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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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예상된 결말을 별다른 두려움 없이 마주보았다. 그가 용감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용감하다니, 그는 용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성찰을, 반드시 필요한 성찰을 했을 따름이다.(51쪽)

 

넬슨 만델라의 유명한 일화 하나를 기억합니다. 그가 투쟁하다 잡혀 수용소에 갇혔을 때 이야기입니다. 흑인을 짐승 취급하며 살상을 일삼는 수용소장에 맞서야 할 순간이 닥쳐왔습니다. 모두가 공포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데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용기를 그가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군가 바로 지금 나서야 하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성찰을, 반드시 필요한 성찰을 했을 따름이다.”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의 한 걸음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상황에 일대반전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이 성찰, 반드시 필요한 성찰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살핌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체념에서 비롯한 비관과 근거 없는 낙관을 가로지르는 도저한 현실성. 현실은 비관이나 낙관이 거침없이 달려가는 투명한 세계가 아닙니다. 현실은 불투명합니다. 그 불투명한 현실을 인정하면 문제를 마주보는 힘이 생깁니다. 두려움을 내쫓는 부적 같은 용기란 없습니다. 성찰, 반드시 필요한 성찰이 우리를 두려움의 노예 상태에서 깨어나게 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양동작전을 써서 이 진실을 감추려 듭니다. 한편으로는 대놓고 억압·수탈함으로써 사람들을 비관절벽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른바 ‘긍정의 힘’이라는 최면술로 사람들을 낙관중독 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이 비윤리적 권력과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싸워 온 발자취입니다. 장 아메리, 넬슨 만델라, 그리고 오늘 이 땅의 우리 앞에 있는 권력은 본질상 하나입니다. 성찰, 반드시 필요한 성찰이 요구되는 상황을 만들고 그것을 못하게 가로막는 악무한·······. 328일째 봉인의 음모가 깊어갑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다만 우리들이 무저갱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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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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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살아 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둘러싼 성찰이 너무 힘든 나머지 우리를 광기로 몰아가거나 심지어 자살하도록 충동한다 할지라도, 정신이상이나 자기파괴라는 불합리함 속에서 마침내 모순은 해결된다.(51쪽)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통합실조증(정신분열증의 일본식 표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현병이라 함.) 전문가인 의사 마테 블랑코는 통합실조증 환자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고법이 ‘대칭성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밝혀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말에 의해 유지되는 시간 질서를 무시하기도 하고, 평범한 사고에서는 명백히 모순으로 여겨지는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전개시키기도 하며, 부분적인 것을 항상 우주 전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식으로, 통합실조증에서는 명백히 ‘대칭성’의 특징을 갖는 사고가 일상생활의 한가운데로 부상합니다. 마테 블랑코는 이것을 단순한 병리 현상으로 취급하는데 반대하며, 오히려 ‘대칭성의 지성’ 속에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징표’를 발견하려 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대칭성의 지성을 ‘유동적 지성’이라 표현하면서 ‘모순을 끌어안은 채 전체 사고를 하는 직관지’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이 유동적 지성을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이른바 대칭성인류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매우 올바르고 참된 사유입니다. 대단합니다. 이 대단함은, 이미 1400년 전 원효가 이 사유를 완성하였다는 진실을 모르는 한에서만 타당합니다.

 

논의의 핵심은 물론 모순의 문제입니다. 장 아메리에게도 이 문제의식은 마찬가지라는 사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장 아메리의 자세가 마테 블랑코, 나카자와 신이치와 사뭇 다르다는 데서 우리의 논의는 시작됩니다.

 

장 아메리가 광기 상태를 표현한 ‘정신이상’이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통합실조증, 그러니까 정신분열증과 동일한 것이다, 라는 사실을 일단 전제하겠습니다. 이 때, 장 아메리의 문맥은 광기로서 정신이상이, 불합리함이라는 조건 아래,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쪽으로 흐릅니다. 다시, 이 때, 불합리함은 그러면 장 아메리의 어떤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느낌은 그것이 단순한 레토릭은 아니라는 쪽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모든 서양 지식인의 어법 그대로 “말도 안 되는”·······뭐 이런 뉘앙스 아닐까요. 이렇게 해석해야 그 다음 난관이 참 난관이 됩니다. 그러니까 정신이상(정신분열증)이나 자기파괴(자살)로 문제가 “말도 안 되는” 차원에서 해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이상은 모순을 둘로 딱 쪼개어 방치했다는 뜻이고, 자살은 모순을 못 견뎌 죽음 하나를 선택했다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결코, 해결이 아닙니다. 이 아니 난관인가요.

 

모순의 해결은 그것을 끌어안고 전체를 사고해야만 길이 열립니다. 장 아메리의 ‘정신이상’은 길이 아닙니다. 장 아메리의 ‘자살’은 길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끌어안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끌어안지 않으면 전체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전체를 확보하지 못한 부분은 언제나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널을 뜁니다. 그 널뜀은 널뜀으로 영원합니다. (전체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전체는 모순구조에 전제된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오직 진실의 실상을 가리킬 뿐입니다.)

 

모순의 해결은 아마도, 아니 필경 우리 논의의 마지막에야 그나마 그 실루엣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골짜기에는 다만 정신이상과 자기파괴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저 ‘유동적 지성’을 복병으로 심어 놓고 떠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원효라는 위대한 본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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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이름의 과거는 엄존한다. 기억하지 않아도 순수한 감정으로, 직접적이며 그 어떤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 감정으로 존재한다.······이로써 시간은 ‘순수시간’이 된다. ‘내면의 감각’을 고스란히 현재로 보여주는 게 순수시간이다.(48-49쪽)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과·간격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순수시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정으로 존재’하는, 그러니까 ‘감정인’ 시간, 다시 그러니까 ‘감정시간’의 진실을 포착해낸 장 아메리의 경이로운 감각이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고 감히 확언합니다.

 

성급과 독선의 냄새를 풍기는 저의 이런 단호함은 감정의 상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낸 오랜 시간의 체험에서 비롯하였습니다. 불안과 우울로 대표되는 감정의 병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동안, 감정(으로서) 인간이 감정(으로서) 시간을 얼마나 어떻게 아파하는지 생생하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왔습니다. 저 또한 전적인 타자나 초월적 존재가 아닌 까닭에 감염되고 더불어 치유되는 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증득證得할 수 있었습니다. 아픈 기억의 에피소드가 사라진 자리에 감정만이 남는다는 것, 그렇게 남은 감정은 시간에서 간격을 없앤다는 것, 간격이 제거된 시간은 영원한 현재라는 것, 영원한 현재는 절대 경직이라는 것.

 

이 통찰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일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장 아메리의 통찰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진실 가운데 의학적인 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정시간의 형성에는 후각과 대뇌변연계-흔히 감정뇌라 함-의 핫라인이 작용합니다. 이 핫라인은 즉각적·자동적·반복적 가동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임상에서는 보통 “길을 냈다.”고 표현합니다. 길을 따라 생각이 번지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렇게 번지는 생각은 시간의 경과·간격을 무화無化시킵니다. 장 아메리가 늙어감에 대하여 전개한 생각도 이 길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장 아메리의 사유가 매순간 극한의 지점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장 아메리에게 흘러간 시간이란 없습니다. 회한의 과거란 없습니다. 모든 시간, 모든 과거는 일렬횡대의 현재일 뿐입니다. 늙어감도 여기에 귀속됩니다. 죽음도 여기에 귀속됩니다. 의자醫者인 제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순수시간을 알았으므로 감정시간을 앓았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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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는 곧 무의미다.(44쪽)

 

My life has no purpose, no direction, no aim, no meaning

 

스누피, 찰리 브라운이 등장하는 만화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Charles Schulz가 한 말입니다. 장 아메리의 말보다 더 서늘합니다. 찰스 슐츠의 말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and yet I'm happy. I can't figure it out. What am I doing right?

 

장 아메리의 말에는 차꼬가 채워져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뭉쳐진 시간덩어리다.······A는 후회했다. 그저 변두리에만 머물러 산 인생을. 모든 것을 놓쳐버린 지금 물끄러미 바라보는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

 

인생의 의미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이 여기 강아지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과 다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사람 생각에 따라 있다, 없다 ‘말해진’ 대로일 뿐인 것만도 아닙니다. 삶의 전체 문맥에 따라 때로는 ‘무의미’가 의미가 되기도 하고 ‘의미’가 무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무의미에 대한 두 사람의 사뭇 다른 언급 또한 그렇게 뒤적이며 헤아려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찰스 슐츠는 무관심한 아버지와 거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늘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낙제생이었습니다. 선착순 100명을 뽑을 경우 가진 힘 다해 달려가 보면 언제나 101등인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만화 그리기였습니다. 평생 만화를 그리며 살았습니다. 삶의 의미도 아닌 만화로, 삶의 목표도 아닌 억만장자가 되는 불가사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과연 이 삶이 무의미한 것일까요?

 

한스 마이어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그 인문학 공부의 연장선에서 나치와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나치 패망 이후 장 아메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독일을 떠나 벨기에로 갔습니다. 거기서 날카롭고도 치열한 사유로 글을 써 유럽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살았습니다. 과연 이 삶이 무의미한 것일까요?

 

찰스 슐츠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장 아메리는 (비록 A의 이름으로이긴 하지만)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행복과 후회는 같은 지평의 대대待對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찰스 슐츠의 행복은 사적 비전의 중심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장 아메리의 후회는 공적 로직의 변방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리며 우리 자신의 삶을 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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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내적 감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28쪽)······시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공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듯.(32쪽)······늙어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해야 한다.(39쪽)

 

우리사회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한테 존경 받는 어른 가운데 신영복 선생님이 계십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셨던 분입니다. 선생님의 글 중에 이런 요지의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랫동안 감옥의 좁은 독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석방되고 나서 툭 트인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게 된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맞닥뜨리는 벽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시간은 내적 감각으로 형성되고 쌓여 인생으로 기억된다는 장 아메리의 말이 소환해낸 오래된 제 기억입니다. 장 아메리의 수용소 삶 또한 본질적으로 이와 동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니,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당하고 언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아우슈비츠라면 훨씬 더 극단적·배타적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밖으로 한 치도 확산될 수 없는 영어囹圄의 시간, 죽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시간, 이것이 바로 장 아메리를 짓누르고 있는 “늙어감”입니다. 다짜고짜 죽음으로 몰아쳐가는 노도의 시간 앞에서 “늙어감”이란 어감이 주는 경과의 느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물학적 연령 여하도 부질없습니다. 찰나마다 죽음이 엄습해오는 장 아메리의 “내적 감각”으로는 시간도 “늙어감”도 점點적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그의 사유는 극한으로 밀어붙여지기를 거듭합니다. 시간은 곧장 “늙어감”으로, “늙어감”은 곧장 죽음으로, 죽음은 곧장 절대허무로.

 

오늘 아침 어느 신문을 보니 죽음에 대한 특별한 사유체계를 지닌 티베트 승려와 인터뷰한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익숙한 이야기가 오늘따라 진부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승려의 뜻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그 동안 저 역시 맹골수도 영령들에게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와 이 땅의 새로운 역사가 되어주기를 323일째 간절히 빌어 왔기 때문입니다.

 

불현듯 장 아메리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당한 폭력, 그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 거기서 그가 살아낸 시간의 무게, 단도직입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이 조건에서 죽음 너머를 사유하는 것은 안일하거나 호사스러운 관념놀이였을까. 명상이나 선 수행을 통해 빚어낸 이야기와 고문을 당하며 빚어낸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진실이라는 것도 인연의 문제, 아니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깨달아야 할 진리를 못 깨달았다고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장 아메리를 부둥켜안은 채, 저는 또 저의 운명시간을 따라 두 손을 모읍니다. 하루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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