까지 거짓을 통박하는 외침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자신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라도 기어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역지식인한테만 귀가 달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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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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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세 번째 형태의 질문에 이르렀다. 국경이 폐쇄되기 전에, 덫이 철컥 물기 전에, 사전에도망가지 않았나? 라는 질문이다.·······(196)

  일이 다 벌어진 뒤의 뒤늦은 깨달음과 고정관념들을 경계해야 한다.·······위협에 직면한 인간은 준비를 하고, 저항하거나 달아난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위협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발적 불신과 정신적 억압, 위안을 주는 진실·······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날의 두려움은 당시의 두려움보다 덜 혹은 더 근거 있는 것인가?·······왜 우리는·······‘사전에도망가지 않는가?(201-203)

 

비선실세논란의 당사자인 한 인사가 지난번 의문의 7시간알리바이를 대는 과정에서 그 때 역술인과 함께 있었다고 진술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어디 그 인사뿐이겠습니까. 이 나라 권력과 재력의 최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역술인의 점괘에 의존해 중대한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작-, 이 표현은 역술인 자체를 향한 폄사貶辭가 아님을 밝혀둡니다-점괘 하나에 국가와 거대 기업의 운명이 좌우된다니 참 익숙하고도 기이한 일입니다. 어찌 보면 웃픈일이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서늘한 진실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만 제대로 알려준다면 아니 할 말로 그것이 사주풀이든 공수든 괘념할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과연 그것들이 제대로 미래사를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꽤 오래 전 어느 유명한 역술인의 간청(!)으로 그와 마주앉은 일이 있습니다. 제 앞에서 분명히 접신spirit possession 상태로 들어갔지만 그는 도무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신당으로 다시 들어가 20여분 동안 의식을 행하고 나온 뒤에도 공수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접신 상태를 푼 다음 그가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알아 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아마 그 할아버지란 그 역술인의 수호신장’(몸주)일 것입니다. 그 몸주의 수준, 그러니까 영적 위계로는 감히제 영적 시공 속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의 버림받은 억조의 영혼을 모두 모시고 살아서 그럴 것이라 웃으며 말해주니 과연 두려운 분이 라며 낯빛을 바꾸었습니다. 보편적 진실에 부합하든 아니든 이 일로 말미암아 저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충족이 대개 어떤 차원에서 진행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사에서 무슨 일이든, 앞두고 있거나 겪고 있을 때는 그 일에 묶여 흘러가기 때문에 시간을 꿰뚫는 통찰이 불가능합니다. 다 겪고 나야 비로소 아, 그랬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옵니다. 이 깨달음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단단한 논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 사후논리가 자기 자신에게는 후회를 끌어들입니다. 타인에게는 훈계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둘 다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되고 아무리 반복해도 잘 개선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사후에 인과적·선형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인과적·선형적으로 재구성하면 그 시간은 일종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공간으로 변한 시간은 통제와 복제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에 권력이 개입합니다. 아니 본디 권력이 바로 이 음모를 꾸미고 공작을 진행합니다. 개인의 후회를 사회화하고 사적인 훈계를 국가화합니다. 후회하는 대중을 국가가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훈계함으로써 대중의 삶은 개선되지 않고 극소수 지배집단의 이익만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사후 논리에 입각한 질문-왜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는가? 왜 사전에 도망가지 않았는가?-은 의문문의 형태를 띤 비난과 공격의 평서문입니다. 아니, 이렇게 된 것은 너희들의 잘못 때문이므로 앞으로도 쭉 이렇게 가라는 명령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후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무지가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궁금증이 탐욕·공포(불안)와 뒤엉켜 손쉬운 해법을 찾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일 앞에서 점괘를 구하는 것은 급하다고 고리의 사채를 끌어다 쓰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이 부족하다고 깡패를 사서 형제를 제압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수를 쓰더라도 알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큰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이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까지 포함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을 공포(불안)의 대상으로 삼고, 안다는 것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는 한 악무한에 갇힐 뿐입니다. 모름을 활짝 열어둔다면, 앎을 짐짓 닫아둔다면 점괘의 노예가 되지도, 사후 논리의 포로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속절없이 오늘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뭇없이 진실의 증거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알 수 없는 내일이 엄습해옵니다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탐욕을 내려놓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사전에도망가지 못하는 것은 269번째 2014416일을 살고 있는 우리의 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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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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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금과 탈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반란의 결합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반란의 역사, 그러니까 ‘소수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억압받는 다수’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그만큼 다양하고 비극적이다.·······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기념물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자신의 무거운 사슬을 끊는 노예의 상像은 수사적인 것이다. 그의 사슬은 좀 더 가볍고 느슨한 구속에 메인 동료들에 의해 끊어진다.

  ·······모든 진정한 봉기들·······의 원동력인 분노와 의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물론 억압이 존재해야 하지만, 적당한 정도이거나 비효율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라거에서의 억압은 극단적 수준의 것이었고·······포로는 고갈의 한계에 와 있었다. 굶주리고 쇠약하며 상처로 가득했고·······해진 넝마 같은 인간이었다.·······현실세계에서 혁명은 넝마들로는 되지 않는다.(194-196쪽)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에서 조난당해 동사한 경우 벌거벗은 시신이 있다 합니다. 극한의 추위를 도리어 더위로 인지하는 방어 '오작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잠시 먹먹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병 치유를 하다보면 본질상 이와 동일한 현상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의 고통이 극한에 달할 경우 그것을 쾌락으로 전도시키는 병리적 방어 적응입니다. 이를 “고통체”라 이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할수록 그 고통에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인간에 대한 과대하거나 안이한 평가의 소산일 따름입니다. 이유도 의미도 모른 채 더해만 가는 고통을 끝없이 감내해야 한다는 당위의 근거도 모호하지만 극한에 이르면 마침내 저항하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의 근거는 더더욱 모호합니다. 이 모호함의 틈새로 당위보다 먼저 절망이, 기대를 뒤엎으며 무기력이 들이닥치는 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바깥사람들’의 경박한 인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한 여고생이 엄마한테 우울증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합니다.

 

“이년아, 네가 우울증이면 엄마는 벌써 자살했겠다!”

 

이 반응의 핵심은 물론 딸의 우울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우울증의 극한에 자살이 있다는 바로 그 오해 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니 가히 그럴만하다 싶지만 죽을 마음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깊은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바깥’ 소리일 뿐입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음이란 관념 자체가 아득해서 생각조차 형성되지 않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죽을 마음 일으키는 것도 에너지인데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망연히 널브러져 있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죽음을 어떤 힘으로 택할 것입니까. 자살이란 산 사람이 스스로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 아니던가요.

 

적어도 이 자발성에 관한 한 자살은 저항이며 반란이며 혁명입니다. 저항이, 반란이,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억압은 극단적 수준의 것이었고·······포로는 고갈의 한계에 와 있었다. 굶주리고 쇠약하며 상처로 가득했고·······해진 넝마 같은 인간이었다.·······현실세계에서 혁명은 넝마들로는 되지 않는다.

 

넝마”! 이보다 신랄한 표현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아뿔싸! 넝마에게 반란을 질문하다니. 이 질문은 그러므로 질문자에게 되돌아가야 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기념물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자신의 무거운 사슬을 끊는 노예의 상像은 수사적인 것이다. 그의 사슬은 좀 더 가볍고 느슨한 구속에 메인 동료들에 의해 끊어진다.

 

그렇습니다. 답은 자명해졌습니다. 저항의, 반란의,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누가 넝마의 발목에 채워진 사슬을 끊어야 하는지. 이들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고생을 덜했구나!”

 

이들이 바로 저, 그리고 그대가 아닐는지요. 대담하지 못한가요. 편협한가요. 안정적이고 평온하지 못한가요. 관대하지 못한가요. 그러면, 그렇다면, 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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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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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급으로부터 내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반장인 듯한 똘망똘망해 보이는 한 소년이 내게 예의 그 익숙한 질문을 했다. “왜 도망치지 않으셨어요?” 나는·······설명했다. 별로 납득이 되지 않은 소년은 내게 감시탑과 출입문들, 철조망과 발전소의 위치를 넣어서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했다.·······나는 최선을 다해 그려보였다. 소년은 몇 초간 약도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요구하더니 나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을 말했다. 여기서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한다. 그러면 탐조등이 꺼질 것이고 고압전류의 철조망에도 전기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걱정 없이 나가면 된다, 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에 대하여-인용자 변경)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상상력은 치명적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이는·······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굶주림이 한 끼를 건너뛴 사람의 배고픔인 것처럼·······.(191-192쪽)

 

서구의학은 정신을 뇌로 환원하기 때문에 뇌를 조절하는 약물 중심으로 마음병을 치료합니다. 저는 정신이 뇌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 그러니까 대화/상담 중심으로 마음병을 치유합니다. 정신은 말을 매개로 접히고 펴집니다. 말은 본질적으로 은유(와 환유)입니다. 은유인 말을 매개로 접히고 펴지는 정신 역시 은유의 세계입니다. 은유의 세계인 정신에서 은유의 수사修辭만큼 좋은 소통/치유 방편은 없습니다. 은유의 수사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삶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 (이야기)를 들려주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은유의 본디 목적에 맞게, 다른 에피소드 속에서 같은 메시지를 찾아냅니다. 치유가 잘 일어납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같은 메시지에는 귀를 막고 다른 에피소드에서 자신보다 덜 힘들다는 근거를 찾아냅니다. 치유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마음병의 형태와 연결되지만 좀 더 깊이 따지고 들어가 보면 병 이전에 인간 자체의 한계성에 닿아 있는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필경 후자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는·······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프리모 레비가 정확히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경험은 본질상 같아도, 심지어 더 본질적이어도 자기 감각 너머의 무엇입니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남 가슴 속 대못보다 더 아프다.’는 우리 속담이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다시 명쾌한 고찰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심은 ‘커’ 보이고 주변은 ‘작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 문제는 ‘어려워’ 보이고 남의 문제는 ‘쉬워’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 판단은 ‘뛰어나’ 보이고 남의 판단은 ‘모자라’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치우친 생각, 그러니까 고정관념은 언제나 진지하고 의젓하게 충고합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프리모 레비에게 아우슈비츠 탈출비법을 가르쳐준 그는 무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였습니다! 마치 이 어린이처럼 인간은 타인의 경험을 주변화합니다. 진심을 다했다고 해서 안이함과 어설픔을 넘어 순진한 고의로 가한 공격이 백지화될 수는 없습니다.

 

세월호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우리사회는 끊임없이 이런 짓을 자행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자는 자신이 부보들보다 더 가슴 아프다는 할리우드 “상상력”을 공식석상에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엊그제 나온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합의안’은 전지적 시점을 취함으로써 다시 한 번 아이들의 죽음을 모독하고 부모들의 고통을 희화하였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죽어간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는 우리의 인지 무능력을 철저히 자각하는 데 바탕을 두고서만 성립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은 묻어둔 채 보상과 지원, 그리고 추모로 떠들썩하다가 잊고 말 것입니다. 그 잊음으로 우리는 영원히 인간을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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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지론자가 아닌 사람들, 어떤 믿음이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유혹에 더 잘 저항했다.·······

  아메리처럼 나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라거에 들어왔다.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해방을 맞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오히려 라거의 경험이, 그 무시무시한 부당함이 내 불신을 한층 더 굳혔다.·······그럼에도 나는 굴복하고 싶은 유혹, 기도에서 피난처를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낌 적이 있었음을·······시인해야겠다. 그 일은 1944년 10월, 임박한 죽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유일한 순간에 일어났다.·······한 순간 나는 도움과 피난처를 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는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되찾았다. 경기의 끝에 가서 경기의 규칙을 바꾸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이 비록 지고 있는 경기일지라도.·······나는 그 유혹을 지웠다.·······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아메리와 나, 우리 둘 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적 믿음이든·······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176-178쪽)

 

제법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강남의 그 뜨르르한 대형교회 권사 한 분이 잠이 도통 오지 않는다며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자세한 진단 결과 그 불면 현상은 우울증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그 의학적 진실을 말씀드리자 그 분은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한테 우울증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저는 예의를 갖추어 그러나 단호히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논리로 의학적 진단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분은 발을 탕탕 구르시면서 한의원을 떠나셨습니다. 아마 기독교 신앙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 권사님 의견에 동의하실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순서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질문을 드물지 않게 받습니다.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하면 어떻게 독이 될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기독교인 우울증 환우와 상담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콕 찔러 한 부류를 지적한다면 목회자 부인들입니다. 이들이 신앙이 잘못되어 우울증에 걸린 것입니까. 이들이 신앙이 모자라 우울증을 신앙의 힘으로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정말로 이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우울증에 걸리고 신앙이 모자라 우울증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잘못되고 모자란 신앙이란 대체 어떤 신앙일까요. 그 신앙이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바로 그 신앙 아닌가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생사가 엇갈리는 찰나적 삶에서도 고통이 그득한 매일의 삶에서도 신앙인은 더 잘 살아냈다고 적고 있습니다. 자신은 결곡한 불가지론적 지식인으로서 죽음을 느끼는 순간에도 신앙의 ‘유혹’을 거절한 사람이지만 신앙인의 이러한 특별함, 좀 더 정확히는 탁월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앙인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광활함the Spaciouness의 세계를 향해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때 인간 존재와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고 마는 것이기에 넓은 관점의 확보야말로 관건적 사항이라 할 것입니다.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와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한한 인간보다 큰 존재인 신을 믿고 구원과 행복을 의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우울증에 걸리고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수준일 터인데 어찌 그 수준으로 아우슈비츠 안에서 탁월함으로 빛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을 섬기면서 이를 광활함의 세계로 열린 존재와 삶이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입니다. 인간의 사적 영역으로 신을 유폐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로서 산다면 그는 분명히 공적 영역,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신의 뜻을 펼치면서 살 것입니다. 기독교 어법으로 말한다면 하느님나라 구현에 헌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은 오히려 두호하면서 교회 건물이나 호화롭게 짓고, 세습이나 하고, 막무가내 선교나 하고, 타종교 모독이나 하면서 이를 어찌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와 삶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불가지론자가 아닌 사람들, 어떤 믿음이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유혹에 더 잘 저항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사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이 퇴행일로를 치닫고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밝은 쪽도 있어요,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자기 밝음에 눈멀어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이웃을 내팽개치는, 그러니까 신을 자기 안으로 유폐시키는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퇴행과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불가지론 지식인 프리모 레비의 질문 아닌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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