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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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시간은 언제나 우리 시간, ‘살아낸 시간’temps vécu일 따름이다.······시간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공간세계의 비유를 필요로 한다.(21-24쪽)

 

바로 앞에서 기호A를 이야기하며 역설 문제를 화두로 든 바 있습니다. 사실 역설이라는 표현도 다치多値 논리를 수용하는 동양전통에서 보면 그다지 탐탁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가 지닌 대칭성의 진실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니 구태여 역逆이라는 역한 표현을 쓸 까닭이 없으니 말입니다. 대칭성에서 예시한 것 가운데 동同:이異는 일치(포개짐)·맞물림·항상恒常과 차이(쪼개짐)·어긋남·변역變易의 문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항상恒常과 변역變易의 짝을 뽑아 오늘 이야기의 주제로 삼겠습니다.

 

세계는 늘 그러한 존재being와 바뀌어 되어가는 생성becoming의 대칭으로 구성됩니다. 그 구성 세계는 자발적으로 깨어져 사건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이 대칭을 다른 이름으로 말하면 공간과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공간은 항상성의 축에 서고 시간은 변역성의 축에 선다는 말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항상성은 변역성에 포함包涵(包含 아님)됩니다. 붓다는 이를 무상無常의 진리로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여기 우리의 필요를 좇아 말한다면 시간이란 변화의 장이자 그 인식조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이야기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공간세계의 비유”로만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변화의 결과가 그렇게 현현되기 때문입니다. 공간 은유로 전해지는 시간-사건, 그러니까 변화는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만 진실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는 말에 이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장 아메리의 진실은, 그러나 부분적 진실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가기 전에 시간과 더불어 왔습니다. 오지 않았다면 가지 못합니다. 오고감의 쌍방향 변화, 그 무상의 진실을 깨친 붓다의 진리를 만났다면 장 아메리는 과연 어찌 되었을까요? 대답은 진부합니다. 그 진부한 대답 대신 우리는 돌이켜 이런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장 아메리는 왜 변화, 그것도 사라짐에 이토록 강고하게 착념하였을까?”

 

장 아메리에게 시간은 “살아낸” 것만 시간입니다. 그가 살아낸 시간은 나치가 파괴한, 그러니까 변화시킨 세계와 맞선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투쟁의 와중에 잡혀 잔혹한 파괴, 그러니까 변화의 폭력을 온몸으로 당한 시간이었습니다. 멀쩡한 뼈가 으스러진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마이어가 아메리로 바뀐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시간에서 그에게 강요된 변화가 너무나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불가항력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변화의 시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허무”로 규정된 것입니다. 그 늙어감의 변화가, 그 죽어감의 변화가 균형·타협·통속화·싸구려 위로로 희화되는 꼴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분은 오류입니다. 그러나 장 아메리의 오류를 말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살아낸” 시간을 톺아보아야 합니다. 그의 “시간,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허무”가 그의 “살아낸” 시간에서 가지는 진릿값은 남은 사람의 “살아낸” 시간에 따라 1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살아낸” 시간을 균형·타협·통속화·싸구려 위로로 검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21일째 2014년 4월 16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은 과연 어떤 시간일까요? 우리는 시방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고 있는 중일까요? 영령들이 생사의 강을 건너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도 그들을 역사로 세우지(常) 못한 채 신화로 떠내려가게(變)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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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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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늙어가는 사람을 A라는 약어로 부르기로 하자. 우리가 지금 성찰하고자 하는 운명을 공유하는 동료 모두가 이 약어에 포함된다. A. 이것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수학적이고, 최고로 추상적인 기호다. 동시에 독자에게 상상력의 지극히 넓은 자유공간과 더불어 구체화의 능력을 부여해주는 기호이기도 하다.(18쪽)

 

lîla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있습니다. 거룩한 제의와 질탕한 놀이를 동시에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 하나에 모순되는 두 의미를 담은 대표적인 역설어휘입니다. 우리말에는 이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역설어휘가 있습니다. [아래아 한]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래아 한]은 30개에 달하는 뜻(크다, 밝다, 맑다, 희다, 바르다, 높다, 같다, 다르다, 많다, 길다, 온전하다, 아우르다, 통일하다, 오래 참다, 강하다, 번성하다, 가운데, 동東, 하나單, 하나唯, 전체, 처음, 한나라, 한겨레, 하늘, 으뜸, 위, 임금, 가장자리, 정해지지 않음)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一:다多, 중中:변邊, 동同:이異라는 세 쌍의 대칭과 그 완성인 혹或 품고 있습니다.

 

일一:다多는 전체·보편·종합·위대함과 개체·특수·해체·사소함의 대칭을 나타냅니다. 중中:변邊은 본질·중용·고요함과 지엽·극단·떨림의 대칭을 나타냅니다. 동同:이異는 일치(포개짐)·맞물림·항상恒常과 차이(쪼개짐)·어긋남·변역變易의 대칭을 나타냅니다. 이 세 쌍은 세계의 비대칭적 대칭의 구성 원리, 또는 구조를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대칭적 대칭구조가 자발적으로 깨지는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한, 정해진 궤도가 없는, 무한히 다양한 관계의 네트워크가 생겨납니다. 이 역동적 비결정성, 불확정성이 바로 혹或입니다.

 

A. 이것은 lîla나 [아래아 한] 같은 역설어휘가 없는 상황에서 추상과 구체를 한꺼번에 담아내기 위해 장 아메리가 찾아낸 최상의 기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호는 어휘와 다릅니다. 임의의 약속은 담아낼 수 있지만 내포한 뜻의 경험이 축적되어 나오는 통찰과 지혜를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거나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모순, 그러니까 이율배반을 어떻게 풀어내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근본 지점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은 모순, 그러니까 이율배반의 문제를 오랫동안 형식논리학에 맡겨 왔기 때문에 진실에 육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변증법(적 논리학) 역시 탁월한 결과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장 아메리 또한 이 전통 속에 서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의 사유가 가차 없을수록, 그의 삶이 균형·타협·통속화·싸구려 위로를 거절할수록 모순, 그러니까 이율배반의 문제가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떤 길목에 다다를 때마다 되풀이해서 원효가 떠올랐던 것은 우연이 아니지 싶습니다.

 

A는 균형을 깨뜨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을 해냈을까? 그는 그랬기를 희망한다. 남은 날들은 쪼그라들며 메말라 비틀어지리라. 그럼에도 그는 진리만큼은 간절히 말하고 싶었다.(211쪽)

 

이 책의 마지막 네 문장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거듭 읽으며 먹먹해진 가슴에 손을 얹고 한참이나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글 아니었나. 이 도저한 안타까움이 기호A에 이미 내재된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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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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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나는 늙어가는 사람, 노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런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아마도 약간의 아픔을 덜어주기는 하겠지만, 말하자면 무해한 진통제와 같다는 의견을 여전히 고집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런 노력은 늙어감이라는 비극적 불행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인 것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11쪽)

 

유한한 생명으로서 인간에게 죽음은 불가피하다는 이치로 보면 늙어감이란 그 이치를 따라 일어나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이 진실을 모를 리 없는 장 아메리가 구태여 늙어감에 대하여 “비참한 운명의 짐” 또는 “비극적 불행”이라는 어두운 규정을 내리고 거기 터하여 추상같은 사유를 벼리는 연유가 무엇일까요? 이 의문은 책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늙어감이 개인의 생물학적 층위에서만 진행된다면 아마도 문제는 훨씬 더 간단명료했을 것입니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학적인 층위에서 소외와 불평등, 심지어 수탈의 형태로 진행되므로 문제에는 복잡한 주름이 잡히고, 다단한 결절이 맺힙니다. 이런 주름과 결절은 생물학적 늙어감에 비참함과 비극성을 더 깊이 새겨 넣어 “근본적인 것”을 형성합니다.

 

근본적인 것”은 처음부터 사회 또는 국가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또는 국가가 바로 그 “근본적인 것”을 야기하고 강화한 원죄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도 법도 제도보장도 그 원죄를 덮고 가려는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효과는 당연히 “진통제” 수준입니다. 설혹 그 장치에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깃들어 있다 하더라도 본질은 동일합니다.

 

근본적인 것”이 사회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님에도 사회가 풀 수 없는 문제라면 대체 그 “근본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요? “근본적인 것”은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서 일어난 경험사건이 해체 변화를 일으킬 때 나타나는 외상外傷적traumatic 상실입니다. 사는 동안 상실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외상 상황입니다. 장 아메리의 심장은 늘 여기서 뛰고 있습니다.

 

“나는 나치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전사다. 잡힌다.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는다. 탈출한다. 다시 잡힌다. 다시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다. 다시 고문을 받는다. 나치가 패망한다. 나는 내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지금의 삶은 지난날의 삶과 정녕 같은 것일까. 나는 과연 내 자신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장 아메리의 현재에 대한 질문은 늘 과거의 극한 경험과 연동되어 일어납니다. 시차는 없습니다. 오직 삶의 차이가 극한의 질문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자신을 의학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외상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치유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매순간 격정emotionalism 상태를 살았습니다. 격정은 삶의 모든 순간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결국 삶 자체가 근본적인 것이므로 그는 단 한 순간도 “근본적인 것”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치 패망 이후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외상적 상실, 그러니까 늙어감이라는 “근본적인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아픔이 심해집니다. 그렇게 장 아메리는 아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당장 좋기로는 “진통제”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통제”는 그 자체로 무해해도 결국은 유해합니다. 아픔이 가닿는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외면이 죄악이란 것을 온몸으로 깨친 장 아메리는 “진통제”를 거절합니다. 그는 “진통제” 공동체 사회 저 너머 어떤 새로운 아픔의 공동체를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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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일반이라는 보편적 문제에 지성이 등을 돌리는 시대에, 그리고 오로지 체계와 기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시대에, 나는 ‘살아본 구체적 경험’le vécu만을 철두철미하게 고집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근접하게나마 충실하게 그리려는 노력은 ‘성찰’이라는 방법으로만 감당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의 깊은 관찰과 공감 능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불안했던 시절의 자기 체험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저자는 없다. 있는 힘을 다해 절제하려 노력하면서도 극히 개인적인 면모를 밝혀두는 이유는 그게 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일반적 교훈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희망에서다. 그래도 이런 개인적 면모를 밝히는 두려움은 더욱 크기만 하다. 책은 저마다 그 운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군가의 운명을 정해줄 수도 있다.(6-9쪽)

 

저를 포함한 먹물 끼 있는 부류들은 책이다 하면 으레 일련번호 매겨진 두세 층위의 제목, 역시 일련번호 매겨진 각주, 불문율로 전제된 그리스 고전수사학, 기승전결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가 어려운 것은 이 관성을 흩뜨려놓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디서 읽기를 시작해도 거기가 그냥 시작이고 어디서 읽기를 끝내도 그냥 거기가 끝입니다. 단도직입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그 상태에서 닫습니다. 독자를 설복시키기 위한 증거 제시도 없습니다. 모든 순간 자신의 성찰을 도저하게 밀어붙일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 책이 이래?”

 

시종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A에 실어 저자는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있는 힘을 다해 절제하려 노력하면서” 꺼내놓습니다. 익명의 보편인간인 A의 허다한 에피소드 가운데 랜덤으로 뿌리는 방식입니다. 드러냄과 감춤 사이의 칼 날 위에서 장 아메리의 개인적 체험은 순간순간 역사가 되어갑니다. 이 책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을 타고 흘러 이역만리 조선 땅 무명의 의자醫者 앞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의자, 마침 이순耳順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뼈 시린 지금 어떤 운명 지움이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대체 이 무슨 운명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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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벽과 나무들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화가처럼 살았다.

그 틈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정경을 그리려

붓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밤이 찾아와

그릴 수 없었으며, 체념한 사이 낮은 다시 밝아왔다!

 

프루스트Proust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

 

 

서시입니다.

 

시간 속으로 배어든 모순이 공간 이미지로 펼쳐지며 장 아메리의 고뇌는 극적인 비장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려 붓을 들면 이미 어둠이고 체념하면 다시 빛인 이 도저한 어긋남. 발끝 태우는 희망의 덜미를 잡아채 절망의 아득한 심연에 빠뜨리고야 마는 인간 한계. 프루스트의 눈부신 서정 저 너머 아메리는 더욱 시퍼런 칼날을 딛고 서 있습니다.

 

『늙어감에 대하여』를 꿰뚫고 흐르는 자각은 모순의 경계에 노루 사슴 뛰노는 비무장지대 따윈 없다는 진실에 대한 것입니다. 단 한 치의 안일도 허락하지 않는 이율배반에 자신의 사유와 삶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장 아메리의 고뇌는 “균형을 깨뜨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211쪽)로 한사코 달려가고야 맙니다. 균형과 타협과 통속화, 그리고 싸구려 위로를 온통 뒤집어쓰고 사는 우리가 장 아메리를 더없이 불편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 할까요? 서시의 느낌을 보고 바로 책을 덮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밝아왔다 하니 나중에 뭔가 있지 않을까 하고 발맘발맘 따라 나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장 아메리는 모순, 그러니까 이율배반을 어찌 한다는 것인가, 그 궁금증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과연 장 아메리한테서 모종의 답을 얻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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